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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희 Feb 12. 2020

가장자리

박춘화 개인전 <가장자리> 전시 리뷰


박춘화,  <모래>  장지에 아크릴채색, 145X194cm, 2019


언젠가 발이 움푹움푹 들어가는 해변에서 어둠이 내려올 때까지, 그리하여 푸른 바다가 검은 물에 가까워질 때까지 한없이 걷고 걸었던 적이 있다. 여름이 아니었으므로 인적은 드물었고 둘씩 짝을 지어 걷던 몇 쌍의 커플마저도 저녁이 되어 바닷바람이 거세지자 하나 둘 사라지고 없었다. 검은 파도 사이로 함께 밀려오는 포말, 언 발아래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검은 모래 벌판. 수 시간 달팽이관을 건드리던 파도 소리는 이미 뇌에 동조화되어 오직 내게 남겨지는 것은 오롯한 적막감이었다. 그곳에 서서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보았다기보다 마주했던 것은.



박춘화, <파도>  장지에 아크릴채색, 130x194cm, 2019



박춘화, <노을>  장지에 아크릴채색, 145x194cm, 2019


박춘화, <파도>  장지에 아크릴채색, 130x194cm, 2019


박춘화, <파도>  장지에 아크릴채색, 130x194cm, 2019


풍경


구릉 너머로 번지는 격렬한 노을, 화폭의 좌우로 넘쳐흐를 것 같이 일렁이는 푸른 파도, 물결의 자국이 그대로 남겨진 모래사장은 화면의 80%를 차지하며 시각을 압도하고, 설경 속 나뭇가지들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미지들은 모두 일렁거린다. 직선이기보다 대체로 곡선인 풍경들. 채도 낮은 겨울의 적막함은 재현의 이미지임에도 다소 미지에 가깝게 느껴진다. 어쩐지 꿈의 배경 같은 장면.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품고 있는 듯이. 


문화지리학자 Cosgrove는 이렇게 말했다. 

‘장소’와 달리 ‘경관(landscape)’은 자연의 윤곽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환기시킨다. 환경이나 공간과 달리 경관은 인간의 인식과 이성을 통해서만 그 윤곽이 우리에게 알려지며, 단지 기교를 통해서만 인간으로서 그곳에 참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Horizons in human geography.1989.)  


붓질 이전에, 풍경의 채택 이전에, 작가가 놓였을 겨울 강원 고성에서의 시간을 상상해본다. 도시와 다른 속도감, 스러져가는 장면을 매일같이 마주하는 일, 잦은 적막 같은 것들.  ‘멋진 바다를 눈 앞에 놔두고도 발 밑 포말에 시선이 멈추고, 해변의 아름다운 석양보다도 고립된 작업실 근처의 메마른 도랑에서 만난 해 질 녘에 마음을 빼앗겼다’(박춘화의 작업노트 중)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하여 채택된 풍경들 앞에서 우리는 동시에 작가가 응시했을 고요 안에 놓인다. 수십 차례 겹쳐 올려 완성되었을 장지의 평면은 고독의 질감과 유사하다. 캔버스에 꾸덕히 올려진 유화의 마티에르 같은 입체성이 아닌, 스미고 마르는 물과 종이(장지)의 물성. 확성이 아닌 조용히 계속되는 읊조림에 가까운 그리기. 이는 작가가 자신도 모르게 채택해 온 풍경과 맞닿아 있다.  


박춘화, <포말>  장지에 아크릴채색, 145x194cm, 2019


박춘화, <포말 II>  장지에 아크릴채색, 145x194cm, 2019


박춘화, <안개>  장지에 아크릴채색, 107x97cm, 2016


사람


이윽고 몇몇의 풍경에서 사람이 발견된다. 밀려드는 파도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두 사람(파도, 130x194cm, 2019), 부서진 파도 끝에 이는 포말 가운데 우두커니 선 한 남자의 몸은 가슴께 쯤까지 물에 잠겨있고(포말, 145x194cm, 2019), 광풍이 이는 듯한 날씨에 갯바위 끝에 홀로 서있는 사람은 오랜 시간 머물며 한없이 부서지는 바다를 바라보고 망연한 표정을 띄고 있을 것만 같다.(포말 II, 94x117cm, 2019). 


일렁이는 큰 화면 속에서 이들은 모두 점처럼 작고 희미하다. 작가의 2015-16년도 작품 안에서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얼굴이 아니라 등이 짓는 표정. 지워져 가는 희미한 존재. 미처 발견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목소리들. 그런 목소리들은 주로 세상의 가장자리에 점처럼 머문다. 아니, 머문다기보다 계속해서 밀려난다. 커다란 파문하나 일으키지 못하고 삼켜올 듯한 파도 앞에서 그저 말을 삼키는 쪽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들은 왜 희미해져 가는가. 하물며 가장자리에서. 


그렇다면 가장자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한가. 그곳의 풍경은 선명한가. 다수의 시선의 한가운데 선명한 현재의 풍경이 존재한다면 ‘가장자리’란 사건이 지나간 후의 풍경이며 소수의 후일담이다. 듣는 사람이 거의 없어 말없는 세계이다. 그러한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가는 사람, 이미 지나가버린 후의 자리를 기어코 다시 들여다보는 사람, 스러지는 것 앞에서 멈추어 서는 사람, 가장자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그것은 명분으로 움직여지는 ‘중앙’의 세계에는 찾기 힘든 ‘가장자리'의 고요한 파문이다. 


그리는 사람의 윤리를 생각한다. 단순한 재현이 아닌 가장자리에 선 작가의 분명한 주목에 대하여. 박춘화 작가의 이번 <가장자리> 전시를 보고 두 번째 방문에서 작가에게 건넨 이제니 시인의 시로 리뷰를 마친다.





너는 얼음도 구름도 바람도 물도 없는 곳에 도착한다. 너는 작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세계는 천장 한 귀퉁이로 모여드는 세 개의 직선과 다름없었다. 너는 하나의 꼭짓점에 모인 세 개의 직선을 늘일 수 있는 데까지 늘인다. 직선은 점점 곡선으로 휘어진다. 휘어진 곡선이 너를 향해 모여든다. 무수한 사람이 네 속에서 들끓고 있다. 무수한 목소리가 네 목소리 위로 내려앉는다. 무수한 길이 너를 지나간다.

기차는 얼음의 나라로 간다고 했다.

하얀 눈 위의 하얀 나무속을 건너간다고 했다.

너는 기차에 실려 간다. 너는 마비된 채로 나아간다. 너는 시간에 굴복한다. 너는 중력에 결박된다. 너는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움직이고 있다. 밤과 낮으로. 머리와 영혼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몸 밖의 일인가 몸 안의 일인가. 몸의 안과 밖이 함께 움직이며 너를 데려간다. 너를 데려가는 곳은 언젠가의 너 자신이다.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던 매 순간의 너 자신이다. 너는 작아지면서 어려진다. 너는 건너가면서 여려진다.


- 이제니, <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 중 




박춘화 개인전 <가장자리> 

2019.12.11.~2019.12.17

@아트비트 갤러리 


※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작품지원사업-리뷰비평, 박춘화 작가의 선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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