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필사

필사록 시작에 앞서..

by 루빈

내 세계는 작은 방이 전부였다. 한쪽으로 트여 있는 미닫이문으로 마을의 개천과 다리가 보였다. 그 시절 나는 타임머신 놀이를 했다. 길게 늘어선 커튼의 끝을 잡고, 그 안으로 들어가 반대편 끝으로 나온다. 그러면서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10년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10년이 지난 후 다다른 곳은 좁은 세계를 넘어 내가 완전히 자유롭고 충분히 행복한 세계다. 눈을 감고 진짜로 10년이 지난 후 똑같은 놀이를 하며 지금을 기억해야지 라고 다짐한다. 몇 년 전 실제로 커튼을 잡고 같은 놀이를 한 적이 있다. 10여년에 걸친 시간을 뚫고 지나와 보니, 내 삶은 정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 김원영, 희망 대신 욕망 중에서-


몇 년 전 독서모임에서 <실격당한 사람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책의 발제를 맡았다. 김원영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고, 전작 <희망 대신 욕망>을 찾아보았다. 그때 나는 기흥 도서관에서 <희망 대신 욕망>에서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을 필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위의 구절을 읽었을 때 기분이 묘해졌다. 10여 년 전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번역 일을 시작하던 무렵이었고, 그때도 나는 도서관에 책을 읽으며 글을 옮겨 적고 있었다.


10여 년 전의 나는 내가 번역을 계속할지 몰랐다. 우연한 계기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딱히 번역가로서, 프리랜서로서 살아가겠다는 전망이나 목표 같은 것도 없었다. 간간이 일이 들어오면 했고, 일이 없을 때는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열심히 책을 읽고 노트에 옮겨 적었다. 나의 주업이 독서와 필사이고, 부업이 번역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정도로.


그때 나는 김원영 변호사 아니 작가님처럼 10년이 지나면 내 인생이 달라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꿈을 키우지도 못했다. 그냥 책에 파고들었을 뿐이다. 책을 읽으면 현실의 불안과 고민 같은 것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뭐라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도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읽고 있어.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모르겠다. 그냥 책이 좋았다. 마구 읽다보니 무슨 책에서 어떤 내용을 읽고 있는지 나 자신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사라지고 휘발되는 것이 아깝다는 마음에 필사를 하게 되었다. 100권, 200권, 300권........ 점점 필사의 기록이 쌓이면서 이 기록이 1000권을 넘으면 그때는 내용을 정리해서 글을 써보자고 생각했다. 꼭 그렇게 해야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그러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내가 필사한 책은 1063권(클라라와 태양) 째에 이르렀다. 무턱대고 책을 읽고 필사한 것으로 인생이 바뀔 수 있을까? 나는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기를 바라는 것일까?


‘정말 완전히’ 까지는 아니지만 달라진 점도 있다. 필사에 빠져 있던 2009년 당시, 나는 번역가라기보다는 백수였다. 실은 꽤 오랫동안 스스로 ‘번역가’ 라고 지칭할 수가 없었다. 번역가라고 하면 대가, 전문가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고 꽤 오래 그렇게 생각했다. 번역을 한지 10년이 넘고, 역서가 20권을 넘어가는 요즘에 이르러 이제 나 자신을 번역가라고 소개해도 되겠다는 마음에 이르렀다. 그전까지는 프리랜서고요, 번역 일을 하고 있고요, 번역 프리랜서..... 등으로 애매하게 나를 소개해 왔다.


시간 때문에, 어떤 실적(?) 때문에 나에게 번역가라는 호칭을 허한 것은 아니다. 나는 번역을 좋아하게 되었고, 열심히 하고 있고,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에 이제 나를 “12년차 번역가”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가장 큰 변화는 내게 번역가라는 직업이 생긴 것이겠다.


한편으로 꾸준히 이어지는 것도 있다. 나는 여전히 책을 좋아하고, 필사를 하고 있다. 아침이면 모닝페이지를 쓰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꾸준히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더 나은 글을 쓰고, 더 좋은 번역을 하겠다는 목표가 생겼기 때문에 나를 더 잘 돌보려 한다. 모닝페이지와 독서와 필사가 정신적인 건강을 위한 것이었다면 몸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운동하는 습관을 들이려 노력한다.


성장을 위한 또 하나의 노력으로 글을 쓰는 방식에도 변화를 주려 한다. 여태까지는 혼자서 쓰고, 모임에서 썼지만 올해부터는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통해 조금씩 내 글을 밖으로 내보내고 있다. 아직은 여러 면으로 서툴다. 좋아요의 횟수가 조금이라도 높게 나오면 기분이 좋고, 낮게 나오면 성적이 떨어진 것처럼 울적해하기도 한다. 일부러 바쁜 스케줄 전에 글을 올리기도 한다. 한번 글을 올리고 나서 계속 좋아요 등에 연연하는 것에서 짐짓 마음을 옮겨 두기 위해서.

하지만 나에게 거듭 말한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은 꾸준히 성장하기 위해서이고, 쌓아만 두었던 나의 이야기를 꺼내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라고. 반응이 더 좋으면 물론 좋겠지만 반응 그 자체를 목표로 삼아 너무 휘둘리지는 말자고.


예전에 함께 번역 수업을 듣던 동기 중 한 사람이 내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자 건네준 충고 같은 것이 있었다. 너무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멘탈이 강해져야 한다고도 했었나. 그 친구도 작가가 꿈이었고, 실제로 책을 내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아직 공개된 플랫폼에 글을 올릴 엄두도 내지 못했던 터라 먼 이야기처럼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조금씩 가까운 이야기로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겠다고 다짐한다. 혼자 쌓아오는 일은 계속 해왔으니까 앞으로는 정리해서 나누는 일을 해보자고, 나에게만 의미 있었던 이야기들을 조금씩 주변에도 의미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가는 일을 시작해 보자고. 그래서 요새는 ‘필사록’ 이라는 폴더에 저장된 파일들을 거의 매일같이 열어본다. 몇 가지 주제나 키워드로 정리하여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보기 위해서이다.


그 처음을 앞두고 아직도 잘 모르겠고, 준비가 덜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준비가 다 끝날 때를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덜 된 상태로나마 직접 써 보면서 공부하고 성장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고 한다.


그리하여 필사록을 정리한 첫 주제는 “끌어당김” 이다. 끌어당김이라니, 그게 뭐죠? 왜 첫 주제가 끌어당김인가요? 무엇을, 어떻게 끌어당기는 거죠? 이런 질문들에 대해 앞으로 차근차근 답해볼까 한다. 아무튼 필사에서 시작해 어쨌거나 필사록을 갈무리해서 글을 써보겠다는 결심으로 끝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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