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는 것과 비워내는 것

[세계여행 Day1] 여행 첫 날의 이야기 / 대한민국, 춘천

by 시소유
세계여행 시작!


엄마가 동생을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떠 하루를 시작했다.

엄마는 과일을 갈아서 우리에게 주었다. 한 컵 씩 먹고 나니 식구들이 하나 둘 출근했다.


이윽고 집에는 우리 둘만 남게 되었고 시간은 꽤 넉넉했다. 남편은 조금 더 잤다. 나는 왜인지 다시 잠이 들어지지 않아서 샤워를 했다. 씻고 나와서 남편을 깨우고 짐 정리를 한 후 엄마가 어제 우리 먹으라고 사주신 아침 빵을 먹었다. 이제 배도 든든해졌겠다, 앞 뒤 양쪽으로 짐을 들쳐메고 집을 나섰다.

옥수역까지는 보통 마을버스를 타고 내려가는데 오늘은 그냥 걸었다. 그 작은 버스에 이 큰 짐을 메고 타는 것이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약 10-15분 정도 타는데 이 무거운 배낭을 풀었다가 다시 메기도 귀찮을 것 같았고, 처음 멘 기념으로 좀 걸어보고 싶기도 했다.

어제 저녁에 남편이 그랬다. 오늘 아침, 우리 기차 시간 전에 지우오빠가 온다는 거다. 어디로 온다구? 옥수역으로 온다는 거다. 우리 열차는 옥수역에서 탑승하는 itx-청춘열차 11시 09분 차였다. 이보다 더 이른 시간에 온다구? 여기로?

그는 정말로 왔다. 우리가 가기 전에 주고 싶은 게 있었다며 선물까지 챙겨갖고는 왔다.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그는 우리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걸어들어와보라 한다. 그는 마구 재밌어하며 몸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오는 우리를 영상으로 남겼다. 이후에도 그는 계속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나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지우오빠의 선물은 네임텍이었다. 언제나 그리운 모교의 이름이 박힌 네임텍이었다. 받자마자 이름을 써서 배낭에 예쁘게 달았다. 항상 살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사지 않았었는데 딱 알맞은 선물이었다.

다이소에서 접이식 우산을 하나 사 가려고 했는데 알맞은 우산이 없어서 사지 못한 것을 보고 지우오빠는 자신이 가지고 온 접이식 우산을 나에게 주었다. 오늘 저녁에 60퍼센트 확률로 비가 온다고 했다면서, 춘천 도착해서 우산살 곳 찾느라 애쓰지 말고 그냥 자기 걸 쓰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춘천행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함께 기다려주었다. 그는 우리가 기차에 오른 것을 보고 나서야 돌아서서 갔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따뜻한 마음을 받나 싶었다. 받은 만큼 돌려줄 수 있는 삶이면 좋겠는데, 평생을 그렇게 살아도 내가 지금껏 받은 마음들 만큼 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춘천행 기차에 올랐다. itx-청춘열차로 옥수역에서 남춘천역까지 약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남편은 이어폰을 꺼내 핸드폰에 꽂더니 한 쪽을 자신의 왼쪽 귀에 꽂고 다른 한 쪽을 내 오른쪽 귀에 꽂는다. 가만히 듣고 있는데 '춘천 가는 기차~'하기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봤더니 "이 노래 몰라?" 한다.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라는 유명한 노래라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처음 들었으니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이 가수도 우리의 여행에 동행하는 것만 같았다.


다음으로는 아주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아주 멀리까지 가 보고 싶어 그곳에선 누구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 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멍하니 앉아서 쉬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어도 서두르지 않는 법
언젠가는 나도 알게 되겠지 이 길이 곧 나에게 가르쳐 줄 테니까

촉촉한 땅바닥, 앞서 간 발자국, 처음 보는 하늘, 그래도 낯익은 길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새로운 풍경에 가슴이 뛰고 별것 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떨면서
나는 걸어가네 휘파람 불며 때로는 넘어져도 내 길을 걸어가네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 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내가 자라고 정든 이 거리를 난 가끔 그리워하겠지만
이렇게 나는 떠나네, 더 넓은 세상으로

- 김동률, <출발>

심장이 저릿했다. 이건 내가 중학교 때부터 너무 좋아했던 노래다. 멜로디도 너무 좋지만 가사에 홀딱 반했었다.

지금 와서 이 가사를 다시 음미해보니 정말 소름이 돋도록 우리 이야기다. 그때부터 난 이렇게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여행을 그리고 있었던 걸까? 딱 이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여행.


이후에도 현수DJ는 너무나도 완벽한 선곡을 이어갔다.

제이래빗 <낭만여행>, 김동률 <여행>, 제이래빗 <웃으며 넘길래>,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남춘천역에 도착했다!

춘천에서 우리가 묵을 곳은 에그하우스이다. 부킹닷컴을 통해 예약했다. 숙소에 짐을 풀어두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오늘 갑자기 날씨가 더워졌다. 아니, 더웠다 추웠다를 변덕스럽게 반복하다 오늘은 더운 날이었다,가 조금 더 맞을 것 같다. 딱 막국수 먹기 알맞은 날씨였다.

꿀맛이었다!



세월의 흔적

밥을 먹고 설렁설렁 아무렇게나 걸어보기로 했다.

정말 아무렇게나 걸었다. 뭔지 모를 다리도 건너 보고 언덕도 넘어봤다.


그러다가 아주 오래된 건물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주변에 '재개발 반대' 현수막들이 걸려있는 것을 보니 시에서는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건물들은 정말 많이 낡아있었다. 마치 과거로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미래에서 온 여행자들처럼 두리번거리며 곳곳을 둘러보았다.

아무렇게나 발 닿는 대로 걸어서 마주한 곳에는 세월의 흐름이 그대로 묻어나는 건물들이 있었다.


오래된 것에는 아릿함이 느껴진다.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자리, 이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나고 또 잊혀졌을까.

파란 피를 흘리는 스위치


마음 다치지 말자


조금 더 걸으니 강가가 나왔다. 공지천 조각공원과 의암공원을 지나오며 걸었다.


가던 길 중간에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남편은 오랜만에 운동을 좀 해야겠다며 신이 나서 턱걸이를 했다.

막간 운동을 끝내고 우리는 또다시 걸었다. 15분 쯤 걸었을까, 우리는 가려고 했던 카페 앞에 도착했다.


"어...? 잠깐만..."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 반지 어디갔지...? 아까 턱걸이할 때 분명 주머니 안에 넣어놨는데..."


아무리 바지를 뒤져봐도 없었다. 다시 돌아가서 운동기구 주변을 찾아보고 올테니 나는 카페에 들어가있으라고 그가 말했다.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마음이 무거울텐데 혼자 가서 찾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속상했고, 두 사람이 함께 찾으면 눈이 네 개이니 더욱 잘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도 있었다.


열심히 왔던 길을 다시 또 열심히 돌아갔다. 그는 얼른 운동기구 쪽으로 가서 찾아보겠다며 뛰어갔고 나는 천천히 우리가 왔던 길을 되짚으며 바닥만 쳐다보고 걸었다.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반지는 아무래도 괜찮으니 그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너무 속상해하지 않게 해주세요.

걷는 내내 바닥은 얄미울만큼 깨끗했다. 어느새 운동기구 근처에 다다랐고 멀리서 봐도 그의 새파란 티셔츠는 착잡해보였다. 반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가 반지를 잃어버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연애할 때에 1주년 기념으로 맞춘 반지를 3개월 만에 잃어버렸다. 그때도 헬스장에서 운동하던 중에 빼놓았다가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울먹이며 전화를 했고 나는 정말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나는 그때에나 지금이나, 별것도 아닌 걸로 그가 너무 속상해하지 않기를, 나에게 너무 미안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겨우 물건에 불과한 것으로 마음 다치지 말자고 했다. 괜히 우리가 물건으로 족쇄를 만들어 속상할 일을 자초했구나, 했다. 주워 간 누군가가 있다면 그걸 팔아서 소고기 한 번 맛있게 사드실 거고, 그러면 그 반지는 역할을 다 한 거 아니냐고 했다. 여행을 다니며 우리가 가장 사랑하게 되는 도시에서 그곳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런 반지로 다시 맞추자, 했다.




마음을 가볍게 비우고, 이미 한 번 왕복한 그 길을 걸었다. 웃음과 따뜻함이 넘치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걸어 와서는 아까 들어가려다 못 들어간 카페에 들어갔다.


나만 반지를 끼고 있으면 좀 그럴 것 같아서 나도 뺐다. 그리고는 하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풀어 그 줄에 반지를 걸었다. 그랬더니 예상치도 못하게 너무 예쁜 목걸이가 탄생했다. 원래 있던 십자가와, 그걸 알맞게 감싸고 있는 로즈골드와 은색 배합의 원이 정말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고 나는 마치 새 목걸이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행 첫 날로서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던, 그런 날이었다.

앞으로의 여행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남은 삶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내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은 날이었다.



2018.04.10.

세계여행 D+1

춘천 에그하우스에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