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21] 남편이라 쓰고 내편이라 읽는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
2018-07-14
모스타르에서 체크아웃 하던 날
눈을 떴다. 그가 침대 주변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수건과 세면도구를 챙겨서는 '나 씻고 올게. 더 자.' 했다.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깼을 때 그는 다 씻고 와서 분주하게 짐을 싸고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켜 앉으니 나에게 다가와 뽀뽀를 하며 '잘 잤어?' 했다.
그는 '잘 잤어?'라는 말 만큼이나 달콤한 사람이다.
밤에 잠이 들어 아침에 눈을 뜨는 일, 잠 들어있는 8시간 동안 아무 일 없이 푹 잘 수 있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 주어 고마웠다. 내 잠의 안부를 물어주어 고마웠다. 나를 좀 더 잘 수 있게 해주고는 자기가 거의 모든 짐을 다 싸놓고도 그가 오직 궁금해한 것이 나의 안녕이라는 것이 참 고마웠다.
막 일어나 푸석푸석하고 꼬리한 내 입술에 먼저 일어나 이를 닦고 온 그의 향기로운 입술이 건넨 뽀뽀, 홀로 체크아웃 준비를 거의 마치고는 방금까지 잠만 잔 나에게 '잘 잤어?'인사하는 그의 모습은 그 어떤 이벤트보다도 로맨틱한 일이다.
2018-07-18
말뫼에서 체크아웃 하던 날
그저께 부터 나는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팔다리를 뒤덮은 두드러기 때문에 자다가 계속 간지러워서 깼고 한동안을 긁느라고 잠에 들지 못했다.
그는 이런 내 모습을 너무 안쓰러워했다. 아침 7시쯤 일어나 수건을 적셔서 갖고와서는 내 팔다리를 닦아주었다. 물이 묻으면 증발하며 열이 방출돼서 간지러움이 훨씬 덜하다면서 정성스럽게 팔다리 구석구석에 물을 묻혀 주었다. 그 후로 나는 두 시간 정도 꿀잠을 잤다.
어제 밤에는 그가 나보다 더 많이 깼다. 내가 조금만 긁는 것이 느껴져도 자기가 먼저 일어나서는 물티슈로 내 팔다리를 닦아주었기 때문이다. 잠결에 나는 몇 번이고 그가 일어나서 물티슈로 내 몸을 닦아주는 것을 느꼈고, 심지어는 싱크대로 가서 물티슈에 물을 더 묻혀와서는 더 많은 물기를 머금은 물티슈로 닦아주는 것도 보았다. 나는 그때 거의 잠들어있는 상태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몇 번이나 그렇게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확실한 건 아주 여러번이었다는 것이다.
남편이 밤새 고생해준 덕분에 나는 어제보다 훨씬 잘 잤다. 아침 9시 반, 그는 언제나처럼 나보다 먼저 일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깬 것을 보고 다가와서는 아침을 먹을 거냐고 물었고, 그러겠다고 하니 능숙한 솜씨로 밥을 지었다. 내가 100일 기념 글을 작성해서 올리는 동안 그는 양파를 볶고 계란을 익혀 볶음밥을 만들었다. 그가 지은 밥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다 먹고 그는 설거지를 시작하며 '샤워하고 와' 했다. 나는 수건과 양치도구를 챙겨 화장실에 가면서 이 모든 게 참 고마웠다.
그는 자신이 날 위해 뭘 얼만큼 해주고 있는지 생색내지 않았다. 나를 위해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저 당연한듯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내가 늘 신기하게 생각하는 점은, 그는 항상 내가 우리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늘 감사해 하면서 자신이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듯이 해낸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보다 훨씬 더 무거운 짐을 들쳐메고 길을 나서서는 철 없는 아들 같은 장난을 친다.
그러면 나는 또 금방 엄마가 된다.
2018-08-07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우연히 연애 4개월 차 시절의 우리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영상 속 내 모습은 지금의 내 모습과 좀 달라보였다. 물론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조금 더 성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이유가 그것만이 아님을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시의 나는 좀 어색해보였다. 다소 날카로웠다.
그때의 내 모습을 마주하고 나니 내가 남편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변화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연애를 시작하며 그에 대해 알아갈 때에 나는 그가 아무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그는 걱정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어서 늘 정신적으로 건강하지만 때로는 뒷일에 대해서 너무 생각하지 않고 행동해서 실수하게 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완전 반대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일종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이 늘 따라다녔던 터라 항상 모든 것을 미리서부터 계획하고 준비했고, 바로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늘 대비책을 갖고 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똑부러진다는 말을 많이 들으며 살았는데, 내 예상 범위 밖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크게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했다. 이런 나에게 그의 삶의 방식은 충격적이었다.
"미리 대비하지 않아서 나중에 이런이런 일이 생기면 어떡해?"
"그럼 그때가서 생각하면 되지. 그때가서 다 어떻게 되게 돼있어~"
사실 이 차이는 아직까지도 우리가 다투는 부분이다. 내 눈에는 분명 더욱 조심해야하는 상황들이 보이고 그는 늘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더 조심하고 덜 조심하는 것의 문제에서는 더 조심하는 것이 늘 옳기 때문에 항상 네 말이 맞지만, 그렇게까지 조심하고 살지 않아도 괜찮아!'하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내가 오랜 시간 그의 옆에서 지내며 편안해진 것은 그가 너무나 편안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떠나갈 것 같다며, 남자인 친구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동아리 모임도 나가지 못하게 했던 옛 애인들과는 달리 그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냥 날 믿었다.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냥 다 잘 될 거라고 믿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내가 그동안 가졌던 강박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 실수해도 괜찮아. 그렇게 미리부터 걱정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 살아져. 내 머릿속에서 모든 것들을 해결하려 애쓰지 않아도 세상은 순리대로 흘러가. 다 괜찮을 거야. 그는 자신이 그렇게 사는 것으로 나에게 이런 메세지들을 주었다.
또한 그는, 나를 조건 없이 사랑했다.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된 이후부터는 그가 나를 사랑하는 데에 어떤 이유란 없었다. 그말은 즉, 내가 사랑받기 위해 해야하는 것, 되어야하는 바, 지켜야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의 행동 중 그 어떤 것도 그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짜증을 낼 때에도 그는 내 짜증내는 얼굴이 귀엽다며 웃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 앞에서는 그 누구한테도 보인 적 없는 '온전한 나'일 수 있었다.
남편의 사는 방식과 사랑하는 방식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는 모든 것을 내 노력과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간의 오만을 내려놓고 하늘의 섭리에 모든 것을 그저 맡기고 살아가는 법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시나브로 변해왔던 거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과거의 내 모습을 보니 확실이 알 수 있었다. 내 표정은 한결 편안해졌고, 눈빛은 부드러워졌으며, 얼굴은 더 예뻐졌다.
아내를 예뻐지게 하는 남편이 최고라던데.
어쩐지 우리 엄마, 해가 갈수록 더 예뻐지더라.
2018.08.08.
이 남자와 연인이 된지 꼭 3년 되는 날에.
세계여행 Day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