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의 남작>이 가르쳐준 '거리의 미학'
이 글은
'고전으로 살아내다' 라는
연재의 다섯 번째 기록이다.
고전을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고전을 읽은 뒤,
내 안에 남은 감정을 기록하려고 한다.
살다 보면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달팽이 요리’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관습이라는 미명의 무례함일 수도 있고, 타협이라는 이름의 비겁함일 수도 있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나무 위의 남작』의 주인공 코지모는
열두 살 되던 해,
누나가 만든 끔찍한 달팽이 요리를 거부하며 나무 위로 올라간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나의 질문은 단순했다.
"고귀한 신분의 남작이 대체 왜 나무 위로 올라갔을까?"
사춘기 소년의 치기 어린 반항이라고 생각했다.
금방 배가 고파서, 혹은 땅 위의 안락함이 그리워서 곧 내려오리라 믿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코지모는 마지막 순간까지 땅을 밟지 않았다.
그는 나무 위에서 평생을 살았고, 결국 하늘로 날아갔다.
코지모의 ‘나무 위 인생’은 단순한 고립이 아니었다.
그는 나무 위에서도 마을 사람들과 소통했고, 저명한 사람들과 서신을 교환했으며,
혁명에 공을 세우고 치열한 사랑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역설을 발견한다.
그가 세상을 더 깊이 사랑하고 도울 수 있었던 것은,
거꾸로 세상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나무 위에 올라간 이후, 결코 땅을 밟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열렬히 시대의 아픔에 동참했다.
우리는 종종 ‘연대’라는 미명 하에 서로의 선을 침범한다.
친밀함과 관심이라는 이유로 서로의 상처를 도려내거나,
타인의 시선에 갇혀 내 진짜 모습을 점차 잃어버린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세상의 억지스러운 논리에 정면으로 부딪혔다면,
코지모는 지상에서 딱 몇 미터 떨어진 ‘나무 위’라는 자기만의 선을 지키며 존엄을 유지했다.
선을 지킨다는 것이 꼭 외면은 아니다.
그것은 나를 지키면서도 타인과 가장 건강하게 만날 수 있는 ‘최적의 거리’를 찾는 일이다.
검도에서 상대와 너무 가까우면 칼을 휘두를 수 없고, 너무 멀면 닿지 않는 ‘간합(間合)’의 이치와 같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에게는 지상의 혼탁함으로부터 지켜줄 당신만의 ‘나무’가 있는가?
(나는 너무 가까이 가서, 나를 잃어본 후에야 적정 거리를 알게되었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최소한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가?
비록 발은 나무 위에 있었으나 코지모의 눈은 누구보다 땅을 향했다.
나 역시 나만의 선을 지키며, 이 세상을 더욱 아껴주고 싶다.
땅 위로 내려오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뜨겁게 사랑하고 공존 할 수 있다.
오히려 적당하고 건강한 거리가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든다고 굳게 믿는다.
다음 글에서는 또 다른 고전(그리스인 조르바)이 던진
질문들을 따라 가보려 한다.
고전은 과거에 멈춘 기록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의 거울입니다.
정은세 작가와 함께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삶의 무늬를 정돈하는 깊은 사유의 여정을 이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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