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범죄자 중에는 글을 쓰는 모범수도 있다. 독방에 갇혀서 죽을 날을 세면서 글을 쓰는 범죄자.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말도 별로 하지 않고, 밥도 주는 대로 먹고, 글이나 끄적이는 범죄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일 것이다. 글을 쓰는 여기가 감옥이라면. 감옥도 갇혀있는 사람에겐 또 하나의 세상일 테니까. 세상 속의 세상. 마치 새장 같은 세상.
일상은 지루하게 반복된다. 나는 안온한 현실 속에서 모범수처럼 살아왔다. 그렇다. 나는 모범수였다. 범죄의 징후는 읽히지만, 행동은 하지 않는, 위험해 보이지만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 튀지만 튀는 행동은 안 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위험한 모범수. 어제의 일을 오늘 일어난 일처럼, 어제의 일기를 오늘 생생하게 쓸 수 있는 정도의 필력을 가진 모범수다. 그날의 일도 오늘 일어난 일처럼 쓸 수 있다. 익숙한 일이다. 쓴다는 것.
그날은 여름의 막바지였다.
“어, 연희 왔다. 여기야! 연희야.”
경인의 말에 술자리에 앉은 인파가 일제히 숙연해졌다. 이윽고 시선이 내게 쏠린다. 그리고 수군덕거린다. 내가 올 줄 몰랐겠지. 이들을 다시 만나는 건 세 달만이다. 초여름까지도 부단히 피해 다녔던 사람들. 집에 거의 갇혀있다시피 했다. 바깥에서는 일로 피신했다. 벗어나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구하고 되는 대로 일을 했다. 그와의 추억은 그냥 희미한 잔상만 남았다. 나는 그를 모른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알지 못한다. 글의 어떤 편린, 편린 속에서도 그저 느낌으로 그 사람에 대해 유추할 뿐이었다. 숨은그림찾기처럼.
애달픈 감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나고 보니 추억이 되었더라는, 아련한 첫사랑 따위의 느낌도 아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어떤 연쇄적인 흔적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그건 차라리 괴로움이었다. 누군가 나와 그와의 관계를 물으면, “저는 그분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었습니다.”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 밖에 나와 그의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안타깝게도.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다행인 것이 맞다. 그 사람, 그분, 그 인간, 그놈.
여기서 ‘그’는 어느 교수를 말한다. 아, 교수가 아니라 강사였구나. 이제 그 강사는 더 이상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강의를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시끌벅적한 술자리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자리에는 남자 후배와 경인 언니가 앉아 있었다. 구석 자리에 앉아서 옆에 앉은 남자 후배가 재빠르게 부어준 동동주를 마셨다. 빨리 취하기나 해야지. 물론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만. 실수하면 안 되니까. 술자리 저편에서 여기저기 그 사람 이야기뿐이다. 그마저도 이젠 새로울 것이 없다. 지겹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하나다. 흔적 말살. 정말 이제 끊어내 버리기 위해서. 사라져버려. 사라져. 사라지라고.
“그래서, 언니. 뭘 이야기하려고 불러낸 거야?”
굳이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경인과 나는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다. 어딘지 노숙한 이미지의 경인은 내 기준으로 그다지 예쁘지 않았다. 공부머리는 좋았지만, 지적 센스가 없었다. 집이 잘 살았나. 아무튼 차 끌고 명품백 시즌마다 바꿔 들고 학교 다니는 그런 부류였다. 별로 질투도 안 났다. 그래서 신기했다. 이 오합지졸 무리에선 그나마 현실적이라 잘 살 것이다. 현실감각을 쌈 싸 먹은 인간들만 모여있는 곳이다. 나도 포함할까? 그건 아니지. 내가 그래도 이 사람들보다는 낫지. 확실하진 않지만. 아무튼, 경인은 괜히 그런 어쭙잖은 평가를 내린, 관심도 없던 인간이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아마 경쟁상대가 아니라고 느낀 걸까? 모르겠다. 그 인간의 카르텔 따위.
“놀라지 마. 연희야 있잖아… 현욱아, 넌 좀 조용히 하고…알았어? 나 사실 선생님이랑 사귀어.”
놀라울 일도 아니다. 어렴풋이 그런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언니라니?
“뭐? 선생님? 어떤 선생?”
알면서도 일부러 물어봤다. 지체할 시간이 내게 필요했다. 무얼 지체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경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S교수님!”
“뭐? 누나랑? 그 교수님? 이제 학교 안 나오는데?”
“그러니까…얼마 안 됐어.”
“엑! 이게 뭔 일? 누나랑 대체 몇 살 차이야?”
현욱은 옆에서 셈을 하고 있었다. 호들갑 좀 떨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옆에 앉은 후배 이름이 현욱이었지. 얘는 왜 나온 걸까. 가끔 자기 재능에 도취해서 글 보내주는 놈 아니었나? 아무튼, 이름도 가물가물했다. 그리고 역시나 이 언니는 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언제부터? 그리고 어떻게 둘이 연락하고 있었어?”
“일주일 전에. 아, 그러고 보니 그때 모임 왜 안 나왔어?”
이제 다 끝난 일이고, 이딴 모임이라면 사절이니까.
“그냥 바빴어, 요새….”
“그래? 아무튼, 일주일 전에, 그 너 오기로 했던 모임 전날에 문자 왔어. 모임 올 수 있냐고. 개인적으로 연락한 건 처음이라서 당황했지, 뭐. 그러다가 통화하고, 따로 만나서 밥 한번 먹고, 이야기 나누다 보니까 좋아지더라고. 그분 원래 좀 인기가 많은 타입이잖아?”
그래서 왕자병이지. 말기 환자 수준이지.
“잘생기긴 했지! 그래서 뭐 먹었는데?”
현욱이 끼어들었다.
“아, 그 밥집, 아니 술집인가? 횟집이었거든. 회 먹었어. 같이 술 마시는데 좀 취했을 때 우시는 거야. 그러면서 어릴 적 이야기하더라고. 어릴 때 집안사람들한테 외면당하고 외로운 소년이었다면서….”
나는 듣고만 있으면서도 뭔가 이상하게 화가 치밀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응? 소년이라고?”
“응. 그게 좀 치명적이잖아. 여자들한테…모성본능같이…. 다자이 오사무에 빙의한 건지 약간 그런 풍으로 말하더라고. 되게 보수적이고 딱딱한 집안 분위기인데 자기만 겉돌았다, 어쨌다나. 뭐가 뭔지 그 표정이랑 조명하며, 그땐 되게 멋지고 처량하고 안쓰러워 보였어.”
화는 계속 치밀었지만 웃긴 건 웃긴 것이었다.
“그분 평소에 쓰시는 글에도 자주 나오더라. 어릴 때 이야기 많이 우려먹는구나…. 그래서, 같이 술 먹고 뭐했어?”
“그게…. 그분 집으로 갔어. 나도 정신이 없어서….”
“아, 그래…. 그 다음 이야기 더 물어봐도 되는 거야?”
“상관없어. 그래서 그분 집에 가서 2차하면서 이야기 나누고 사귀게 되었어!”
“끝이야?”
“뭐….”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예상은 한 일이었지만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난 뭘 기대한 걸까. 그런데 언니는 왜 나한테 선언하듯이 자기 연애를 이야기 하는 걸까. 굳이 불러내서. 굳이? 직접 이야기할 만큼 우리가 친했나. 아무 뜻도 없을지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넘기기로 한다.
“아, 경인선배? 누나?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그때 현욱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교수님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아는 건 아닌데….”
“뭐야? 뜸 들이지 말고 말해.”
경인이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연애하는 사람의 설렘보다는 불안함이 느껴졌다. 언니가 생각하는 그게 아마 맞을 거야. 나는 말을 아꼈다.
“선영이 있잖아. 12학번. 걔한테 개강하고 바로 문자 보냈대.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고….”
“선영이?”
그럴만한 애다. 그럴 줄 알았지. 제일 앞에서 수업 들으면서 그렇게 칭찬받고 좋아하더니. 예쁘기도 예쁘고 재능도 있고 놀기도 잘 놀았다. 그럴만한 애다, 라고 짐작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서로 날 세우던 기억도 난다. 내 기준에서는 경쟁상대였나보다. 그랬겠지.
경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잠깐 침묵했다. 표정이 구겨졌다. 언니가 생각하던 그거 맞다니까.
“하…시발 어이가 없네. 그래서? 걔랑 사귀었대?”
“모르지. 아무튼 내가 아는 건…아는 것도 아닌가 봐! 그냥 나도 들은 거야. 걔 말고도 작년에 강의 들었던 수경이도…걔는 그런 마음 없었고, 남자친구도 있었는데 갑자기 그래서 아예 다른 강의로 바꿨대. 또….”
“또 있어?”
“어…이번 여름에 같이 여행 간 게 미영이었다나, 뭐라나.”
나는 그 순간에 왜 웃음이 터져 나왔는지 모르겠다.
“에너지가 넘치시네. 평소엔 그렇게 고독하고 쓸쓸해 보이시더니….”
“아, 뭐야. 그래도 다 과거형 아냐? 그렇겠지?”
내가 말했다.
“그럴 수도…. 그렇겠지. 뭐, 언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래, 누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좀 염사가 많았나 봐.”
현욱과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골몰하고 있는 경인을 바라보며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경인은 갑자기 번뜩 생각이 난 듯이 말을 이었다.
“그래, 맞아. 찜찜한 부분이 있었어. 그래서 너 부른 거야.”
“뭔데?”
“그놈, 아씨, 그냥 그놈이라고 할래. 그놈 집에 갔을 때 있잖아. 술 먹고 좀 그런 분위기로 갔거든? 근데 뭔가 계속 수상쩍은 거야. 하는 행동이 정말 익숙한 거지. 그 새벽에 음식배달도 무슨 주소도 안 불러 줬는데 금방 오고…. 느낌이 좀 쎄한 거야.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쪽으로 촉이 있어서….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들어갔어. 그리고 탐색을 시작했지….”
“뭐야, 언니. 갑자기 고딕이야….”
“아, 닥쳐봐. 어머, 미안, 조용히 해봐. 그래서 화장실을 이리저리 살펴보니까 수챗구멍에 머리카락이 한가득 있는 거야, 분명히 여자 머리카락이었어. 그리고 휴지통도….”
“교수님은 누나 안 나오니까 똥 싼다고 생각한 거 아냐?”
“개새끼야. 닥쳐봐. 아무튼 그 휴지통에 생리대가 있는 거야.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그건 누가 살고 있다는 거 아냐?”
“언니, 소름 돋았어. 무서워. 뭐야?”
“그래서 생각했지. 이게 언제적 것이었을까?”
경인은 잠깐이나마 자신의 추리를 설명하는 탐정같이 신나 보였다.
“언니 대단하다. 그걸 찾을 생각을 다 하고…그냥 나는 무섭다. 누가 갇혀 있는 거 아냐? 나 같으면 도망쳤을 건데.”
“나는 뭔가 디러운데….”
“그래서 어떻게 빠져나왔어?”
“아니, 또 술 드시고 우시길래 또 혹해서 이야기 들어주다가, 껴안고 같이 울어주다가 미안한데 오늘은 그냥 집에 가야겠다고 하고 나왔지. 별 탈은 없었어. 택시 타는 데까지 데려다 주더라고….”
다행이네. 다행인가? 우리는 오밤중에 귀신 이야기하는 사람들처럼 긴장되고도 우스운 분위기에서 대화했다.
“사실 언니 나도 물론 추측이지만 그분, 아니 그놈이 좀 여러 명한테 그러는 건 알고 있었어.”
“너한테는 안 그랬어?”
“그럴 것도 없잖아. 나는. 다 알려진 남자친구도 있고…. 물론 조금 착각할 때가 있었어. 원래 소설 쓰는 사람은 자의식이 강하잖아? 막 내가 좋아하는 단어나 주제, 이야기를 말씀드리면 똑같이 반복해서 이야기 하시기도 하고, 작품도 마치 내 이야기처럼 쓰시기도 하고…. 그런데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어?”
“푸핫. 누나, 키워드나 소재 겹치는 건 원래 그래. 서로 이용해 먹는 거지. 너무 의식하지마.”
“알아, 그런데도 자꾸 착각에 빠지게 돼서 그래서 반대로 퍼오려고 노력하고 있지. 괘씸해서…. 그런데 더 괘씸한 건 내가 문학에 눈 떠서 신나서 보낸 메일에는 답장 한번 없었다는 거야. 화나네. 내가 무슨 연애편지 쓴 것도 아니고 작품 봐달라고 몇 번을 보냈는데 수신확인 해놓고…. 뭐, 나는 여자로도 안 보였나 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화가 나네, 나도.”
경인은 턱을 괴고 손가락을 탁자에 소리 나지 않게 두드리고 있었다. 생각에 잠길 때 하는 버릇 같았다.
“언니, 어떻게 할 거야?”
“그냥 한 번 더 만나볼까? 아냐, 지금 물어볼까?”
나와 현욱은 동시에 말했다.
“안돼!”
“언니, 그냥 넘겨. 아니면 연락을 받지 말던가. 헤어지려면 깔끔하게 헤어진다고 하고 차단해버려.”
“그래, 누나. 어차피 이젠 우리 학교에 나오지도 않잖아. 차단해.”
경인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일내겠네. 일이야 날 것도 없지. 이젠 학교에도 나오지 않는걸. 알아서 잘 해결했으면. 이상하게 경인에게는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 그냥 혼자 무언가 마음속에서 무너지는 기분만 들었다. 단지 기분인 것. 오래 전부터 쌓아오던 성벽 같은 것. 사실 그냥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일지도 몰라. 모래성이 무너지는 건데도 잠깐 동안 분노의 감정에 시달렸다. 질투보다 분노였다. 왜 분노했을까? 법적으로는 그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 다 큰 성인의 일이고 사생활이기도 하고, 누군가 고통에 빠진다고 해도 그 또한 누군가의 선택일테니까. 그러니까 분노할 자격이 내겐 없을지도 모른다.
“언니, 내가 그럼 소설 써볼까? 사실 소설 써놓은 거 있는데 거기에 장면이나 상징을 더 입히는 거야. 혹시 모르잖아. 누가 그 집에 갇혀있는지도.”
“그래, 잘됐다. 너 소설가지. 우리우리 소설가. 아냐, 아냐, 쓰지 마. 괜히 자극하지 마.”
경인은 무척 혼란스러워 보였다. 미안하네.
“누가 보지도 않아. 내 소설. 그리고 어차피 소설인데 뭐. 소설은 소설일 뿐이야. 현실이 아니라고.”
“그냥 쓰지 마. 어떡하지? 나 지금 당장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은데.”
경인은 우리에게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과거가 아닌 현재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다는 확신. 언니, 그러지 마. 그 사람은 늘 진심일지도 몰라. 매 순간이 진심일지도 몰라. 아니면 매 순간 진심이 아니거나. 무엇이 잘못된 걸까. 잘못된 건 없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사람의 글을 보고 최근 다짐하던 것은 있다. 나는 소년도, 소녀도 아니라는 것. 이제는 어른이라는 것. 그래, 어른으로 살자. 어른으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철 막차가 올 때까지 경인은 계속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양쪽으로 갈라진 전철 플랫폼에서 헤어졌다. 현욱과 나는 같은 방향의 전철을 탔다.
“근데, 누나”
“왜?”
“경인 누나는…잤을까?”
“모르지. 왜, 잤을까 봐?”
“그래도 할 수 없는 거지. 그치?”
“그렇지. 지금 당장 달려가서 확인받고 껴안고 어쩌고 계속 사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지. 그건 그렇고 내가 너무 순진한 건지…글 쓰는 남자들은 다 그런가? 다 왕자병이야?”
“어느 분야나 성공하면 자만하게 되겠고…남자들 중에 그런 사람도 있나보지. 아, 그러고 보니 K교수 알지? 그 교수님이랑 같이 사는 애가 15학번이래. 신입생.”
“뭐? 그 교수님 결혼 안 했어?”
“응, 걔가 그 교수님이랑 동거하면서 습작하나 봐.”
“흠. 내가 알기로 그분 50대 중반이라고 알고 있는데.”
현욱은 손으로 되지도 않는 셈을 하고 있었다.
“그렇네. 그리고 이상한 주사까지 맞았나 봐.”
“뭔 주사?”
“피임주사?”
“뭐야, 왜 당연한 건데 피임하는 게 무섭지?”
너무 어려. 아냐. 성인이면 어린 것도 아닐 텐데. 그래도 너무 어리다.
“어쩔 수 없겠지. 뭐. 역사적으로 나이 차 많이 나는 커플 많잖아? 예술가나 연예인…에…누가 있더라.”
현욱은 또 손가락만 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영조?”
현욱은 크게 웃었다.
“푸핫. 무슨 영조야? 누나도 참.”
“아니, 나도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영조밖에 안 떠오른다.”
“웃기지 좀 말라고.”
“됐고, 아니 안 됐다. 걔, 그 피임 주사 맞는 애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걸까?”
“그렇겠지 뭐.”
“정말 모르겠네. 성인은 성인이니까. 근데 너무 어려. 대체 사랑이란 걸 알기에 몇 살이 적령기일까?”
“사랑타령은.”
“K교수는 의외다. 좀 실망스럽기도 하고…말발 좋은 글쟁이니까 인기 많을 것 같은데….왜 그 나이 되도록 결혼을 안 했을까? S도 그렇고. 비혼인가?”
그러고 보면 문학 하는 사람은 결혼을 안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저 사회 현상인가. 예술가라서일까.
“경제적인 부분도 무시 못 하겠지. 어쨌든 처자식이 있으면 먹여 살려야 하잖아. 글 쓰면서 그렇게 하기 힘들지.”
“너도 나중에는 힘들 예정?”
“지금은 안 힘들어. 아직 젊고, 뭐 과외도 하고 있고.”
“승자네. 과외도 하고.”
“누나는 뭐해? 지금 일하지 않아?”
“난 알바지. 무슨 이상한 속셈학원에서 초딩 가르쳐.”
“무슨 과목?”
“전과목”
“아 웃겨. 누나 수포아냐?”
“응. 초딩 수학도 예습해서 가르쳐줘.”
현욱이 나를 느끼하게 바라보았다.
“나중에 누나가 나 먹여 살려줘. 내가 매일 시 써줄게.”
“꺼져. 시는 나도 쓰거든? 내 돈은 내꺼야. 남친돈도 내꺼야.”
“웃기지 좀 말라고.”
“진심이거든?”
현욱은 정거장표를 보면서 손가락을 접고 있었다. 세 정거장 남았네. 빨리 내려라. 귀찮았다.
“근데, 누나.”
“왜.”
“누나는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나는 현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현욱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없었어.”
적어도 너랑 그들에게 말할 건 아무것도 없어.
현욱은 안심한 듯이 세 정거장 뒤에 내렸다. 내리는 걸 보지도 않았다. 집에가면 또 잘 갔느냐고 문자 오겠지. 다시는 그딴 모임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와 나 사이엔 정말 아무것도 없다. 말할 것도 없다. 답신 없는 편지, 그저 이메일 몇 통, 어떤 날의 날씨와 어떤 공간의 분위기, 주위의 소음, 침묵과 침묵, 스침, 작은 기다림, 함께 쓰고, 그린 종이, 억지로 짓는 웃음, 그 때문에 흔들렸던 순간, 가끔 내가 했던 말의 반복, 형태를 가늠할 수 없는, 동그랗고 네모나고 세모난 것이 한데 합쳐져 있는 것 같은, 뻥 뚫려 있다가도 금세 잊힐 것 같은, 뭉뚱그려진 추억 같은 것. 이제는 추억도 못되는 흔적. 말살하긴 어려울 거야.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나만 알고 있는 것. 단지 그뿐인 것.
세 달 전, 기말고사의 답안지를 적고 나는 그 강의실에서 제일 늦게 나갔다. 답안지 뒤에는 시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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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일주일을 버티는 법>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사막에서 일주일을 버티는 법
첫날, 별의 방향을 살필 것
둘째 날, 별을 따라 걸을 것
셋째 날, 별을 보고 잘 것
넷째 날, 별이 떠 있는 곳을 잊지 않을 것
다섯째 날, 별도 흐른다는 걸 알 것
여섯째 날, 별에 구원을 기대하지 말 것
일곱째 날, 별이 되기를 꿈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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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내게 준 성적은 A0였다. 답안지의 뒷면을 보았을까? 알 수 없다. 그 이후로 나는 S를 만나지 못했다. 유일하게 남은 객관적인 흔적은 A0라는 성적이었다. 1등 장학금은 멀어졌다. 상관없었다. 이제는 정말 상관이 없었다. 그들을 만난 다음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최후의 날까지 일기를 쓰셨다. 최후에 쓴 글은 단 한 줄이었다.
빗나가버렸네.
무슨 의미일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와,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전화번호 목록에서 지웠다. 번호를 지울 때 전철 창가에서 내가 뿌옇게 가라앉고 있었다. 전철은 밤을 달리고 있었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철교 위로, 전철이 시커먼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렇게 썼던, 여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