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손바닥을 먹고 싶어

나는 학창 시절 조금 이상한 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에서 모든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핸드폰이나 기타 전자기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공부에 전념하라는 창립자 선생의 좋은 뜻 때문이었겠지요. 덕분에 뜻하지 않게 요 몇 년 유행했던 디지털 디톡스를 조금 일찍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생활에도 나름대로 애로사항이 하나 있었는데요, 핸드폰이 없으니 우리 일상을 사진이나 동영상로 남길 수 없고, 오로지 기억에 넣어놓고 꺼내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자리를 가질 때마다 새삼 인간의 기억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느끼곤 합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각자 다르게 기억하니 정확한 사실관계에 대해 아직도 갑론을박하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나는 이 하찮은 기억력을 가지고 복잡다기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지난 주 부모님과의 통화에서 들었던 걱정 어린 당부가, 어제 팀 회의에서 나온 안건이, 아까 먹은 점심 메뉴가 기억나질 않습니다. 그만큼 기억은 불완전하고 퇴색되기 쉬운 도구라서 그런 걸까요.


기쁨이는 이를 되려 축복받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좋았던 싶은 기억은 남기고, 그러지 않은 기억은 애쓰지 않아도 놓아줄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요. 그런데 나는 좋았던 기억들마저도 하나둘씩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그와 짧지만 즐거웠던 시간들을 마무리하고 인사하는 순간에, 우리는 치매가 와도 함께 했던 시간들 기억할 것이라며 웃었습니다. 러나 돌아가는 길 내내 기쁨이와 나눴던 대화들, 기억나는 말들을 놓치지 않으려 한 문장씩 써내려가도 몇몇은 끝내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다만 오감을 통한 기억들은 상대적으로 오래 잡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기쁨이가 그랬거든요. 시각보다 청각이, 청각보다 촉각이 오래가는 기억을 만든다고요. 나는 그의 깊고 맑은 호수 같은 눈망울을, 서늘한 유리잔에 서려 있는 이슬 같은 목소리를, 내 한 몸 편히 뉘일 수 있는 포근한 이불 같은 손바닥 감촉이 오래도록 남아있길 바라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나도 모르게 흘려보내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엄습하네요.


몇 년 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참으로 기괴한 제목을 가진 일본 멜로 영화를 보았습니다. 극 중에는 사쿠라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하루키에게 이상한 부탁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췌장을 먹어줘. 누가 날 먹으면 난 그 사람 안에서 살 수 있대" 생이 저무는 걸 바라보는 입장에서 자신 없는 세상을 살아갈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애절하고 숭고한 문입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이에 하루키는 기꺼이 그 안에 사쿠라가 살아 숨쉬기를, 그리하여 생의 남은 이야기를 풀어가게 하리라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기쁨이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가 나의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 그와 나눴던 대화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그날 강렬하고 설렜던 손잡음 그리고 그 손바닥의 감촉은 내 안에 남아있길 바랍니다. 그래서 나도 하루키가 되어 고백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는 기쁨이의 손바닥을 먹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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