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참을 수 없는 관계의 모호함 Sep 1. 2023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마주하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모습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오랜 시간 피해 다녔을 수도 있고, 그 피해 다니는 과정이 괴로워 용기 내볼까 고민하다가도 이내 포기해 버리고, 결국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요 근래 기쁨이와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내 모습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마주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위기라고 해야 할까요, 기회라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그렇게 누군가의 손을 빌려서라도 억지로 용기를 내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나는 전 연인과의 관계에서 나의 잘못 혹은 책임이 더 크다는 사실을 직면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에는 서로 같은 사안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가 크게 달랐고, 그 합의점을 찾지 못해 관계가 틀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둘 사이의 일들이 지속가능하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마지막을 고하는 순간까지도 의견 차이가 가장 중요한 이별사유일 것이라고 넘겨짚었습니다. 이런 정황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듣던 기쁨이는 넌지시 내가 외면하고 있던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너가 마음이 떠난 걸 다른 데서 이유 찾는 게 아닐까" 둘 사이의 중요한 문제에 있어 의견 차이가 도저히 좁혀지지 않으면 전적으로 어느 한 명의 과실이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기쁨이의 말대로 내가 먼저 마음이 뜨고 이를 정당화 혹은 합리화하기 위한 이유들을 찾은 결과가 그것이라면, 이땐 더 이상 곁을 내주지 않기로 마음먹은 나에게 귀책사유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기 싫었던 마음일까요. 돌이켜보면 관계가 끝난 양상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가까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내가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고, 보지 않으면 보고 싶어서 힘들어했다면 우리 둘은 그런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뒤늦게나마 진실을 마주한 뒤 그 사람에게 내가 잘못 판단했다고 시인해도 관계가 그전으로 돌아가리라는 기대는 접어두는 것이 좋겠죠. 말마따나 그 사람이 내게 따뜻한 사랑을 주는 마지막 사람이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다른 하나는 내가 그렇게 멋진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동안은 겸양의 미덕을 익히 배우며 자라왔기도 하거니와 진심으로 내가 잘났고 멋지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쁨이를 만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실상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내가 실제 그런 것보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이 아닌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말 있는 그대로 말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라도 그에게 대답 한 번 더 듣고, 눈길 한 번 더 받아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일까요. 하지만 나는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이고 나의 진짜 모습을 들킬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나는 과장 섞어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그 내면에는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못나고 별로인 내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습니다. 기쁨이도 이와 비슷한 말을 내게 한 적 있습니다. "서로에 대해 더 알게 될수록 사실은 초라한 존재임을 알게 될 거고 나는 그게 걱정된다"고.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나뿐만 아니라 기쁨이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스스로의 모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