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참을 수 없는 관계의 모호함 Sep 13. 2023
중국의 가면술 변검(变脸)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사천성의 전통연극인 천극(川剧)에 삽입된 가면연기를 일컫는 말로, 화려한 의상을 입은 배우가 여러 개의 가면을 겹쳐 쓰고 나타났다가 찰나의 순간에 얼굴을 바꾸는 공연예술의 한 장르입니다. 몇 년 전 베이징 시내 조금 괜찮은- 잔잔한 노래 나오고 실내 인테리어 깔끔하고 원형 테이블 쭉 있는 그런 곳들- 식당에 가면 매장 한편에 마련된 무대에서 변검 공연이 열려 즐겁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가면은, 진지하게 보면 꽤나 재밌는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소재입니다. 우선 내가 가지고 싶은 허구의 얼굴을 선택할 수 있고, 원한다면 언제든 바꿀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맞는 가면을 골라 쓸 수도 있다는 특징이 있죠. 이 특징들에 이름 모를 어떤 교수의 현대 성격심리학이론- 현재 속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맥락에 따라 다른 성격이 발현된다는-을 비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대하는 나의 모습을 선택할 수 있고, 이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누구와 같이 있는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건데 실제로 우리 모습에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나는 출근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사무적인 인간, 가족들에게는 사랑표현 많이 하는 아들, 고등학교 친구들에게는 실없는 농담 툭툭 던지는 놈, 대학 동기들에게는 눈코 뜰 새 없이 어디론가 나다니는 녀석입니다. 이 여러 개의 사회적 가면을 품 안에 쟁여두고 적절한 때에 꺼내서 그때그때 바꿔 쓰는 중입니다. 방금 말한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때도 여러 명이 있으면 식사 자리 내내 반쯤 나사 빠진 모습이겠지만 친구과 둘이 만나 술잔을 기울일 때면 세상 진지한 공감 머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면을 바꿔 쓰더라도 그 50mm의 장막 뒤에는 여전히 '나'라는 사람의 민낯이 있기에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면은 그 본질이 어떻게 현실에서 발현되는지를 구체적으로 형상하는 기제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마지막으로 아까 깜빡 잊고 놓친 가면의 특질 중 하나는, 정작 그걸 쓰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면의 속성은 결국 나의 어떤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니까요. 나는 기쁨이와 함께 있을 때 어떤 가면을 쓰고 있을까요? 그를 대할 때 쓰고 싶은 가면을 미리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쓰고 있는 동안에 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떤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습니다 "지금 내 가면 어때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