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참을 수 없는 관계의 모호함 Sep 29. 2023
오랜만에 귀성하는 길, 기억 속 켜켜이 먼지 쌓여 가던 영화를 다시금 꺼내 틀었습니다. 왕가위 감독 예술세계의 정수, <화양연화>입니다. '스쳐가는 순간들로 사랑의 시간을 인수분해'한다는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모든 장면, 눈길, 손짓, 걸음걸이가 두 사람의 위태롭고 아름다운 감정을 빚어내는 듯했습니다. 한 사람 간신히 지나갈 법한 계단에서의 조우 때마다 흘러나오는 묵직한 첼로음과 우스갯소리로 청소년관람불가 지정해야 한다는 양조위의 깊은 눈빛은 시간이 지나도 명불허전 일품.
극 중 소위 '킬포'라고 일컬을 만한 장면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만 오늘은 차우와 리첸이 마지막 순간을 연습하는 장면에서 가장 여운이 남았습니다. 얼마 전 <SNL 코리아: 진서연 편>에서 패러디되기도 했던 그 장면입니다. 마지막을 생각하며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누군가는 끝이 있기에 그 과정이 더 애절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게 아니냐며 역정을 낼 수도 있습니다. 학창 시절 없이는 못 살던 친구들도 졸업하고 시간이 지나면 각자의 일상을 살아내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같이 있는 시간들이 더욱 소중한 거 아니냐면서요. 혹은 처음 발령받은 부서에서 둘도 없이 가까운 동료로 지내다 멀어지게 되더라도 그렇기에 함께 하는 순간들을 더 즐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겠네요. 그런데 천태만상 우리 인간관계가 단 하나의 공리로써 설명될 수 있을까요.
중학교 과학시간에 '모스 굳기계'라고 들어보셨나요? 19세기 독일의 한 과학자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물의 단단한 정도를 상대적으로 순위 매긴 체계입니다. 무른 돌로 딱딱한 돌을 그으면 생채기도 안 나겠지만, 다이아몬드로 다른 돌을 긁으면 그 길을 따라 깊게 파인 자국이 생기게 되죠. 마음에도 굳기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워하고 애틋해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클수록 굳기계에서 무른 돌로 볼 수 있겠지요. 나보다 더 무른 돌을 만나면 그 마음에 깊게 파인 자국을 남기게 될 거고, 덜 무른 돌을 만나면 작은 생채기만 낸 채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화양연화> 이별연습 장면을 보며 나도 기쁨이와의 마지막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은 한동안 접어두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다 보니 또 그렇게 되더군요.
그렇다면 그와 나는, 혹은 우리는 돌아설 때 어떤 모습일까. 기쁨이는 花樣年華 인생의 꽃 같은 시간에 조우한 사람 만남 인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리울 사람이자 마지막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인연입니다. 그때의 내 돌에는 작은 생채기가 날까요, 깊은 골이 생길까요. 그 순간이 오고 있기에 지금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생각은 잠시 넣어두겠습니다. 끝이 있기에 역설적으로 현재가 더 즐거울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