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코가 석자라고

오래 알고 지내던 친구의 카페에 놀러 갔습니다. 만난 지 5년이 다 되어가는 친한 친구인데 개업 소식을 듣고도 일상에 치여 산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몇 달이 지나서야 가봤네요. 마지막으로 얼굴 본 지도 오래됐음에도 그 친구를 포함한 우리 일당들이 있는 SNS 단체 대화방에서 종종 근황을 알리는 대화가 올라왔기에 그리 어색하진 않았습니다. 지난번에 모였을 때는 다들 졸업을 앞두고 있거나 갓 졸업한 상황이어서 그런지 대화 주제가 취직, 사업, 대학원, 유학 등이었다가 이번엔 다들 자리 잡고 숨 좀 돌렸다고 연애, 결혼, 출산 얘기를 슬슬 꺼내더군요.


카페 사장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설레게 하는 사람을 만났다며 상기된 얼굴로 그와 함께 있을 때 몸과 마음에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 구구절절 늘어놨습니다. 전에는 연애를 해도 재미없다며 금방 혼자로 돌아가더니 이번에는 제법 진득하게 만나고 있는 모양이네요. 그런데 역시 연인관계는 무척 깊고 배타적인 관계여서 필연적으로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전날에도 크게 싸워 밤새 울다 와 눈이 퉁퉁 부었다며 우리에게 연인과의 대화를 말해줄 테니 제삼자 입장에서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해 달라고 했습니다. (변화구 뭐야ㅋㅋ) 그들 사이에 세차게 오간 말들을 갈무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만하자"

- "알겠어 미안해 잘 살아"

"알겠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나 보네"

- "그러고 싶지 않은데 너가 그런 말을 하니 마음이 너무 아파서 잡을 수 없어"

"관계를 위한 노력을 보여주려면 다시 생각해보라고 잡아야 하는 건 아닌가"

- "너를 많이 생각하기에 그만하자는 너의 말에 더 잡을 수가 없는 거야"


이런 대화가 두 시간 동안 꼬리를 물고 반복됐습니다. 나를 보며 남자 입장에서 자기 연인이 하는 말들의 행간을 짚어달라기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습니다. 저런 말들이 나오기까지의 정황을 쭉 들어보니 친구와 그의 연인의 생각 모두 이해됐기 때문입니다. 으레 꺼낼 법한 원론적인 말들을 넌지시 던져봤지만 친구 표정을 보니 영 신통지 않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어떡해 나도 둘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는걸. 사족으로 한 가지 당부를 남기긴 했습니다. 상기한 모든 얘기들에도 불구하고 마음 끌리는 대로 하면 기분이 좋으니 그대로 해보라고.


기쁨이가 화났습니다. 간신히 비루한 변을 꺼내보았습니다만 상관없는 얘기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굳이 시간 내고 얼굴을 볼 유인이나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면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체는 큰 고려사항이 아니긴 합니다. 언제까지고 즐겁게 마주할 거라고 낙관만 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이런 순간을 겪어보니 울적합니다. 슬슬 마음이 멀어지려던 차에 이번 일이 기화가 된 건지, 작은 기대까진 아니지만 혹시나 하고 있었는데 실망한 건지, 화가 났고 있는 그대로 얘기했을 뿐인지 이런저런 생각이 듭니다. 가장 중요한 건 화난 마음을 달래고 내치지 말아 달라 하는 건데 내 코가 석자네요. 애먼 데 가서 친구 연인 이야기나 들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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