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 곧 인생
인생이 예상치 흘러가지 않을 때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몇 시간, 심지어 몇 분 안 되는 행복을 좇기 위해 사는 삶이 보통 사람의 인생. 그렇다고 허무주의로 갈 필요도, 성공을 위해 경주마처럼 달리며 살아갈 필요도 없다. 그저 주어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이따금 주어지는 빛나는 순간을 온전히 누리는 마음가짐. 우리에게는 그 태도가 필요하다.
빛나는 순간이 멋들어지거나 거창할 필요는 없다. 닭발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이에겐 침부터 고이게 만드는 단어, 또 어떤 이에겐 생각만으로도 징그러워서 닭발 먹는 이들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게 만드는 단어. 그러나 닭발을 인생의 빛나는 전환점으로 삼은 이가 있다. 보통 때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닭발이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움츠려 있던 한 사람 인생을 바꿨다.
빛나는 순간은 닭발이 될 수도 있다
닭발을 떠올리면 침부터 고이는 한 사람으로서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이름도 지랄 같이 맛있다 하여 지랄닭발이란다. 지랄 같이 맛있는 레시피가 무엇일까. 비법을 캐내기 위해 지랄닭발 본점 김포로 달려가 닭발 장사꾼 유현덕 대표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유현덕(이하 유) : 반갑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유 : 저는 김포에서 지랄닭발이라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올해 마흔 살 유현덕이라고 합니다.
‘지랄닭발’ 가게 이름이 평범하지 않아요. 유머러스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데 어떤 의미로 가게 이름을 지었나요?
유 : 요즘 경기가 많이 어려워서 프랜차이즈 창업을 많이 하잖아요. 저는 프랜차이즈를 목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에요. 기존에 이미 유명한 가게들이 많은 상태에서 사람들이 들었을 때 쉽게 잊히지 않는, 웃을 수 있는 상호를 정하자고 시작했죠. 매운 닭발을 맛봤을 때 사람들이 ‘지랄 같이 맛있다’라며 먹어줬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지었어요. 사람들이 ‘오늘 뭐 먹지?’ 고민할 때 순간적으로 떠오를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에게도 반응이 좋았어요.
사업자 등록이 어려웠을 것 같아요.
유 : 처음에는 애로사항이 있었어요. 음식점 창업을 처음 하다 보니 도와주시는 분도 없는 상태라 외식업 지부를 찾아갔더니 ‘지랄닭발’로 등록이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지라닭발’로 사업자를 냈어요. ‘지랄닭발’ 완성체가 안된 느낌이 들죠. 장사를 하면서도 내심 찝찝했었는데, 기대 없이 세무사 사무소를 찾아가서 물어보니 쿨하게 가능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초기 1년 정도는 사업자를 ‘지라닭발’로 운영하다가 1년 후부터는 ‘지랄닭발’로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닭발 가게를 창업한 계기도 궁금합니다.
유 : 사실 저는 닭발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사업을 하기 전까지는 닭발을 먹어본 적도 없고. 제 아내와 어머님이 닭발을 즐겨드셨죠. 막연하게 음식점을 운영하겠다는 계획보다는 당장 먹고사는 것이 중요했어요. 치킨집, 족발집, 피자집 등 가게들이 엄청 많은데 같은 아이템으로 그들과 경쟁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고,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 장기적으로 팔 수 있는 아이템을 찾고 있었어요. 당시 아내가 ‘닭발은 어때?’라고 했죠. 저는 닭발을 먹어본 적도 없는 상태였는데. 그래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한 번 먹어보자’ 결심하고 만들어봤죠. 어릴 때부터 요리도 좋아했거든요. 가끔씩 TV 보다가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나오면 ‘만들어 먹어 볼까’하고서 직접 만들어 보기도 하고.
유명한 닭발집을 찾아가서 직접 먹어봤어요. 맛을 보면서 ‘이런 부분은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찾아내기도 하고. 막연하게 제가 처음부터 만들기 시작한 것은 아니고 배우기도 많이 배웠어요. 여러 도움을 얻어서 장사를 시작했어요.
닭발로 사업 아이템을 정한 후 실제 메뉴를 개발 하기까지 구체적인 과정이 궁금합니다.
유 : 제가 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 금전적인 여유가 거의 없었어요. 가게를 차린다는 개념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지랄닭발을 처음 시작할 때 25만 원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여유도 없었어요. 시장에서 닭발을 파시는 분에게 무작정 찾아가서 부탁했어요. ‘저희 사정이 이러이러한데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흔쾌히 승낙해주신 덕분에 지금의 지랄닭발이 있는 거예요. 초기에 많이 도와주셨죠. 음식점 창업을 할 때 요리 레시피를 알려주는 분들이 또 있어요. 그분들을 수소문해서 조금씩 벌이가 생기는대로 배우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의 메뉴는 그렇게 완성된 것은 아니에요. 배운 것들을 기반으로 제가 계속해서 연구하고 개발해서 만들었습니다.
살펴보니 김포, 일산, 인천 등 경기도 권역에서 입소문이 많이 났어요. 특별한 홍보 전략이 있었나요?
유 : 홍보전략은 따로 없었어요. 체인점을 내려고 대외적으로 홍보한 적은 없었어요. 김포라는 지역 사회가 강한 곳에 들어와서 가게를 내기까지 사실 운도 많이 따랐어요. 주변 분들도 많이 도와주셨고. 첫 체인점은 손님에게서 시작했어요. 닭발을 드신 손님께서 지랄닭발을 좋은 이미지로 기억해주시고 연락을 주셨어요. 저희가 체인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보니 연이 닿지 않은 분들도 계시죠. 우연찮은 계기로 체인 1호점이 나왔고 그 이후 2호점, 3호점 거쳐서 지금은 12호점까지 나왔습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체인점이 늘어났어요. 홍보를 통해 하나씩 더 늘리고 싶어서 하지는 않았어요.
어렸을 적으로 돌아가 볼게요. 인생에서 가장 처음 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유 : 17살에 패스트푸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서울 영등포에 있는 대형 백화점 지하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이었어요. 여름방학에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했으니 만 2년 반 정도 했죠. 일로 시작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저희 집이 어렸을 때부터 부유하지 않았지만 제가 장남이다 보니 부모님께서 많이 챙겨주시려고 하셨어요.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용돈이 부족해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기보다 제가 집안에 짐이 되기 싫었어요. ‘내가 내 용돈은 벌어야지’라는 마음가짐이었어요.
제 성격이 내성적이었어요. 고등학교가 남녀공학이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개학해서 여름방학 때까지 여학생들의 얼굴을 몰랐어요. 버스를 같이 탔는데 먼저 아는 척해서 ‘누구지?’했는데 같은 반이라고 하더라고요. 성격 자체가 사회생활하기에는 좋지 않은 성격이라 제 자신에게 불만을 가졌었죠. 아르바이트도 제가 먼저 한 것은 아니었고 친구가 ‘아르바이트 같이 할래? 네가 하면 나도 할게’라고 해서 아르바이트하면 성격도 고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했어요.
실제로 성격에 변화가 있었나요?
유 : 네. 성격도 많이 바뀌었죠.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도 대인관계가 형성되고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과도 소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저도 모르는 새 제가 먼저 다가가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성격이라는 게 태어나면서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소심하고 내성적인 면이 남아있어요.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바뀌었죠.
어릴 적 꿈이 무엇이었나요?
유 : 아 꿈이요. 어릴 때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목소리도 지금 목소리가 어릴 때 목소리라서. 말투나 행동뿐 아니라 성격도 그랬어요. 같은 또래 친구들이 과학자,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할 때도 현실성 있는 꿈을 꿨어요. 막연하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돈 때문에 힘들고 싸운 적은 없어요. 부모님께서 저와 여동생에게 잘 해주시고. 그럼에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술자가 되고 싶었어요.
공부를 엄청 잘 하지는 않았고 중상위권 정도 무난한 학생이었죠. 어릴 때부터 깨우침이 빨랐는지 제 머리로 공부를 잘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술을 배워 산업 전선에 일찍 뛰어들고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재미도 있고 집안에 보탬도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래서 꿈이라고 하면 전문직 종사자.
실제로도 대학교 진학을 안 하셨어요.
유 : 네. 대학교 진학을 준비하는 시절에 어머님이 많이 편찮으셔서 대학교 합격을 못한 것은 아닌데 진학을 포기했어요. 집에서는 제가 장남이니까 대학에 보내주고 싶어 하셨는데 저도 심적 부담을 많이 느꼈어요. 지금은 완치가 됐지만 어머니가 암 투병 중이셨거든요. 사춘기 방황 시절도 아니었고 공부를 하기보다 돈을 벌어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학 진학은 포기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바로 직장에 들어갔어요.
철이 일찍 들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유 : 철 아닌 철이 들었죠. 정작 철들어야 하는 부분은 그렇지 않고(웃음).
바로 직장에 들어가셨다고 말씀하셨어요. 공식적인 첫 직장생활은 어땠나요?
유 : 대기업은 아니지만 중견기업 본사로 입사를 했어요. 복사기 제조 회사였어요. 첫 월급은 30만 원을 받았어요. 수습 기간이어서 정말 교통비 정도만 받은 거죠. 굉장히 즐거웠어요. 첫 직장이다 보니 ‘기술 직종 종사자로 첫발을 내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설렘과 걱정이 함께 있었어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바로 직장으로 들어온 사람들만 있다 보니까 돈을 받으면서 학교 다니는 느낌이 났어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같은 또래 50명 정도의 친구들이 함께 수업을 들었어요. 물론 현장에 바로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에 실무적인 내용이죠. 3개월 동안 전혀 모르는 친구들과 모여서 전혀 모르던 분야의 내용을 수업으로 듣는다는 것이 재밌더라고요.
입사했을 때는 직무 분야가 정해지지 않았어요. 대학으로 치면 자율전공 같은. 이후 기술직, 영업직, 제조 등 원하는 분야를 정해서 일하는 시스템이었어요.
몇 년간 근무했나요?
유 : 근무 기간은 길지 않았어요. 본사에 취직해서 교육을 받고 파견 근무를 나갔어요. 본사에 있기보다 현장에서 뛰고 싶었거든요. 본사는 지루해요(웃음). 현장에 나가서 직접적으로 사람들과 부딪혀도 보고 싶었어요. 근무 기간이 짧았던 것은 사고 때문이에요.
파견 근무 나가는 지역을 선택할 수 있었어요. 제 차례가 왔을 때 선택지가 김포와 안양이었어요. 당시 저희 집이 김포와 가까운 서울이었지만 막연하게 김포는 시골 같아서 사람들과 활기찬 일을 하려면 안양이 낫겠다는 판단으로 안양을 선택했죠. 그런데 동기 중 한 명 집이 안양이에요. 제가 안양을 선택하면 이 친구는 김포까지 와야 하는 거죠. 그 친구 출퇴근 시간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선배에게 그 동기와 근무처를 바꿔줄 수 있냐고 물었죠. 내가 김포를 갈 테니 그 동기를 안양으로 보내달라고.
그렇게 지내다가 4개월 후에 사고가 났어요. 그 친구가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바로 죽었어요. 어쩌면 제가 당할 수 있었던 사고인데.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회사에서 고인(故人)인 그 친구를 대하는 불합리함을 보면서 억울함도 많이 느꼈고. 제가 다니던 직장에 대한 애착감이 박탈감이 되어 모든 것이 싫어지더라고요. 친구 장례를 마치고 한 달도 다니지 못한 것 같아요.
어떤 불합리함이었나요?
유 : 저는 직원이 회사의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군대에서도 군 장병이 근무를 하다가 다치게 되면 예우를 갖추잖아요. 그 친구도 몸 담고 있는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모습을 봤어요. 큰 회사다 보니 일개 직원들을 세세히 신경 쓰지 못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직장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없어졌어요. 배신감도 느꼈고요.
어린 나이에 친구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는 거도 흔치 않은 경험이지만 첫 직장에서 경험했기에 더 충격이 컸을 것 같습니다.
유 : 그때는 어린 나이여서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보다 그냥 울었던 것 같아요. 다른 생각은 들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그렇게 되니. 크리스마스였던 것 같아요.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연락을 받았어요. 믿기지 않았죠.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한동안은 무덤덤했던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할 만큼 성장한 나이도 아니었고 그저 사건 자체가 힘들었던 것 같아요.
충격과 상처를 언제쯤 회복했나요?
유 : 사실 충격이 오래갔던 것 같아요. 그 친구 첫 기일에는 저도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지는 못했어요. 다른 친구들을 통해 잘 다녀왔다는 이야기만 듣고. 그 사건 때문에 힘들어서 다른 직장생활을 못하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제가 막연하게 꿈꿔온 직장에 대한 기대감을 낮추게 됐죠. ‘냉정하구나’를 느꼈던 시절이었어요.
복사기 회사를 나오고 난 이후의 거취는 어떻게 정했나요?
유 : 바로 운이 좋게 통신 회사의 하청 업체에서 2년 정도 일하게 됐어요. 기술직으로 들어갔는데 지루하더라고요(웃음). 사내 다른 영업 사원들이 거래를 따오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어요. 결국 영업도 하게 됐죠. 운이 좋게도 첫 영업으로 모르는 회사 문을 두드렸는데 꽤 큰 건수가 됐어요. 만약 그 경험이 실패했다면 제가 영업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첫 시도가 성공하니 희열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들어가기 전에는 긴장이 돼서 담배를 반갑 정도 피고 들어갔던 것 같아요. ‘이것만 피고 들어가야지’ 했다가 담배 냄새가 나니까 ‘담배 냄새는 없애고 들어가야지’라면 또 망설이고. 그렇게 뜸을 들이다가 편의점 가서 양치를 한 후에 노크도 안 하고 무작정 들어갔어요. 잡상인 취급을 받았죠. 나이도 어린데. 스무 살 대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이 와서 명함을 내밀면서 이야기를 하니까.
그 회사의 경리과 차장님이었던 것 같아요. 선뜻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내용인지 한 번 들어보자’라고 하셔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을 다 했어요. ‘그런 내용이면 할 만하겠다’라고 하셔서 바로 계약을 했죠. 저희 회사에 돌아가서도 영웅 대접을 받았어요(웃음). 첫 계약을 따내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술과 영업을 병행하는 기술영업직 업무를 했습니다.
어릴 적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영업 업무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유 : 어휴 힘들었어요. 제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선배, 동기들이 밝고, 진취적인 성격을 가지고 일하는 것을 보면 비교가 되더라고요. 그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저를 보니 ‘나는 아직 소심하구나. 내성적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노력을 많이 했겠어요.
유 : 어휴 많이 했죠. 15층 빌딩을 옥상에서 시작해서 한 사무실도 안 빼놓고 영업을 했어요. 미리 약속을 잡고 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무실에서 잡상인 취급을 받아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바로 올라가서 또 담배를 펴요(웃음). 마음을 진정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15층부터 1층까지 모든 사무실의 벨을 누르거나 노크를 하고 들어가서 인사를 하죠. 바로 쫓겨난 경우도 있었고요. 쫓겨나지 않고 뭐라도 주고 싶어서 볼펜 같은 판촉물을 만들어가요. ‘판촉물 드리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누구세요?’라고 물어보면 그 찰나를 노려서 영업을 하고. 그런 영업 활동을 하면서 성격이 변했다기보다 자신감이 늘어났던 것 같아요. 망설여지는 시간도 줄고.
영업을 하면서 가장 크게 배운 점은 무엇인가요?
유 : 저는 어릴 적부터 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고정적인 월급을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만족도가 많이 떨어져요. 안정적인 부분은 있지만 일한 만큼 대우를 못 받는 느낌. 일한 만큼 대우해준다고 해도 재미가 없어라고요. 내가 나가서 계약을 따오면 인센티브가 주어지고 급여가 올라가는 것이 영업의 가장 큰 메리트였어요.
지랄 같이 맛있는 닭발 레시피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 본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허가를 받아 작성한 게시물이며 본 글의 저작권은 게시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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