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촌토성 인터뷰 13-2] 디자이너의 99% 향기

향이 코에 닿기까지

by 이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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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대학 생활은 잘 마쳤나요?

성 :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시작될 때쯤 한국 집에서 문제가 있었어요. 크게 보면 돈 문제였죠. 할아버지가 사업적으로 성공을 하셨어요. 제가 고등학생 때까지는 아버지가 지원을 해주셔서 캐나다 생활을 했는데 대학생 시절부터는 할아버지가 지원을 해주셨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식구들이 할아버지 재산에 욕심이 생겼던 거죠. 제가 장남이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저에 대한 할아버지의 편애가 심한 편이었어요. 저는 그렇다고 그런 돈에 관심도 없었고 사촌동생들과 다투기도 싫었어요. 그럼에도 시기와 질투가 생기게 되더라고요. 동생들이 여자아이들이다 보니 더더욱. 할아버지도 저를 미국으로 보내주실 때 비밀로 하라고 하셨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어쩌다 그 사실이 공개가 됐나 봐요. 고모들 사이에서 난리가 난 거죠. 할아버지가 일단 돌아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고모들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도 이간질하고. 할아버지에게 어머니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제가 아는 어머니는 그렇지 않은데. 제가 또 고집이 있어서 할아버지에게 찾아가서 말씀드렸죠. ‘어머니는 잘못이 없고, 제가 어렸을 적부터 고모들이 어머니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한 거다’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아무래도 어머니는 외가 쪽이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화가 나셨나 봐요. 그냥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저도 화가 나서 거짓말하고는 못살겠다고, 한국으로 들어오겠다고 했죠. 거의 두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모든 미국 생활을 정리해서 들어왔어요. ‘어차피 군대도 가야 하니까 군대 가서 생각해보자’라는 마음이었어요.


사실 풍족하게 산 편이에요. 예술 학교여서 재료비가 정말 많이 들어가요. 둘러보니 저 같은 유학생은 많이 없고 보통 한국에서 졸업을 이미 하고 더 배우고 싶어서 온 형들이 대부분이었어요. 형들은 본인이 하고 싶은 분야에 대해 열정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벌어서 유학을 왔으니까 재료비를 아껴 썼는데 저는 돈 걱정 없이 사용하니까 쓴소리를 많이 하더라고요. ‘너 그렇게 쓰면 안 된다. 언제까지 그렇게 풍족하게 돈 쓸 수 있을 것 같아. 부모님 돈과 네 돈은 다르다’라고. 당시에 제가 어려서 왜 그렇게 말하는지 몰랐어요. 그러다 한 순간에 지원이 끊기니까 저는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제 손으로 돈 한 번 벌어본 적도 없었고. ‘영원한 것이 아니었구나. 그 돈은 내 것이 아니었구나. 나를 위한 돈이 아니구나. 우리 집안이 돌아가기 위한 돈이구나. 이 돈을 쓰기 위해서 나는 항상 내 자존심을 굽히며 다녀야 하는구나’를 느끼고 한국으로 왔어요.



한국에 들어오니까 집에 어머니가 안 계시더라고요. 집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해서 삼촌 집에서 살고 계시더라고요. 동생에게 ‘엄마 언제와?’라고 물어봤더니 ‘엄마 집에 못 들어와’라고 하더라고요. 속이 많이 상했어요. 어머니는 한 마디도 안 하셨거든요. 제가 외국에서 살고 있으니 타지에서 걱정할까 봐 집에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친가에 대한 원망이 더 커졌죠. 이대로 군대를 가도 되는 건가 싶고. 엄마에게 만나자고 연락했어요. 어머니가 지내시는 삼촌 집에 갔는데 창고방에서 짐을 풀고 지내고 계시더라고요. 방이 정말 좁았어요. 삼촌네 짐이 들어간 박스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 남은 공간에 이불만 펴놓고 지내셨어요. ‘이게 뭔가. 갑자기 우리 집이 왜 이렇게 됐나’ 싶었죠.


그때부터 생각이 많아졌어요. ‘나는 왜 외국에서 떵떵 거리면서 살고 있었나’ 후회도 들고. 외국에서 돈이 필요하면 매일 어머니에게 달라고 했거든요. 정작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생활비를 받으며 살고 있었는데 ‘엄마 나 돈 필요해’하면 매번 보내주셨어요. 한국 음식 생각날까 봐 큰 박스에 넣어서 옷, 과자랑 한 달에 한 번씩 함께 보내주시고. 이런 모습들이 떠오르니까 제가 장남이어서 더 안타까운 마음이 컸어요. 아버지에 대한 불신도 커지고. 군대 다녀와서 생각해야겠다 마음먹고 한국 온 지 두 달만에 군대를 가게 됐어요.


가족과의 거리감이 생겼겠네요.

성 : 한국에 ‘우리 집’이라고 하는 집조차 저에게 낯설었어요. 학기 끝나고 방학 때마다 한국에 들어오면 미국에 있는 ‘우리 집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어요. 어머니가 들으시고서 ‘여기가 네 집인데 어딜 가 자꾸’라고 하셨죠. 한국 집에 있으면 너무 불편했는데 캐나다에 가면 정말 편한 거예요. 홈스테이 하던 조그만 방이 더 편했죠.

그런 상황에서 군대를 가니까 정말 힘들더라고요. 한국 지리에 대해서도 잘 몰랐는데 강원도로 배치를 받고. 심지어 건물 벽 조차도 낯설었어요. 그나마 한국에 와서 도시에 적응해가고 있었는데 외진 곳에 있으니 적응도 안되고. 같이 생활하는 부대원들과도 괴리가 느껴졌어요. 자라온 환경이 다르니까. 관심사도 다르고. 그러다 보니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도 없고. 한국 친구들은 PC방 가고, 노래방 가고, 한국에서 유행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을 텐데 저는 다르게 커 왔으니까. 트러블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심리적인 괴리가 느껴지니까 더 외롭더라고요.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였으니 법적으로 성인이긴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어린 나이죠. 여러 사건과 환경들로 인해 불안함이 컸을 것 같아요.

성 : 어머니에 대한 문제가 가장 걱정이었어요. 어머니만 떵떵 거리며 잘 사시면 내 마음이 편할 텐데. 제가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안 하셨죠. 가장 듣기 힘들었던 이야기가 있어요. 어머니가 제가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 오셨던 적이 있어요. 다른 유학생 부모님들보다 많이 안 오신 편이에요. 나중에 들어보니 아버지가 안 보내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부모님이 저에 대한 사랑이 커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버지는 항상 저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셨어요.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와 가까웠는데 자라면서 어머니랑 가까워지니까 아버지는 서운해하시고.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다른 고모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못 받고 자란 편이라 자식인 저에 대한 집착이라면 집착이 있었죠. 제가 어머니랑 사이가 좋으면 뭐라 하셨어요. 본인과 저는 공감대가 없는데 저랑 어머니는 편하게 이야기하니까.


아버지는 어머니가 혼자서 저를 만나러 가는 게 싫으셨던 거예요. 나쁜 마음이었다기보다 아버지는 갈 수 있는 여건이 안되는데 서운하셨던 것 같아요. 저는 당연히 아버지가 보내주셔서 오신 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아들 보고 싶어서 대출받아서 오신 거였어요.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나중에서야 알게 됐죠. 그 돈을 가지고 오셔서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옷도 사주시고. 심지어 저에게 돈을 다 쓰시고 돌아갈 돈이 없어서 식구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겨우 돌아가시고. 항상 제 위주였어요 어머니는. 더 커서 ‘내가 왜 그랬을까’ 자책도 많이 했어요. 엄마가 항상 강했으면 했죠. 매번 만날 때마다 ‘왜 다 나한테 맞춰. 엄마 살 길 먼저 찾아’라면서 집에 돌아가서 방에서 날마다 울었어요.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군대에 들어갔군요.

성 : 안타깝고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군대에 갔어요. 제 꿈이 있으니 다 괜찮아질 거라 믿고 일단 갔죠. 군대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어요. 전방 부대이다 보니 근무 시간에 짬을 내거나 쉬는 시간도 없이 조그마한 종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렸어요. 그리고 휴가를 나와도 포트폴리오만 준비했던 것 같아요. 장학금을 받는 것 밖에 내가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겠다 생각해서 열심히 준비했죠.


찾아보니 스웨덴에 있는 자동차 디자인 학교에서 스웨덴어 시험만 통과하면 학비가 전액 무료라고 하더라고요. 스웨덴에는 볼보(Volvo)도 있고 사브(SAAB)도 있으니까 괜찮겠다 싶었어요. 스웨덴어 책을 사서 공부하기도 하고. 물론 그만두긴 했는데(웃음). 계속 그런 준비만 했어요. 포트폴리오 정리를 해서 미국 학교 여러 곳에 보냈는데 디트로이트에 있는 CCS(College for Creative Studies)라는 대학교의 디자인 학교에서 장학금을 지원해줄 테니 오라고 메일이 왔어요. ‘이제 됐구나’ 했죠. 학비만 해결되면 나머지 생활비는 아르바이트하면서 충당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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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때 과제물 작업중.jpg

(위 사진 모두 미국 대학 시절 성원석 디렉터)


그 시기에 할아버지가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군대 전역했으니까 다시 대학 가야지’라고 하셨어요. 왠지 더 이상 지원을 받기가 싫었어요. 제가 도움을 받으면 할아버지나 친가 사람들이 어머니에 대해 안 좋은 소리할 때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것 같아서. 그렇게 살기는 싫었어요.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말씀드리고 집에 돌아왔죠.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직도 나아지지 않은 어머니 사정이 떠오르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유학 가는 게 맞나’ 싶더라고요. 나름 맏이이고 어머니에게 큰 도움은 못 돼도 옆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할 텐데. 미국에 가면 또 4년 동안 학교에만 매달려야 하니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 인생에는 이 길 밖에 없었는데.


고민의 결론은 어떻게 내렸나요?

성 : 제가 고등학생 때 어머니가 저에게 물어보신 적이 있어요. ‘자동차 디자인 말고 다른 건 뭐 하고 싶어?’라고. 1초도 생각하지 않고 ‘그럼 나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데’라고 말했어요. 단 한 번도 다른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만큼 확고한 꿈이었던 거죠. 꿈을 놓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의지가 없다고도 볼 수 있잖아요. 환경이 어떻더라도 꿈이 확고하면 밀고 나갈 텐데. 그렇다고 ‘내 꿈만 좇는 것이 맞는 것인가’라는 생각. 나에게 당장 돈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가만히 거실에 앉아서 하루 종일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내 생각만 할 수 없고, 어머니를 위해서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생각하면서. 눈물도 많이 나고. 방에 들어가서 포트폴리오를 위해 지금껏 그려온 그림들도 모두 버리고. 자동차 디자인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 됐으니까. 어떤 일이든 창피한 일은 없잖아요 나쁜 일만 아니면. 다른 일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저 자신에게 창피하더라고요.


꿈을 포기한 만큼 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았어야 했겠네요. 이후 어떤 일을 하게 됐나요?

성 : 당시 한창 스마트폰이 처음 나올 때였어요. 휴대폰 케이스랑 보호 필름이 많이 보급되기 시작하더라고요. 중국에서 소싱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서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당시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제품들은 아직 비쌀 때였어요. 우리나라에서 3만 원, 5만 원 하는 제품이 중국에서 500원이면 가져올 수 있더라고요. 지금이야 여러 채널을 통해 접근성이 높아져서 소비자들도 500원, 1,000원 떨이 제품들을 구매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메이저 업체 몇 군데에서만 비싼 가격에 살 수 있었죠.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모아 놓은 200만 원으로 시작했죠.


그냥 떼다 팔기는 또 싫고 제 브랜드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제 만화책도 만들어보고, 제 회사 사옥도 그려보고 초등학교 1학년 때는 동네 잡지도 만들어보면서 나만의 것을 디자인하기 좋아했거든요. 이번에도 제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죠. 디자인을 하니까 이런 부분이 좋은 것 같아요. 어떤 것을 하더라도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으니까. 제품의 앞에 서는 부분은 포장, 마케팅, 제품 디자인처럼 디자인 요소잖아요. 제가 디자인을 다룰 줄 아니까 필름 포장부터 시작해서 웹 홈페이지까지 하나하나 다 만들었어요. 거의 6개월 정도 걸렸어요.


그때까지도 주위 사람들은 제가 그 일을 하는지 몰랐어요(웃음). 말을 하기가 꺼려지더라고요. 자동차 디자인을 하겠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주위 사람들이 실망할 것 같았어요. 결국 몰래 일을 벌였는데 신기하게 처음부터 잘 됐어요. 당시 저를 생각해보면 바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온라인 마케팅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었고, 어떤 사이트에서 어떻게 판매해야 할지 몰랐고. 멋진 제품이 나오면 사람들이 ‘멋있네’ 하면서 살 줄 알았어요. 제가 아는 곳이라고는 제가 옷을 사던 오픈마켓뿐이 이 서 사업자 등록을 하고 제품을 올렸어요. 한 달 동안 거의 1,000만 원을 벌었어요. 다른 메이저 업체들과 비슷하게 한다고 처음 패키징 디자인한 비용까지 들어갔었는데 그 돈을 다 회수한 거죠. 만약 제가 체계적으로 공부해서 나온 결과면 제 사업적 역량을 기반으로 다른 제품을 출시해도 잘 됐을 텐데 처음에는 정말 운이었어요. 어머니에게 가서 ‘이제 이만큼 버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자랑도 하고.


누구보다 어머님이 기뻐하셨을 것 같아요.

성 : 저는 아버지와 사는 게 스스로 비겁하다고 생각했어요. 두 분 모두 제 부모님이지만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약자인 어머님을 선택해야겠다, 어머님이 피해자다, 이간질의 희생자다,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살 집이 없다가 아버지에게 얹혀사는 것은 비겁하다 생각했죠. 새벽에 짐을 싸서 아버지가 일 나가셨을 때 집을 나왔어요. 정말 어렸던 것 같아요. 생각이 들면 바로 직진하는 스타일이었죠. 제가 동생에게도 혹시 나를 찾으면 오피스텔 구해서 집 나갔다고 말하라 했어요. 아버지는 제가 왜 나갔는지 영문도 모르실 거예요. 저는 아버지에게 한 번도 어머니 이야기를 안 했어요. 말이 안 통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대화를 했어야 했다는 생각도 했어요.


사업은 지속적으로 잘 됐나요?

성 : 휴대폰 케이스를 직접 만들었어요. 필름은 디자인 제품이 아니니 제가 디자인한 제품을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중국 공장에서 생산을 했는데 너무 엉망으로 나오더라고요. 파스텔 톤의 하늘색 케이스를 주문했는데 그냥 파란색으로 나온 거예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엉망이더라고요. 연륜 있는 분들은 직접 중국에 가서 지켜보면서 생산을 하는데 저는 한국에서 생산하려고 마음먹고 국내 휴대폰 케이스 공장을 찾아갔죠.


아웃소싱으로 제품도 만들어 주고 자체 브랜드도 가지고 있는 공장이었어요. 사장님들이 다 하지 말라고 했어요. 정말 열정이 없으면 하지 말라고. 새로운 업체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시는 거예요. 그 와중에 겨우 해주겠다는 업체를 만났어요. 제품을 생산하려면 금형을 만들어야 하는데 저는 금형에 대한 이해도 없었죠. 만들고 싶어 하는 디자인 그림만 가져가서 생산을 했더니 또 엉망으로 나오더라고요. 돈은 자꾸 들어가는데 제품은 엉망으로 나오는 거예요. ‘대출을 받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돈을 벌어봤으니까 또 벌 거야’라는 생각이었죠. 25살이었어요. 대출을 받아서 금형을 수정했어요.



저는 바보같이 1 금융, 2 금융 차이를 몰랐어요. 인생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그림만 그리다 왔으니 세상 물정 몰랐죠. 저축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이후에는 3 금융에서 대출을 받으니 신용도가 바닥으로 떨어지더라고요. 총 3,000만 원 대출을 받아서 제품을 만들었는데 다행히 잘 되더라고요. 제품을 들고 유통사를 찾아갔어요. 그중 한 업체에서 제 디자인을 특이하다고 잘 봐주셔서 백화점에도 유통되고 큼직한 매장에도 입점이 돼서 한 달에 3,000만 원 정도 들어오더라고요.


그때 체계를 잡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직원도 구하고 투자를 해야 하는데 성격 상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해야 하니 제 선에서 다 해결하려 했어요. 자만이 하늘 끝까지 닿았죠. 그러다 보니 사기도 당했죠. 작은 업체들이 연락을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관계 형성이 잘 됐어요. 어느 순간 두 달 세 달 돈이 밀려서 안 들어오더라고요. 공장에 줘야 할 돈도 있어서 계속 독촉했는데 업체가 없어지더라고요. 제가 한창 자만했을 때라 ‘내 디자인은 최고야’하고 신제품 개발에 소홀했어요. 처음 디자인 하나로 1년 넘게 팔면서 후속 제품에 대한 고려가 없었어요. 시장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거죠. 워낙 빨리 회전되는 시장인데.


공장에 돈이 밀리면 안 되니까 대출을 받아서 공장에 돈을 내고, 제 신용도가 좋지 않으니 타던 차를 담보로 맡기고 사채에 가까운 고금리 대출도 받았어요. 1,000만 원 빌리는데 한 달 이자가 200~300만 원 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었죠. 막막하니까 눈 앞 까지만 보였던 것 같아요. 신제품 나오는데 두세 달 걸리고, 한 달에 3,000만 원씩 벌면 되니까 무리해서라도 신제품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마음이 급하니까 부랴부랴 급하게 디자인 한 제품을 만들었어요. 디자인은 급하게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영감을 항상 생각하며 지니고 있다가 필요한 때 트렌드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데, 급하게 만들다 보니 품질도 디자인도 모두 엉망으로 나온 거예요. 유통사에 제품을 들고 갔더니 ‘이 제품은 힘들겠는데. 품질이 왜 이래’라는 답변만 받았죠. 분명하게 잡고 가야 하는 품질 문제가 있었는데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라면서 스스로 타협을 했어요. 무리하게 해주겠다는 유통사가 한 곳 있었는데 제품에 문제가 있으니 계속 부서져서 반품이 되는 거예요. 갑작스레 6,000 ~ 7,000만 원 빚더미에 올랐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결국 포기했어요 사업을.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요. 돈은 필요한데 사무실 월세도 못 내고 있었고. 다행히 소호(SOHO) 사무실 사장님이 저를 좋게 봐주셔서 두 달치 밀렸던 월세 상관없이 방 빼도 된다고 하셔서 바로 나왔죠.


결국 고시원에 들어갔어요. 아르바이트하면서 겨우 지냈죠. 매일 빚 독촉 전화가 왔는데 하루 종일 고시원 방에서 불 꺼놓고 하루 종일 누워있던 날도 있었어요. 두렵기도 했고.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고. 상황을 알고 있는 주변 친구도 저에게 왜 이렇게 세상 힘들게 사냐고 타박했어요. 집에서 도와줄 여력이 있으면 가서 빌라고. ‘한 번 숙이고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않냐. 남들은 숙이고 싶어도 숙일 곳이 없다’라면서. 저도 제 고집이 있어서 죽으면 죽었지 그러지 않겠다고 했죠(웃음).



디자이너의 99% 향기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 본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허가를 받아 작성한 게시물이며 본 글의 저작권은 게시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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