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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용 May 13. 2018

[몽촌토성 인터뷰 25-2] 상상해봤니 헤이리

헤이리의 신비한 게스트하우스

* 앞선 인터뷰를 먼저 읽으면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합니다(클릭 시 앞선 인터뷰로 이동)



기자 생활 이후 새물결출판사의 편집국장이 되었습니다. 현장에서 발로 뛰기보다 데스크에 앉아 총괄하는 자리일 텐데 성향에 맞았는지 궁금합니다. 

안 : 우리나라 잡지사의 구조는 지금도 크게 달라진 바 없겠지만 정말 영세해요. 편집팀이라고 해봐야 10여 명, 광고나 영업팀을 포함해도 30명 미만의 작은 조직이죠. 이런 작은 조직에서는 오랫동안 기자 생활만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지 않아요. 경제적인 부분이 많이 열악하다 보니 인사이동이 잦고, 제가 현장에 더 오래 있고 싶어도 할 수 없이 데스크 자리로 갈 수밖에 없어요. 누군가 그 자리를 맡아야 하니까 경험이 조금 쌓이면 어쩔 수 없이 밀려 올라가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미디어의 꽃은 누군가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현장성이거든요. 데스크에 앉게 되면 그 재미나 절실함이 없어지죠. 매일 회의하면서 어떤 기사를 어디에 배치할 지에 대한 사무적인 업무를 주로 하게 되니. 한마디로 재미가 없어지죠. 이런 이유에서 제가 자발적 조기 퇴직을 했던 것 같아요. 


이후 행보가 흥미롭습니다. 퇴직 후 마흔여섯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선택했습니다. 

안 : 잡지사 몇 곳을 이동하면서 총 25년 간 미디어 업계의 여러 상황과 여건을 경험했어요. 나이 먹어서 까지 조직의 구성원으로 남아 있기에는 저의 성향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만하면 됐다’라는 생각이었죠. 특히 미디어 업계는 어떻게 보면 출퇴근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어요. 예컨대 내가 생산직 근로자로 일을 한다면 퇴근 후 다음 출근까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죠. 현장을 떠나 있으니까.



 반면 미디어 업계는 그렇지 않아요. 퇴근을 했더라도 항상 뉴스나 신문을 보면서 이 이슈를 어떻게 연관 지을 수 있을까, 타사와 어떤 차별점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죠. 일에서 떠날 수가 없어요. 현장에서 취재를 하더라도 밤 시간에는 원고를 써야 하고. 25년 간 퇴근이 없다고 여겼어요. 중요한 가족 행사가 있더라도 몸은 행사장에 있어도 머리 한 구석에는 일 생각이 남아있고. 


 이런 삶에서 벗어나 패러다임을 완전하게 바꿔야겠다 생각했죠. 한국에 있어봐야 이 회사에서 저 회사로 옮겨다닐 뿐이니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삶을 시도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미국 유학은 하나의 빌미였어요. 여행자로 돌아다니기보다 외국의 어느 한 곳에 정주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던 거예요. 여행자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입장이기 때문에 정주자의 마음 가짐과 전혀 다른 마음을 갖고 있거든요. 외국에서 정주자의 삶을 살았다는 경험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거예요.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하더라도 그건 여행자의 시각이고, 현지에서 살아야 하는 정주자는 다른 시각으로 보게 돼요. 


 이를 위해 신분이 필요하더라고요. 학생이라는 신분이 참 좋았어요. 머무는 삶을 살 수 있을뿐더러 어디든 저렴하게 접근이 가능해서 나 자신을 다른 문화권에 던져보는 방법들 중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에서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머물다 왔나요? 

안 : 약 1년 정도였어요. 미시간 주에 있었는데 학교를 다니며 직접 생활해보니 제가 여행자로서 지켜봤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지더라고요. 제 기대와도 다른 모습도 있었어요.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어떤 삶을 살 수 있을지 탐험하기 위해서 방학 동안 배낭여행을 시작했죠.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여행을 다녔어요. ‘차를 렌트하지 않고 히치하이킹을 한다’와 같은. 나 스스로를 광야에 던지듯이 길을 떠났어요.


 120일이 넘는 그 시간은 저에게 현지의 진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어요. 여행을 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런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깨달아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됐어요. 


어떤 가치들을 깨달았는지 궁금하네요. 

안 : 만약 그곳이 천국이었다면, 내가 꿈꾸던 이상향이 그곳에 있었다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영주 하는 삶을 선택할 각오도 했어요.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서 목격했던 모습은 여행자로서 바라봤던 모습과 너무나 달랐어요. 20 ~ 30년 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던 사람도 현장에서는 더 이상 제가 부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타문화권의 사람이기에 현지 문화와 동화되지 못하거나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삶의 모습이 태반이었어요. 극히 일부만 소위 메이저의 삶을 살고 있어요. 



 내가 가장 큰 경쟁력을 가지고 타문화권과 일대일로 교류하기 위해서는 한국 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어요. 제가 미국에 이민자로 가게 되면 현지인들과 저는 경쟁자가 되는 거예요. 그들은 직장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나와 투쟁을 하게 되고, 저는 그들과 싸우거나 그들이 선택하지 않는 직장에 들어가야 하는 거죠.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은 문화적인 가치가 충족되고 그곳에 더 정진할 수 있는 삶인데, 이민자가 되는 순간 어려워져요. 제가 여행자로 가면 현지인들은 저를 더 알고자 하고 배려해주지만 이민자로 가는 순간 경쟁자가 되니까. 저는 그저 동양의 신비로운 사람으로 남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여권과 신용카드만 있으면 어디든 나갈 수 있는 환경이라 굳이 해외에 머물 필요가 없겠다는 판단이었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한 곳이 이곳 헤이리입니다. 수많은 지역 중에서 헤이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 : 저는 시골 출신이에요. 제 부모님은 농사꾼이셨죠. 1년에 한 번씩 고향에 내려가 보면 옛 친구들과도 만나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소통의 문제를 느꼈어요. 제가 국민학교 4학년 2학기에 서울로 유학을 왔는데 그때부터 서로 너무나 다른 길을 걸었던 거예요.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서 친구들과 만나도 ‘건강은 괜찮니’, ‘아이들은 몇 살이니’, ‘부모님은 잘 지내시니’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나면 공통된 주제가 없어져요. 만약 고향에서 정착하게 된다면 나의 욕구와 그들의 가치관이 달라서 불편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어느 곳이 좋을지 고민하다가 각각의 다른 생각들이 공존할 수 있고 상호 존중될 수 있는 곳이 이곳이라고 판단하고 택했습니다. 


모티프원 객실 중 한 곳


헤이리가 예술 마을인 만큼 이곳에 속한 주민들끼리 만나 어떤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는지 궁금합니다. 

안 : 많은 경우 저의 정신을 함양해줘요. 예컨대 서울이라면 같이 사는 동네라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은 이웃이라고 부르기 힘들죠. 더군다나 아파트에서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이웃을 경험하기 힘들죠. 저와 제 처는 저희 자식들의 친구들 학부형을 만나는 것이 전부였어요. 


 헤이리는 마을이에요. 도회지가 아니기 때문에 마을이라는 커뮤니티가 작동하고 있어요. 이전에는 나눔이 없었던 사람이더라도 같이 지낼 수밖에 없는 작은 커뮤니티 속에서 덜컥 이웃이 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이웃을 고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헤이리에는 대화가 통하고, 양해할 것은 양해할 수 있는 공동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택한 거예요. 물론 예술가 중에는 성격상 교류를 수줍어하는 분들도 있지만 저와 비슷하게 소통을 즐겨하는 분들도 많아요.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깊은 토론을 한다든지, 함께 여행을 간다든지, 각자의 전문 예술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해요. 타 장르를 전문가의 입장에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본인을 어떤 예술가로 정의 내리고 있나요? 

안 : 저를 정의하는 여러 단어들이 있는데 사실 저도 저를 정의할 수 없어요. 너무 변덕스러워서. 좋아하는 일만 따라가다 보니. 많은 시간을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고, 또 많은 시간 작가로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취재기자로서 영상이나 사진도 많이 다루어왔죠. 어느 한 분야에 속해있기보다 좋은 생각, 창의적인 생각을 글, 영상, 입체 작업, 사진으로 표현하는 크리에이터이고 싶어요. 



 그중에서도 사진은 제 평생의 지우(知友)로서 동행해왔어요. 대상을 허리 굽혀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줬어요. 숲에 있는 나무를 보게 했고, 나무의 잎을 보게 했고, 잎의 줄기를 보게 했어요. 그 과정에서 곤충과 같이 여러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알게 해줬죠. 대상을 무심하지 않게, 유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줬어요. 자세하게 들여다보니까 이해하게 되고 상대방과 소통을 증진시켜 줬어요. 어떤 대상이라도 허투루 보지 않고 가치 있게 볼 수 있는 도구가 되었죠. 이런 면에서 사진은 저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상상해봤니 헤이리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 본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허가를 받아 작성한 게시물이며 본 글의 저작권은 게시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이안수 대표 및 모티프원 SNS

  - Facebook : https://www.facebook.com/ansoo.lee.1

  - 모티프원 블로그 : https://motif_1.blog.me/



@글 : 이시용   @사진 : 배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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