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잖은 기획자, 훌륭한 디자이너
'뭐 하나 있어야 되겠다.'
남들 다 가지고 있으니 하나쯤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 로고 디자인의 시작이었다.
요즘이야 '이 시국에' 불매운동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무인양품(MUJI)처럼 로고 없이도 양질의 상품을 만들 수 있다면 브랜드 로고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건 하라 켄야(原硏哉, Kenya Hara)니까 가능한 거고
그냥 고민하기로 했다. 로고 디자인.
<the Persons>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로고에 온전히 담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러 방면으로 고민을 했다.
<the Persons>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먼저 정리해야 했다.
글로 정리하니까 있어 보이게 표현됐지만 막상 고민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감에 의존한 직관(intuition)이 먼저 툭 튀어나온다. 애플 로고가 먼저 떠오르고, 어설픈 '빼기의 기술'을 생각한다.
됐고, 무작정 그려보기로 한다.
'인터뷰'니까 말, 마이크, 사람, 대화, 생각, 아이디어, 질문, 물음표가 연상된다. 한눈에 '인터뷰'를 담은 책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고 싶다. 마이크 모양을 예쁘게 아이콘으로 만들어 보기도 하고, <the Persons>의 'P'를 심플하게 강조해보기도 하고, 물음표에다가 사람 형상을 얹어보기도 한다. 이상하다. 이것저것 발산하는 작업을 해봤으니 다시 핵심 가치를 되새기며 수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음표'를 핵심 아이콘으로 정했다. 다만 물음표 하나만으로는 브랜드 이름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으므로 글자로 표현한 'the Persons'를 함께 디자인하기로 했다. 우선 쉬워 보이는 글자 로고(Word Mark).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는 서체의 배열, 간격, 형태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므로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다. 개별 글자 별로 놓고 보면 예뻐 보이더라도 모든 글자를 뭉쳐서 보면 어색할 수 있다. 인간은 문자를 시각적으로 접할 경우 무의식적으로 읽으려는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물론 읽을 수 있는 언어에 한해서), 가독성도 글자 로고의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개념이 폰트(font)다. 결론은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 어떤 글자가 로고로 형상화되어야 할지 정의하는 것 까지가 내가 해야 할 역할임을 다행히도 일찍 깨달았다. 'the Persons'다.
다음으로 심벌 디자인(Symbol Desigh). 혹시라도, 실수라도, 설령 <the Persons>가 많이 이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유명해진다면 가장 많이 돌아다니게 될 녀석이다. 그래서 더 고민이 많았다. 수많은 디자인을 접하고 체계적인 디자인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야 직관에 의존해도 그 결과물이 쌓인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하기에 옳은 방향성을 띠겠지만, 나같이 디자인을 소비하기만 하는 철저한 일반인의 직관은 어설플 수밖에 없다. 이 역시 담으려는 메시지를 정하고서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맡기자는 현명한 선택을 일찍이 했다.
앞서 언급했듯 핵심 심벌은 '물음표'다. 그동안 여러 번의 인터뷰를 하면서 머릿속에 겹겹이 쌓은 '인터뷰'의 형상은 '질문'이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한 최고의 도구가 '질문'이다. 상대방의 속마음과 생각을 얼마나 끄집어낼 수 있는지는 질문의 내용과 흐름에 달렸다. 그리고 질문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심벌은 '물음표'라는 결론을 냈다. 이제 '어떤' 물음표를 심벌로 사용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차례가 왔다.
물음표 하나 만으로는 아무리 봐도 심심하다. 어설프게 읽고 배운 '빼기의 기술'을 떠올려 보면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이 최고라고 하지만 눈에 띠지 않는 디자인으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하다. 의미를 더 담으려 한다. 한 꺼풀 벗겨내고 싶다. 인터뷰는 인터뷰이(interviewee)의 속사정과 그들이 쌓은 전문적인 지식을 얻어내기 위한 지적 전투다. 인터뷰이가 얼마나 허심탄회하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이끌지 내내 고민하며 전투에 임한다. 그렇다고 총과 칼을 상징으로 사용할 수는 없으니 점잖게 '한 꺼풀 벗겨냄'을 상징화하고 싶다. 다행히 그 형상이 쉽사리 떠오른다. 책장 끄트머리를 잡아 넘기는 모습이자 붙어있던 스티커를 벗겨내는 모습. '물음표'와 '한 꺼풀 벗겨냄'을 조합해 본다.
비단 로고 디자인뿐 아니라 모든 디자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색상이다. 메인 색상(Main Color)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할 때 고려할 사항이 많다. 비즈니스가 어떤 분야에 속해있는지, 가벼워도 되는지 무거운 색상을 사용해야 하는지, 경쟁 브랜드와 차별화하기 위해 어떤 색상을 사용해야 하는지 등 기획적인 요소와 명도, 채도, 등 디자인 기술적인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다시 고민을 시작한다. 기획자의 가장 큰 무기는 생각이다.
다행히도, 무척이나 다행히도 적절한 색상 군이 떠올랐다. 사실 색상 군 이전에 벤치마킹을 위한 브랜드가 먼저 떠올랐다. 'National Geographic'. '직업판 내셔널지오그래픽'이라는 나름 거창한 수식어를 만들어내며 메인 색상은 자연스럽게 노랑으로 정해졌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전 세계 야생의 동물을 탐구한다면 <the Persons>는 사회라는 또 다른 야생의 사람들을 탐구하기로 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카카오'를 통해 친숙한 색상이 됐고 가시성도 확보할 수 있는 장점도 생겼다. 보조 색상(Sub Color)도 흑과 백으로 정한다. 이제 디자이너에게 넘겨줄 차례다.
로고 디자인을 전달받았다. 역시 훌륭한 디자이너. 먼저 문자 로고의 글자체가 전문성과 고급적인 이미지를 잘 담아냈다.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전문성을 내포하며 은근한 신뢰감을 주는 디자인이다. 무엇보다 핵심 포인트는 'P'를 물음표 로고로 치환한 점이다. 기획자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너무나 센스 있게 적용했다. 아래 있는 최종 세 가지 시안 중에서 가운데 'T 기울임' 로고를 최종 디자인으로 정했다.
처음 받았던 색상은 앞서 기획했던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오리지널 칼라와 다른 색이었다. 아래 이미지와 같이 조금 더 주황색에 가깝고 차분해진 색이었다.
이에 대한 디자이너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the Persons>는 해당 분야의 정말 주요한 인물들을 전문적으로 심도 있게 인터뷰하는 것을 이해하고 고민한 결과, 일반적인 노란색보다는 명예와 신뢰를 높이기 위해 조금 더 주황색에 가까운 노란색으로 색상을 설정했습니다. 노란색이 가벼워 보이지 않도록 컬러 설정을 진행했습니다.
메일로 이 설명을 읽으며 고마움을 먼저 느꼈다. <the Persons>의 본질과 콘셉트를 공감하고 같이 고민하며 정해준 색상이기에. 그럼에도 처음 떠올렸던 <National Geographic>의 노랑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에. 결국은 함께 논의하고 합의하고서 노랑을 최종 색상으로 정했다. 디자이너의 초기 시안 중 내용을 변경한 유일한 부분이기도 하다.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다. 분명 앞서 기획했던 나름의 디자인이 무척 부족함을 알았기에 디자이너가 '물음표'와 '한 꺼풀 벗겨냄'이라는 핵심 아이디어를 어떻게 융합해 심벌을 디자인해낼지 기대됐다. 역시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 온전히 맡겨야 하나보다.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들어가야 할 핵심 의미를 모두 담은 디자인을 만났다. '인터뷰 질문지'를 정확하게 형상화했다. 수정이고 뭐고 없다. 확정이다. 최종 로고는 아래 이미지와 같이 배경 또는 상황에 따라 혼용할 수 있도록 세 가지 배색으로 정리되었다. <the Persons> 1판 1쇄 표지에 어떤 로고가 등장할지 편집자인 필자도 궁금하다.
역시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 맡겨야 한다. 이번 로고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다시금 깨달았다. 다만 기획자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기획을 할 수 있는 디자이너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두 역할이 나뉘어 있다면 본질을 읽어내는 기획자의 능력이 막중하다. 방향을 잃고 표류할 수 있다. 배를 만들어 놓고 등산을 하게 될 수 있다. 애초에 고민이 필요하다. 고민 다운 고민. 디자인은 브랜드의 핵심 가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알맹이이기 때문에 본질에 대한 고민 없이는 디자인 단계로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애초에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같잖은 기획자와 꽤 괜찮은 기획자를 구분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얼마나 치열하게 본질을 고민하는가. 물론 이 모든 말은 필자 본인에게 하는 말이다. 아직도 책을 손에 쥐기까지 먼 길이 남았다. 이제 한 고비 넘겼다.
이 글을 통해 매우 훌륭한 디자인 작업을 해준 @skoio 디자이너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지금 보니 디자이너님이 가장 위 사진에 있는 하라 켄야를 닮으셨네요.
칭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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