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색을 취재하다
아침에 눈을 떠 창문을 열었을 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은 괜스레 내 마음도 흰 도화지처럼 한껏 들뜬다.
구름이 잔뜩 하늘을 뒤덮고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든 날은 내 마음 도화지에도 먹물이 물들어가는 듯하다.
옛적 어느 적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색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때가 있었을 테다. 그리고 그 표현의 적절함과 공감대는 현대에도 유효하다.
사람의 생각과 고민, 마음 상태를 색으로 표현해주고 상담해주는 리포터가 있다. 음? 리포터라니?
맞다 '그' 리포터. 사건을 취재하는 리포터. 사건을 취재하는 리포터가 사람의 마음도 취재한다는 말인가.
언뜻 보면 전혀 다른 분야의 직업인 듯하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법. 이 리포터(또는 상담사)를 공통분모로 두 가지 이질적인 모습을 융합시키는 무언가가 있겠다는 기대에 가까운 추측.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색(色)은 무엇일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색(色)은 무엇일까
아직은 세찬 바람이 어깨를 움츠리게 만드는 2월 초 어느 날. 신촌의 다시 필(Dasi Feel) 컬러 테라피 센터에서 두 가지 다른 색을 자신의 도화지에 색칠해가는 곽자연 씨를 인터뷰했다.
박수 한 번만 쳐주세요. 하나 둘 셋.
곽자연(이하 곽) : (박수)
네 시작하겠습니다.
곽 : 네, 별걸 다 시키네요(웃음).
반갑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곽 : 저는 TBS 교통 방송에서 교통 리포터로, 국방 홍보원 산하 국방 FM에서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고 컬러 테라피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곽자연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하는 일이 여러 가지네요.
곽 : 크게 보면 리포터와 컬러 테라피스트 두 부분으로 나누면 될 것 같아요.
저는 곽자연 씨를 리포터로 먼저 접했다 보니 이와 관련한 질문 먼저 드릴게요. TBS와 국방 FM에서 리포터로 활동한다고 말해주셨는데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곽 : TBS 교통 방송의 경우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다시피 95.1 MHz를 통해서 송출되는 라디오 방송이에요. 그곳에서 서울 시내 교통정보를 전달드리는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어요. 국방 FM에서는 군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청취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먼저 일하게 된 곳은 TBS 교통 방송이었나요?
곽 : 네. TBS에서 먼저 교통 리포터로 활동을 하면서 취재까지 하게 됐어요. 국방 FM에서는 취재를 맡고 있고요.
리포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곽 : 처음 시작했던 일이 라디오 리포터였어요. 그 경력을 살리다 보니까 이 일을 계속하고 있더라고요.
사전 조사를 해보니 첫 경력은 대구 KBS였어요. 어떻게 대구까지 내려가게 됐나요?
곽 : 대구까지 내려가게 된 이유를 많이들 물어보세요. 방송 쪽 취업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다들 아실 거예요. 정해져 있는 자리가 많지 않다 보니까 공채 공지가 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어디든 가요. 서울에서 준비했던 사람들도 부산에서 자리가 났다 하면 부산으로, 대구에서 났다 하면 대구로 내려가요.
저도 그렇게 대구로 내려갔어요. 이렇게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대구 KBS였어요.
그때가 몇 살이었나요?
곽 : 스물네 살?! 사실 취업이 안될 줄 알고 대학교 졸업을 보류했어요. 그런데 보류를 하자마자 취업이 돼서 마지막 1년을 아무 수업도 못 듣고 대구에 내려가서 지냈어요.
20대 중반부터 타지 생활을 하셨네요. 여성으로서 혼자 하는 타지 생활이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곽 :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들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대구로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내가 드디어 방송을 할 수 있구나’라는 기대감이 더 컸던 것 같아요. 힘들겠다는 생각이 더 컸으면 못 갔을 것 같고, 지금도 다시 가라고 하면 못 갈 것 같아요. 그때는 정말 몰랐기 때문에 패기로(웃음).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방송을 할 수 있구나’라는 꿈이 있어서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내려갔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뭘 몰라서 내려갈 수 있었다고 했는데 가서는 무엇을 알게 됐나요?
곽 : 가서는 정말 많은 것을 알게 됐어요(웃음).
많이 힘든 경험이었나 봐요(웃음).
곽 : 힘든 경험도 많이 있었지만 힘들었던 기억보다 행복하고 감사했던 기억들이 더 많이 남아있어요. 대구를 떠올리면 제2의 고향처럼 포근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어요.
대구에는 몇 년 동안 있었나요?
곽 : 2년 동안 있었어요. 타지 생활은 2년까지가 적당한 것 같아요(웃음).
(왼쪽부터 대구 KBS 시절 곽자연 리포터)
대구 생활을 2년 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TBS 리포터를 시작했나요?
곽 : 그건 아니에요. 대구 KBS에 있으면서 대구 극동방송에서도 같이 방송을 했어요. 그 당시 대구 극동방송이 개국한 지 2~3개월밖에 안된 상황이어서 대구에서 방송을 하고 있는 선배들이 극동방송에서 자원봉사를 했었어요. 교회 다니는 선배들이. 저도 운 좋게 선배들을 따라서 대구 극동방송에서 제 목소리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감사한 일이고, 이를 통해서 다른 꿈을 꿀 수 있었어요. ‘극동방송에 들어가야겠다’는 꿈. 들어가서 내 목소리로 북한에도 복음을 전하고 싶고, 내 목소리로 진행을 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1년 동안의 봉사 기간 동안 이 꿈을 꾸게 됐어요.
결단을 하기까지는 많이 어려웠어요. 극동방송에 들어간다고 생각해봤을 때 ‘내가 정말 이 길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되더라고요. 종교방송이다 보니까 내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에 보이는 화려한 것들을 이루고 싶었는데 ‘내가 과연 그것들을 다 버리고 이 길을 갈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했고. 만약 들어가도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더라고요.
결국 결단을 하고서 극동방송에 들어가야 되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그 순간 또 다른 어려움이 보이더라고요. 한 방송국에서 일을 하면서 다른 방송국으로 옮기는 게 쉽지 않거든요. 일을 하면서 다른 방송국의 공채를 준비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어서 지금 일을 그만두고 공채 준비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일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서 1년 넘게 극동방송 입사만 준비했던 것 같아요. 영어 공부하면서. 극동방송 취업에 영어가 중요하거든요(웃음). 열심히 준비하면서 1년을 보냈어요.
그 후의 결과는요?
곽 : 그 후의 결과는 제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유추를 하실 수 있겠죠(웃음). 안됐어요. 얼마큼 안됐냐면 3년을 시험 봤었어요. 대구에 있었을 때부터 3번의 공채 시험을 봤는데 다 안되더라고요. 그런데 끝까지 했으면 됐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는 ‘내가 언제까지 이걸 준비해야 되나’라는 생각에 못 참겠더라고요. 왜냐하면 일도 그만두고 올라온 데다가 나이도 어느 정도 있으니. 3번째 떨어지고부터는 ‘나도 안 간다’라고 생각했어요(웃음). ‘너네가 손해지 내가 손해냐’라며 빨리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어요.
마지막으로 떨어진 당시가 4월쯤 제 생일 가까운 날이었는데 몇 년 동안 안 들어갔던 채용 사이트를 들어갔죠. 그때 마침 공채 공지가 올라왔던 곳이 TBS였어요. TBS에 입사 원서를 냈는데 잘 되더라고요. 경력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계신 거네요.
곽 : 네 쭉 다니고 있어요. 그 중간에 같이 방송을 하던 아나운서 선배가 국방 FM에서 취재해볼 생각 없냐고 제안을 하더라고요. 제가 대구에서 일을 그만두고 올라왔을 때는 다시는 교통 방송이랑 취재는 안 하겠다고 마음먹고 올라왔는데 결국에는 이 일들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저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리포터를 시작하게 됐어요.
그렇군요. 꽤 긴 스토리네요. 약 4~5년 정도?
곽 : 네 거의 4년에서 5년 정도 모든 굴곡이 담긴 이야기예요(웃음).
(왼쪽부터 방송실에서 방송 중인 곽자연 리포터)
국방 FM은 보통 남자들이 군대를 가서 듣는 경우가 많은데, 여성이 군인들을 취재하는 것이 흔한 경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곽 : 국방 FM이라고 하면 군대 이야기만 할 거라고 생각을 하세요. 마찬가지로 교통 방송에서는 교통에 관련된 이야기만 할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계세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교통 방송에서도 교통과 관련되지 않은 오락, 연예 프로그램도 있고 국방 FM에서도 군인들 이야기뿐 아니라 일반 방송국처럼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어요.
다만 메인 포커스가 군인에게 맞춰져 있죠. 군인들 이야기뿐 아니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도 접할 수 있어요. 일반 방송국과 똑같은데 군인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많이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어떤 프로그램을 맡고 계신가요?
곽 : 지금은 군인 미담 사례를 취재해서 방송을 하고 있어요. 군인들이 착한 일 하는 이야기들. ‘영웅들’이라고 표현을 해요. ‘당신은 우리의 영웅입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영웅들을 찾아뵙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있죠.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곽 : 많이들 기억에 남지만 특히 여군들이 기억에 많이 남더라고요. 여군들이 정말 멋있어요. 내가 다시 태어나면 여군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웃음). 얼마 전에 여군들이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모발기증을 한 사연이 있었어요. 머리 25cm 이상 길러서 기부를 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 안에도 많은 울림이 있어요.
그리고 사람 살린 이야기들도 많이 있어요. 남자 군인들이 임무 수행을 하던 중에 교통사고 현장에 가서 심폐소생술을 해서 심정지 환자를 살린 이야기도 있어요. 또 골수이식을 하거나 헌혈을 많이 해서 명예장을 받은 분들도 많아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참 대단하고 든든하고 느껴요.
군인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다 보니까 전국이 취재 범위가 돼요. 너무 멀면 못가는 경우가 있어서 전화 인터뷰를 해야 할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아쉽죠.
국방 FM에서는 얼마나 일을 하고 계신가요?
곽 : 2년 넘게 일한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리포터를 꿈꿨나요?
곽 : 리포터를 꿈꿨던 것은 아니고 방송 쪽 일을 하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은 ‘결국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구나’라면서 부러워하기도 해요.
계기가 있었나요?
곽 : 저희 아버지가 신문사를 다니셨던 적이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이 분야를 많이 접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같이 뉴스를 보면서 ‘(아나운서가) 최고의 직업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웃음). 그 당시에는 ‘왜 최고의 직업이야?’라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너는 말을 잘 하니까 아나운서도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도 많이 해주셨어요.
그럼에도 부모님이 추천해주는 것과 본인의 결심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본인의 성격과 맞았나요?
곽 : 음. 네 괜찮아요. 재밌어요.
어떤 면에서요?
곽 : 리포터라는 직업은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이야기의 소리를 담아서 전달하잖아요. 다양한 현장을 가게 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돼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고, 내가 내 목소리로 소식을 전하고 의견을 낼 수 있다는 점이 매력 있어요.
한창 아나운서와 리포터 붐이 일었던 때가 있었어요.
곽 : 맞아요. 그때였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추천을 해주신 때가 그때였어요.
그 당시 주위를 둘러보면 특히 여자 친구들이 대부분 방송 분야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만큼 경쟁이 심했다는 이야기겠죠.
곽 : 네. 한 때는 몇 천대 일, 몇 만대 일까지 경쟁률이 심했어요.
공채 자리 하나를 위해 그만큼의 경쟁률이 있었군요. 이런 상황에서 다른 이들과 차별화하기 위한 많은 연습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곽 : 그렇죠. 방송국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은 정말 많은 연습을 해요. 카메라 앞에서 내 모습을 모니터링해보기도 하고, 내 목소리를 수없이 녹음해서 들어보기도 하고, 뉴스나 날씨, 교통 대본을 가지고 연습을 하기도 하고, 거울을 보면서 연습을 하기도 해요. 그런 연습들을 적어도 남들이 하는 만큼 저도 했던 것 같아요.
남들만큼 노력했다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경쟁이 워낙 치열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한다는 생각으로 준비했을 것 같네요.
보통 아나운서 또는 리포터라는 직업을 떠올릴 때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해주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라요. 본인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해줘야 하는 역할인데, 가끔이라도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때가 있지 않았나요?
곽 : 음. 내 이야기는 지금도 조금씩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한두 시간 방송 시간 동안 취재물을 내보내는 중간중간에 MC와 리포터가 이야기하는 부분이라든지, 오프닝이나 클로징 때 ‘내 생각’도 이야기하거든요. ‘나의 이야기’, ‘남의 이야기’로 이분화되기보다는 한 프로그램 안에 저의 생각을 포함한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 녹아있는 것 같아요. 처음 생각해봤네요(웃음). 너무나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을 해왔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기보다 하나의 프로그램 안에 여러 이야기가 함께 들어있군요.
곽 : 네. 취재 안에서도 나의 이야기를 담고 싶으면 내 의도를 담아 기획해서 내보낼 수도 있으니까요. 나의 의견은 충분히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교통 방송에서도 우선 ‘팩트’를 전달하고 있지만, 결국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많이 정체되는 곳을 제가 선택해서 방송을 하기 때문에 저의 의도를 충분히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아, 교통 방송을 할 때 리포터 본인이 직접 도로 상황을 모니터링하고서 방송을 하는군요. 다른 사람이 써주는 줄 알았어요.
곽 : 네 많이 여쭤보시더라고요(웃음).
일상생활에서의 목소리와 방송할 때 목소리에 차이가 많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목소리가 중요한 직업이다 보니 목을 관리하는 것도 신경을 많이 쓸 것 같고요.
곽 : 목소리가 정말 중요하죠. 저희는 사실 목소리 때문에 굉장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요. 조금만 피곤하거나 미세먼지가 있어도 목소리가 갈라진다던지 바로 목에서 반응이 와요. 커피를 조금만 마셔도 건조해져서 목소리가 안 나와요. 목 관리를 많이 하려고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물을 많이 마시거나 가습기를 켜놓기도 하고 목에 좋다는 것도 많이 먹어요(웃음).
하나의 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해서 기획부터 취재까지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잖아요. 반면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몇 분짜리 방송을 듣고 바로 흘려버릴 때가 많죠. 이런 부분에서 남모를 고충이 있을 것 같아요.
곽 : 제일 아쉬운 점은 나가야 하는 분량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에요. 저희는 취재를 오랜 시간 동안 하거든요. 예를 들어 1분짜리 방송이 나가려면 30분은 기본으로 취재를 해야 해요. 그만큼 취재도 많이 하고 여러 번의 편집 과정을 거쳐서 그 1분이 나가요. 완성했을 때 뿌듯함과 성취감이 있어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느낌과 ‘내 취재를 방송으로 내보낼 수 있다. 누군가 나의 방송을 듣겠구나. 이 방송을 듣고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방송을 흘려들어서 섭섭하지 않냐 질문하셨는데, 들으시는 분들은 들으시더라고요. 수많은 사람들이 다 흘려들어도 한 사람이라도 방송을 듣고 마음에 울림이 있거나 생각에 변화가 생기거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한 명의 콘텐츠 소비자로서 여러 방송을 보면 그 뒷이야기를 생각하게 될 것 같아요.
곽 : 네. 명절 새벽 대여섯 시에 라디오를 틀어서 나오는 목소리를 듣다 보면 ‘이 시간에도 열심히 일하는구나. 쉬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죠. 그리고 저도 그렇게 쉬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고. 저에게는 ‘일상’ 같다는 생각이에요.
이렇게 힘들게 일하다 보면 그만두고 싶었을 때가 있었을 것 같아요.
곽 : 네. 수없이 많죠. 대구에서 일을 그만두고 올라왔을 때도 ‘절대 취재는 다시 안 할 거야’라고 다짐했었죠.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어요. 직접 현장에 찾아가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춥고. 인터뷰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거든요. 섭외부터 쉽지 않을 때가 많고. 섭외 요청을 하는 사람마다 인터뷰를 못하겠다고 거절하실 때는 ‘아, 정말 어떻게 해야 되나’ 싶죠. 하루에도 수백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해요(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완성한 취재물이 나갔을 때의 그 뿌듯함. 이것 하나 때문에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일을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때군요.
곽 : 네 맞아요.
인색(人色)한 리포터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 본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허가를 받아 작성한 게시물이며 본 글의 저작권은 게시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인색(人色)한 리포터의 '컬러테라피 상담'은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결제 가능합니다.
>> 컬러테라피 상담(개인, 커플, 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