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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Jul 14. 2023

어느 날 쾅 와닿는 감동

별명이 사군자인 아기에 대하여

  만 열두 살 아기의 별명이 사대부다. 가끔 그런 친구들이 있다. 아이돌도 전혀 모르고, 요즘 무슨 옷, 무슨 드라마가 유행하는지도 전혀 모르는. 쇼츠와 릴스가 뭔지 모르는데, 유럽 중세의 종교개혁과 조선의 역성혁명에 대해서는 줄줄줄 읊을 수 있는. 친구들의 기절할 것 같다는 반응에 처음에는 아기도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는데, 이제 우리 모두 즐긴다. 이 아이는 사대부인걸! (90년대로 회귀한 아이들도 있다. 서태지를 제일 좋아하고 블랙핑크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들은 정말 알 수 없다.)


  그런데 정말로 사군자였나 보다. 어느 날, 아래층 선생님한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쌤, 그거 아세요?"

  "머를여?"

  "OO이요."

  "네, 우리 OO이!"

  "토요일 수업하는 날마다 저희 방 내려와서 인사하고 가요."

  "... 쌤한테요?"

  "네, 저한테 맨날 인사하고 가요. 수업 안 끝났으면 창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니까요. 오늘 수업 뭐 했는지도 말해주고. 저 썜이 수업에서 뭐라고 했는지 다 알아요~"


  주책맞게 눈물이 나려고 했다. 아기가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너를 만난 지 고작 일 년도 안 되었고, 일주일에 두 시간 반 만났는데. 우리는 논술학원에서 수업하고 글 쓰고 빠이빠이하는 것만 했는데 너는 언제 이렇게 자라서 어른한테 인사를 드리고 갈까. 물론 아기들이 익숙한 선생님을 뵙고, 다정한 얼굴을 마주하고는 오늘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너는 언제 이렇게 다정한 사람으로 자라났을까. 원래부터 다정한 사람이었을까. 네가 자라온 환경에 항상 따뜻함이 존재했을까. 


  조그마한 키에 조그마한 덩치, 민감한 성격에 사춘기가 더해져 세상이 삐딱해 보일 OO이. 아가야, 네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 그리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잘 받는 네가 격동의 열두 살을 지나 보내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사람 같아서.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쌤은 그게 참 다행이야.


  며칠 전에 아기의 어머님을 만나 뵈었다. 설명회 때 오셨는데, 사실 우리 학원을 그만둘지 오랫동안 고민하고 계셨다. 미련을 갖지 않고, 아니, 약간만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님, 아들을 너무 잘 키우셨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작년에 수업했던 남자 선생님 아시죠. 네. 우리 OO이가 수업 오는 날마다 그 선생님 반에 찾아가서, 심지어 다른 층인데, 내려가가지고는 인사드리고 간대요. 수업 안 끝났으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인사를 드리고 간대요. 그 얘기를 듣는데 세상에, 제가 눈물이 날려고 해가지고... 어머님, 어떻게 이렇게 아들을 키우셨어요...

  

  그러다 같이 눈물파티를 했다. 어머님도 우시면서 가슴에 두 손바닥을 모아 꾹 눌렀다 뗐다 하셨다. 우리 OO이는 정말 좋은 어른이 될 거예요. 그렇게 말씀드렸다. 어머님, 고등학교고 대학교고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요. 우리 OO이는... 정말로 좋은 어른이 될 거예요. 진짜로요. 많이 보살펴주세요.


  다정하고 행복하게 자라나서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사람. OO아,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오늘도 너를 보면서 배우네. 쌤도 세상에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내 안에 상처와 목마름이 너무 커서 그게 잘 안 되더라고. 가끔 널 보면서, 스스로에게 혹독한 아기들이 어떻게 하면 더 마음 편하게 자랄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더라. 열두 살, 열세 살 그때는 정말 세상이 어렵잖아. 공부도 어렵고, 학원도 많고, 해야 하는 것도 많은데 해도 잘 안 되고, 모르는 것투성이고. 선생님도 아직 초짜라서, 너네가 시험 점수 보고 화내고 그러면 마음이 쿵 내려앉고 그래. 그러면서 항상 생각하지. 우리 아기들, 다 자기를 사랑하는 어른으로 자라야 하는데, 내가 쪼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겠지, 하고.


  네가 주변을 살피는 만큼 너 자신에게도 다정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상처받고 실패하겠지만, 수많은 실패가 너에게는 그저 딛고 일어날 발판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을 향한 너의 다정함이 너의 상처와 실패까지도 감싸 안아주기를. 그런 어른이 되기를 바라. 선생님이 정말... 너무너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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