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금'뺏찌' 라이프 1/5

그 정도의 지조만 지켜줘도 이 세상은 조금식 발전할 수 있겠다

by 밍경 emb
들어가기 전

사람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굵직한 정치적 사건은 최대한 언급을 자제했습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글을 조각하지 않았습니다. 직관적으로 떠오른 생각과 감정을 최대한 살려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글을 읽는 데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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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은 담배를 꽤나 좋아했다.


L은 의원회관 자기 방에서도 담배를 피웠다. 물론 회관은 공공연한 금연 장소였다.

그러나 의원회관은 한 명 한 명이 '사장'이라 불리는 배지들만의 공간이다. 이래저래 묵인이 될 수밖에 없다.


L은 담배를 태울 줄 아는 기자가 잠시 들리거나 인터뷰를 오면 집무실에 재떨이를 가져오라 했다. L과 손님은 함께 줄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눴고, 방은 금새 뿌얘졌다.


나쁘게 보이진 않았다. 나는 담배연기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다.

사실 L의 이미지랑 담배는 참 잘 어울렸다. L이 연초담배를 태우는 모습은, 고민 많은 엘리트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L은 실제로 엘리트였다. 국회에 입성하기 전에도 그랬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나왔다. 해외 상위급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연구원을 거쳐 교수로 있다가 전문가 할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러니까 L에게는 소위 '정치 낭인' 이라 불릴 만한 시기가 없었다.


다만 L에게도 고난과 시련은 있었는데, 역설적이게도 L은 그 고난과 시련으로 대중인지도를 쌓아올린 경우였다. 샌님 연구자같던 사람이 권력에 반기를 들고 아웃사이더가 된 이야기는 그 자체로 그림이 됐다. 잔인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흥미를 느꼈다.


L 본인도 메인스트림이 아닌 위치를 받아들이려 하는 듯 하지만, 어째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그러니까 아웃사이더가 된 L의 상황과 달리 L의 행동은 여전히 인사이더 엘리트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L이 반기를 들고 싶어서 든 게 아니라 반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쑥덕거렸다.



L을 보다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L은 천성적으로 사람을 잘 리드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L의 보좌관은 공석이었다. 오래 일한 보좌진들이 있었는데, 정작 보좌진으로 승진은 안 됐다. 내밀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근본적으론 L이 너무 '잘나서' 라 했다. 보좌진이 하느니 내가 전부 하겠다는 마인드라던데, 최악의 상사는 아닐지라도 바람직한 상사의 모습은 아니었다.


국회 보좌진은 공무원식 관료제 조직이라 보긴 어렵다. 성과를 인정받지 못하는 조직원은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는 구조인데, L은 아랫사람들에게 뿌듯함을 채워주진 못 했다.


그리고 똑똑했던 L은 주변 사람들을 포용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내가 가는 길은 정도(正道)라는 생각이 강했다. 문제될 건 없다. 다만 L은 다른 사람이 L의 길을 조건 없이 따라오길 원했다. 그게 깨끗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강하니 두 가지 문제가 겹쳤다. 하나, L의 생각은 권력으로 쌈박질하는 정치권에선 먹히기 힘든 리더십이었다. 둘, L의 길이 '깨끗하다'는 보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밖에도 L에 대한 말은 많았다. 지역구 의원이지만 지역구 민생을 거의 챙기지 않았다. 물론 국회의원이 과도하게 지역구만 챙기는 것도 문제였다. 다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L은, 지역구를 챙기는 행동이 중앙 국회의원으로써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대의를 챙기면 지역이 어디든 지지는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요약하자면 L이 아웃사이더가 돼 추구하기 시작한 아름다운 꽃길은, 꽃길인 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경우 주변 사람들과의 협동을 해칠 정도로 지나쳤고, 이 나라는 아직 그런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 했기에, 결국 주변 사람들은 꽤 많이 떠나가버렸다.

사람으로 먹고 사는 정치인이 사람을 떠나보내는 형국이 되어버린건데, 이게 혁신인지 혹은 리더십의 부족인지 나는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바깥생활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L은 이제서야 엘리트 이미지를 한꺼풀씩 벗겨나가고 있는 중이다.

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L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난다. 가장 낮은 기초단체 후보들의 개소식을 찾아다니며 사람들과의 접점을 늘리려 애쓴다.

마크맨(=담당 취재 기자)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전화도 잘 받았고, 안면 있던 사람이 정치부를 떠나게 되면 직접 전화를 해 격려를 하기도 했다.


결국 정치인으로써 인사이더가 되기 위한 중간과정일 것이다.

실제로 L은 많은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인사이더가 되고 싶은 마음은 본인이 내세운 대의명분과는 별개로 곳곳에서 묻어나왔고 사람들은 그걸 느꼈다.

그러니까 L의 "아웃사이더 되기" 행보는 "인사이더"로 가는 하나의 수단이지만, 당하는 나는 솔직히 말해 그 변화가 나쁘게만 보이진 않는다.

최소한 타성에 젖어 꽃길과 진흙길을 구분조차 하지 않으려는 다른 사람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정치인이 그 정도의 지조만 지켜줘도 이 세상은 조금식 발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도 L은 담배를 태운다.

며칠 전 담배를 피우는 L의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 과거 그가 가지고 있던 엘리트스러운 이미지가 확실히 사라진 듯해 나는 조금 놀랐다.

L은 힘들어 보였고, 여전히 주변 사람들은 L 특유의 강성적인 리더십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래도 누군가는 여전히 L의 주변을 맴돈다. 적어도 경계를 해메보려는 시도하는 그의 모습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있다는 뜻일 테다.


언젠가 정말로 L이 인사이더가 된다면, 아웃사이더 L이 담배를 피우며 했을 고민을 놓지 않았으면 하고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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