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원내대표 선거보다 내 관심을 끌었던 건 원내대표를 뽑는 과정의 분위기였다.
여느 지도부 선출이 그렇듯 지도부를 뽑는 의원총회는 엄숙하게 시작됐다. 2파전의 선거는 먼저 한 시간 가량의 엄숙한 토론회로 시작됐다. 그 다음 26명의 엄숙한 참석 의원들은 엄숙하게 줄을 서 엄숙하게 투표를 했다.
구멍가게만한 정당은 눈 깜짝할 사이 투표를 마쳤다. 개표위원들은 엄숙하게 개표함을 열었다. 엄숙하게 종이를 세는데, 엄숙하던 장소에서 뭔가 요상한 기운이 흘렀다.
웅성거림과 허탈한 웃음, 급하게 선거대책위원장을 찾는 소리, 옆에서 크흐흡 웃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선대위원장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
마이크를 잡은 선대위원장은 본인도 황당하다는 듯 말을 시작했다.
"국회 사무처에서 받아온 잉크로 투표를 했는데, 접는 순간 많이 번졌어요. 육안으로 보기에 어떤 건지 구분이 가긴 하는데, 그래도 한 표가 승패를 가르는 원내대표 선거잖아요. 서로 용인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문제 남기기보다는 선거 다시 할게요. 이번에는 볼펜으로 번지지 않게 찍어서!"
기자들 사이에서도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당장 속보를 쳐야 하는 일부 사람들도 마찬가지었다. 그들 입장에선 재투표가 황당할 따름이지만, 웃긴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투표함이 오가고 난리 법석이 시작됐다. 당연히 객식구들도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 사이에 오간 대화가 너무나도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 재투표 발표 후
@A 의원
=언론인들 너무 많이 기다리시는데 ㅎㅎㅎ 기자 여러분들 미안합니다 별일이 다 있네요
@B의원
=(씨익 웃으며) 이건 우리 잘못 아냐! 사무처 인주 잘못이야 알지?
@C의원
= 이번에는 개표 마무리될때까지 도망가지 말고 자리에서 개표 결과 좀 보고 가세요!
@D의원
= (다시 들어와서)어어 아유 이게 뭐야 이게 뭔일이야 (의원들 웃음)
@E의원
= D형, F 대표가 전화를 안 받아 어떻게 하지?
= A의원님, G의원님은 지금 반포래요
@A의원
= 아니 여기서 투표하고 언제 거기까지 가셨어(일동 웃음)
= (사진기자들에게) 앉아서 편하게 좀 쉬셔요. 좀 멀리까지 가셨어
떠나간 의원들(!)은 헐레벌떡 의원총회장으로 들어왔다. 앉아있던 의원들은 다시 돌아온 의원들에게 하나같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이하 당시 스케치를 가져오자면...
##지각자 1: H의원 들어오자
(박수 받으며 헐레벌떡 투표장으로 들어감)
@E의원
= H의원님! (뛰어들어가며) 볼펜으로 하세요 볼펜으로!!
@A의원
= ㅋㅋ 거기 그놈의 인주 좀 없애버리세요 ㅋㅋ
@E의원(투표 마치고)
= 이거 마지막에 내가 왔으니 내가 누구 찍은지 다 알거 아냐! 나 조금 이따 갈거야. 88 도로 타고 신나게 가다가 노량진 수산시장 걸려서 왓네 에이 참(일동 웃음)
##지각자 2: F대표 들어오자
(들어오자 박수, 진중해야 되는 F대표도 어이 없다는 듯이 웃음. 모두의 주목 받고 들어가서 엉거주춤 표 들고 나와서 투표함에 넣자 F대표와 친한 D의원 킬킬거리며 웃음)
##마지막 지각자 G의원 기다리면서
@A의원
=특정 후보에 대한 선호 표시는 볼펜으로 동그라미 해달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어떤 표시 하든 그 후보 칸 안에만 있으면 인정할게요.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a후보 x친걸 표 준 걸로 인정해야하냐. 저희 회의 결과는 어떤 형태든 그 후보 칸안에잇음 표 준 걸로 해석하겠다는 건데, 혹시 X표가 그 후보 싫다는 뜻이었으면 지금 다시 투표 하게 해줄게요 손 들어봐요!(일동 웃음)
@D의원
= 동수면 어떻게 하지?
@지각한 H의원
= 밤새서 재투표하는 거지 뭘(일동 웃음)
= G의원 엄청 늦을걸! 나도 거기서 왔는데 차가 아주 꽉 막혔어!
@A의원
= 정확히 어디서 오셨는데요
@H의원
= 안 가르쳐줄건데~(일동 웃음)
##지각자 3: G의원 들어오자
(들어오자 일동 박수)
@E의원
= 똥그라미 치세요 똥그라미, 볼펜으로!
@H의원
= 엑스표 쳐도 된대~(웃음)
대략 이런 대화가 오갔고, 아까처럼 투표는바람같이 짧게 마무리됐다.
예상했던 후보가 원내대표로 당선됐고, 소소하고 유쾌한 구멍가게식 선거는 마무리됐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현장이었다. 다만 이 유쾌한 선거에서 딱 한 가지 이상한 걸림돌이 목에 걸렸다.
넘어갈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나에게 그 상황은 이 당이 '안 풀리는' 이유를 보여주는 스냅샷처럼 느껴져셔 도무지 잊혀지지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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