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겨울-제주도

비행기표가 너무 싸니 무모한 여행을 감행할 용기가 필요했다.

by 밍경 emb

제주도행 비행기가 말도 안 되게 쌌다.

주말 하루에 평일 하루를 넣어 계산하면 유류할증료를 포함해 4만원 선.

코로나19는 원래 무섭지 않았으니 별 고민 없이 표를 샀다. 여행 일주일쯤 전이었다.



정오쯤 렌터카를 받았다.

쉐보레 말리부, 옵션이 부실하다 해도 이틀 동안 완전자차 3만원이면 괜찮은 가격이었다.

공항 근처를 벗어나는데 사방이 렌터카 업체였다. 사람이 없으니 노는 차들이 사방에 널렸다.

나중 이야기지만 공항으로 돌아갈 때 탄 택시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썩을 놈의 렌터카들이 제주도를 망친다"고.


밥부터 먹기로 했다. 지인이 유일하게 가고싶은 장소로 꼽은 우진해장국이 첫 식사장소였다.



하여튼 수요미식회는 망해야 한다. 280번대 대기번호를 받았는데 주인아주머니는 210번대 손님을 부르더라.

겨울 날씨 따듯하기로 유명한 제주도인데 내 여행 땐 칼바람이 몰아쳤다.

추위에 달달 떨며 렌터카 안에서 한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푹 풀어진 고사리는 되직한 추어탕 같았다. 맛은 훌륭했다만, 기다린 값을 전부 치렀는지는 모르겠다.

얼큰하게 술을 먹고 다음날 이곳에서 속을 달래던 동네 주민들만 불쌍했다.

숨겨진 단골집을 육지인들에게 빼앗긴 심정일 것 같았다.


역시 수요미식회는 망해야 한다.



밥을 먹고는 서귀포로 넘어갔다. 지인과 나 둘 다 커피중독자였기에 다음 장소는 이중섭거리 근처 유동커피가 됐다.

딱히 카페를 가려 했던 건 아니다. 다만 날씨가 끝내주게 안 좋았다.

제주에 머무른 이틀 동안 눈 비 우박 돌풍 그야말로 모든 날씨를 다 경험했다.


유동커피의 가성비는 여전히 좋았다. 지난번에 안 먹어봤던 송산동 커피를 골랐는데 이건 너무 달더라.

삼사십분쯤 앉아 있다가 나오는 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했다.

주말 오후였는데도 유동커피에는 자리가 남아 있었다. 썰렁한 제주도, 그 때 느꼈다.


분명 날씨가 안 좋았는데 왜 사진은...


관광지를 볼 염두가 안 나 예악해둔 숙소로 갔다.

이틀 제주도 여행의 야마를 잡으려면 난 주저하지 않고 숙소를 꼽겠다.

서귀포시 남원읍에 있는 미니 쇠소깍, 은퇴한 중장년 부부가 운영하는 산골짜기 에어비앤비다.

작년 여름 제주도 여행에서도 간절히 오고 싶은 곳이었다. 동행들의 의견이 맞지 않아 포기했는데, 그 때의 아쉬움이 너무 커서 이번에는 내가 밀어붙였다.


굽이굽이 시골길을 넘어가 만난 미니 쇠소깍.

결론부터 말하면 여태까지 묵었던 에어비앤비 중 가장 완벽했다.


귤과 편백향이 흐르는 미니 쇠소깍


용암계곡이 보이는 주차장 터를 지나면 귤나무가 반기는 입구가 나온다.

입구 계단을 올라 만난 작은 집, 뒤로는 귤밭이 펼쳐진다.

내가 원하던 여유로운 삶을 그대로 그려놓은 듯한 아름다움에 감탄만 나왔다.


관상은 살아온 삶의 반영이라는 말을 나는 믿는다.

체크인 전화를 받은 주인이 곧바로 집에서 나왔다. 반달 웃음 눈이 너무나도 친근한 5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사장님은 미니 쇠소깍 건물과 마당을 터놓은 바로 옆집에 살았다.

집을 디자인했다는 남편은 근처에서 따왔다며 큼직한 천혜양 하나를 건네주었다.



미니 쇠소깍의 부엌 풍경. 뒤로 온통 귤밭이 가득하다.

화장실 창문도 귤밭을 향해 있기에 샤워하면서도 귤나무의 푸르름과 함께 할 수 있다.

사장님이 갓 따왔다는 프리지아 향이 편백나무 냄새와 얽혔다.



정원에도 세심함이 한가득 녹아있었다.

가져간 단렌즈가 열심히 일했다.




좀 다른 이야기인데, 이번 여행에선 번들렌즈를 빼고 캐논 40mm짜리 단렌즈만 하나 챙겼다.

아무리 크롭바디라고 해도 카메라가 무거우니 잘 가지고다니지를 않더라.

미러리스는 싫기에 단렌즈에 적응이나 해보자고 했다.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f2.8의 조리개가 아쉬워서 여행을 마친 뒤 그 유명한 캐논 신쩜팔(50mm f1.8)을 과감히 질렀다.

얼마나 더 즐거운 사진을 찍게 해줄까.



지인의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 감탄을 멈추고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다시 차를 타고 흑돼지를 먹으러 갔는데, 흑돼지가 너무 맛있어서 정작 DSLR로 사진 찍을 생각은 못 했다.

그 맛있는 흑돼지는 중문색달해변 근처에 있는 목포고을이라는 집이니, 혹시라도 제주도 가실 분들은 꼭 가보시길.

100그램당 만원이라는 좀 비싼 가격이긴 하지만 돼지고기 바베큐의 신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참고로 저 곳은 작년 여름에 현지인 추천으로 찾아갔다가 그 맛을 잊지 못해, 이틀 짧은 여행 중에도 바득바득 찾아간 식당이다.


어쩌다보니 식도락 여행이 됐다.

돼지고기를 먹었으니 이제는 술을 먹어야지! 란 지인의 미친 패기에 휩쓸려 해산물을 사러 갔다.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던 딱새우 대신 우리는 부채새우라는 걸 골랐다.

늦겨울이 제철이라는데 솔직히 처음 봤다. 먹어본 적 없는 벌레들이 수조를 돌아다니더라.

부채새우의 다리를 무심히 쳐내며 몸통 살을 발라내던 사장님은 맛있을 테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열몇 마리에 5만원을 내고 포장해 왔다.


숙소로 돌아오고 나서야 술상을 차렸다.

지인이 윗사람한테 받아 왔다며 브랜디 한 병을 꺼냈다. 궁합이 나쁘지 않았다.


랍스터의 탱글함과 새우의 눅진함을 같이 품었던 부채새우


두어 시간 부채새우 안주 하나로 술을 마셨다.

남은 새우 껍데기는 잘 씻은 뒤 국물을 냈다. 게향 가득한 해산물 라면이 별게 아니었다.



자정이 넘으니 동행은 잠이 쏟아진다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새벽형 인간이 체질이라 밖으로 나갔다.

쌓일듯 안쌓일듯, 밤가루처럼 함박눈이 쏟아졌다.

춥지 않은 날씨에 창문을 열고 잔뜩 눈을 구경하다 잠들었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로 루이보스차를 마셨다.


늦게 잤는데 일찍 눈이 떠졌다.

얼굴만 대충 씻고 아침 산책을 나섰다.

눈이 조금 그쳐서 뒷산 귤밭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귤밭으로 가는 길


아직도 포슬포슬 잔눈이 내렸다.

반팔에 윗옷만 걸쳤는데도 춥지는 않았다.



뒷산 귤밭은 미니 쇠소깍 주인의 소유가 아니라 했다.

담장이 따로 없어 길을 따라 귤밭에 들어갔다.



수확을 마친 귤밭, 거른 귤들만 땅에 널려 있었다.

만져봤는데 상한 겉모습과 달리 속살은 탱글거렸고 귤향이 진했다.

버려져 있든 나무에 달려있든 내 것은 아니었기에 가져가지도 맛보지도 않았다.






유일하게 말라붙어있던 나무에만 잔뜩 귤이 붙어 있었다


미니 쇠소깍에서는 추가 금액을 내면 아침을 제공해준다.

주인 아주머니가 재료에 따라 전복죽에 옥돔구이, 해물뚝배기 등을 정성껏 차려낸단다.

메뉴 자체도 매력적인데 평가조차 좋으니 선택할 수밖에 없다.


아침이 나온다는 9시경, 미끄러지듯 숙소로 돌아왔다.



함바구니를 지고 온 아주머니가 반찬을 하나둘 꺼냈다.

오늘 메뉴는 해물뚝배기였다. 된장국물이 포근했다.

전복이 세 개에 딱새우가 두 개, 꽃게가 한 마리에다가 미더덕과 조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직접 담은 김치와 기름 발라 구웠다는 김, 오늘 아침 나온 유정란으로 만든 계란찜이 곁들여졌다.

숙소에 있던 목재 아날로그 스피커로 음악을 들으며 아침을 먹었다.


후식으로 나온 한라봉 주스도 직접 짰다고 한다


11시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옆집에 찾아가 인사를 드린 뒤 미니쇠소깍을 떠났다.

발걸음이 그렇게나 안 떨어지는 숙소도 처음이었다.


귤보다는 못하지만 동백도 자주 보인다

또 밥을 먹기에는 시간이 워낙 애매했던 터라 근처 카페로 갔다.

네이처캔버스라는 카페가 근처에 있었다.

구글 맵 평점이 나쁘지 않아 갔는데 인스타그램에서는 제주를 담아낸 예쁜 카페로 유명하더라.


주차장이 마땅치 않아 전화해 봤더니 갓길에 대놔도 견인해가지 않는다며 편하게 들어오라는 답이 돌아왔다.

신기한 동네다.




카페에는 마스코트같은 반려견 '몬딱'이가 산다. 종이접기로 만든 몬딱이.


귤을 주제로 만든 메뉴들이 카페에는 가득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려진 타르트와 에이드를 주문했다.

데코레이션이 나무랄 데 없었다. 맛은 상상 가능한 정도였다.



제주 여행의 주제가 숙소였다면 신스틸러는 예상하지도 않던 아나고구이(바다장어구이)였다.

제주도에서 몇 달을 살던 친구가 절대 알려주지 말라며 신신당부한 휴게음식점.

현무암 절벽을 끼고 있는 허름한 집에서 주인 사장은 싱싱한 제주 자연산 아나고를 손질했고, 아내는 숯에 불을 올려 간소한 창을 차렸다.

두 사람 다 말은 없었고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게 옳은 곳이라 전혀 불만은 없었다.


풍경이 미쳤다


이 날도 제주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저 맑은 하늘이 5분도 안 돼 눈보라로 바뀌었다. 순간의 찰나에 찍은 사진.

누군가는 이 장어구이가 쉽게 물린다고 하는데, 나와 지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싱싱한 장어에 소금을 쳐 숯불에 구웠는데 어떻게 물릴 수가 있을까.

최소 주문단위 1키로를 다 먹을 수 있을까, 란 걱정이 무색하게 전부 먹어치웠다.

풍경만 봐도 배가 불렀지만서도.


술은 팔지 않아 어제 먹다 남은 맥주 두 캔을 꺼냈다.

운전하지 않는 사람만 마셨다.


음식점 문 밖을 나서면 보이는 풍경


3시쯤 식사를 마치고 값을 치렀다.

주인 부부는 우리가 떠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사를 정리했다.

참고로 이 곳의 운영 시간은 11시부터 4시까지였다.


사장님이 떠난 바다 풍경을 조금 더 즐겼다.

술을 팔지 않는 음식점 앞에 술병이 저렇게나 쌓였다.

술을 곁들일 수밖에 없는 음식이니까 이해했다.




날씨가 갠 줄 알고 낚시를 나왔던 아저씨는 촬영 1분 후 몸도 잘 가누지 못한 채 후퇴했다


식사를 마친 뒤 고민을 하다 제주시로 다시 넘어갔다.

그 때쯤엔 날씨가 너무 나빠져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었다.


우박이 떨어지는 한라산 언저리를 블랙아이스에 덜덜 떨며 넘어갔다.

애월읍 근처에서는 카페에 들렀는데, 태풍을 방불케 하는 날이라 사진은 못 찍었다.


비행기 탑승 2시간 전 렌터카를 반납한 뒤 마지막 저녁을 먹으러 갔다.

원래는 친구가 추천한 물항식당을 가려 했는데, 내부 공사로 일주일 동안 문을 닫는다 해 근처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다. 속초식당이었나?

삼만 오천원짜리 고등어회가 방어만큼이나 기름이 차 뜻밖의 훌륭한 만찬이 됐다.

40분만에 소주 두 병을 비웠다.

같이 갔던 지인은 이 날 먹은 고등어가 인생 최고의 회였다고까지 말했다.


DSLR 배터리가 없어서 휴대전화로 찍었다


삶이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만 하더라.

그러다보니 가끔, 비행기표가 너무 싸서 무모한 여행을 감행할 용기도 조미료처럼 필요했다.

날씨가 돕지 않아 볼거리라곤 찾아가지 못했지만 이틀을 꼬박 즐거움으로 채웠다.

괜찮은 나들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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