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첫 시험을 치르고
사람들은 시험이 끝나면 항상 다짐한다.
"다음 시험은 벼락치기 안 하고, 미리 공부해야지..."
하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항상 그때의 후회와 다짐을 잊고 다음 시험을 맞이한다.
이번 중간고사도 벼락치기 중인 나처럼 말이다.
시험 볼 때마다 벼락치기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벼락치기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보통 시험 하루 전쯤 되면
심각성을 느끼고 밤새워 공부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데 난 너무 거대한 벽이 느껴지면 좌절하고 손을 놓아버렸다.
(회피형 인간 + 게으름 만렙 )
조금 하다가 포기하고 잠이나 잔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나는 한 번도 시험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비싼 등록금 내고 남들 졸업할 늦은 나이에 대학까지 왔는데,
똑같이 한심하게 살면 그게 인간인가...
이번에는 벼락치기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나의 장점 하나를 꼽자면, 그나마 자기 객관화는 된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된 걸까.
내가 집에서도 집중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첫 시험이 목요일이라, 하루 전인 수요일은 공강이었고
낮부터 공부할 수 있었다.
오후 1시, 나는 스터디카페로 향했다.
첫날 시험 과목은 '프랑스 문화의 이해'와 '선형대수'였다.
수학은 벼락치기가 안 되는 과목이니까, 선형대수만큼은 미리미리 공부를 해뒀다.
(아무리 한심해도 나도 사람이긴 한가 보다.)
교양 한 과목만 올인해서 공부하면 되는 상황.
그런데 정리도 안 된 과목을 들여다보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동안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아무런 계획 없이 공부를 시작했다가, 또 좌절하는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느슨해지는 걸 막기 위해 짧은 단위로 시간표를 짜기 시작했다.
강의평에는 수업자료만 달달 외워도 점수는 잘 나온다고 했지만,
교과서 세 번은 돌려봐야 암기할 것들이 머리에 들어올 것 같았다.
그래서 3 회독 계획을 세웠다.
스터디카페에 도착해서 선형대수를 보고
금요일에 볼 '독일 문화의 이해'도 대충 훑어봤다.
그러고 나서 프문이를 시작하려는데,
시계는 이미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부터 새벽 5시까지만 공부하자.'
프문이는 강의를 들을 때마다 정말 재미없다고 느꼈던 과목이다.
애초에 프랑스에 큰 관심도 없었고,
들을 만한 교양도 마땅치 않아서 그나마 덜 지루해 보이는 문화 관련 과목을 고른 것뿐이었다.
그런데 교수님의 강의가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전달력도 부족하고, 집중이 어려워서
수업 내내 지루함과 싸워야 했다.
그래서 이 과목은 그냥 버릴까도 했지만,
공부는 지지리도 안 하면서 학점 내기를 몇 개나 걸어둔 상태였다. ^^
울며 겨자 먹기로 교과서와 강의자료를 열심히 읽었다.
그냥 읽고, 밑줄 치면서 읽고, 형관펜으로 칠하며 읽고...
계획대로 총 3 회독을 하며 개념을 정리했다.
수업이 지루했어도 귀는 반쯤 열러 있던 모양이다.
안 들어온 줄 알았던 내용들이 조금이나마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꽤 도움이 됐다.
놀라웠던 건
평소 집중력은 20분을 채 못 가는데,
이날은 무려 7~8시간을 내리 집중했다는 거다.
원래도 새벽에 눈을 반짝이는 올빼미 타입이지만,
게으름뱅이 + ISTP인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타들어가야만 겨우 뭘 좀 하는 인간인 모양이다.
대부분 시간표에서 크게 안 밀리고 공부했는데,
막바지엔 인내심이 바닥나서 5, 6, 7단원은 1 회독만 하고 남은 시간은 전부 암기에 썼다.
내 딴에는 열심히 외웠는데, 밤새 공부하니 머리에 안 붙었다.
결국 새벽 5시보다 1시간 40분이 더 밀려 6시 40분에 마무리했다.
중간에 밥도 먹었지만, 대충 스터디카페에서 17시간쯤 공부한 셈이었다.
이렇게 오래 공부한 것도,
밤새도록 포기 안 한 것도 처음이라 꽤 뿌듯했다.
무엇보다 공부가 잘됐다는 확신이 들었서,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프문이 시험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금은 자야겠다 싶어 바로 집에 가 두 시간쯤 눈을 붙인 뒤 학교로 향했다.
나는 잠을 최소 8시간 자야 한다.
아무도 안 깨우면 12시간도 거뜬히 잔다.
근데 두 시간 자고 일어나니, 뇌가 버퍼링 걸린 듯 멍했다.
프문이 시험이 시작되자 나는 막힘없이 문제를 풀었다.
딱 두 문제 빼고.
하나는 틀린 부분을 찾는 문제였다.
여러 번 본 내용이라 절대 모를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전부 맞아 보였다.
다른 하나는, 공부할 때 '이건 안 나오겠지'하고 정리에서 뺐던 부분이라
그냥 깔끔하게 포기했다. ㅎㅎ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러봐도 답이 안 나와서
포기하고 시험지를 내고 나왔다.
마침 팀플 같이 했던 팀원도 막 나오는 길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문제 답을 물어봤는데,
충격.
'답이 십자군 전쟁이라니.'
백년전쟁을 십자군 전쟁으로 고치면 되는 거였는데,
내가 이걸 왜 몰랐지?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시험 볼 땐 너무 자연스럽게 보여서 눈치도 못 챘다.
아무래도 뇌가 멍한 상태가 맞는 것 같다.
아쉽긴 했지만 후련함이 더 컸다.
금요일 시험까지 치르고,
지금 토요일 새벽에 글을 쓰고 있다.
아직 월요일 시험도 남아 있고,
일요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중간고사 대체 과제도 있다.
솔직히 지금 글 쓰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이틀 밤을 꼬박 새우고 나니까 잠깐 쉬고 싶어서
그냥 내 얘기를 정리해 본다.
다들 대학 가면 1학년 땐 놀아야 한다던데,
언제 놀라는 건지? 놀 시간이 없구먼...
그래도 오랜만에 뭔가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니까,
'대학 오길 잘했네' 싶었다.
회사 다닐 때 이런 감정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빨리 코딩 과제도 해야 하고, 오전에 알바도 있어서
이쯤에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기회 되면 나머지 시험 후기도 꼭 써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