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눈물이 마른자리엔 8화
희주에게 불행의 시작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인 희주는 점심시간에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희주는 책상 위에 아영의 지갑이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학교에서 무리 지어 다니는 소위 일진 중의 리더 격인 아영이다. 평소 학생답지 않게 비싼 물건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아영은 지갑 하나도 명품을 들고 다니곤 했다. 희주가 호기심에 아영의 지갑을 들어 만져 본다.
“하~ 이 지갑, 백만 원도 넘는다고 하던데. 정말 예쁘긴 하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아영과 그 무리가 들어온 것은.
그날 이후부터 희주에게 학교는 지옥이 되었다. 희주가 잠시 지갑을 만져본 일은 어느새 지갑을 훔친 일로, 그리고 그 지갑에는 희주가 보지도 못했던 백만 원이 들어있었다는 것으로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처음에는 용돈을 모아서, 그다음에는 참고서를 산다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해서 받은 돈을 갖다 바쳤다. 하지만 아영과 그 친구들의 요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희주는 어젯밤 아빠 지갑에서 몰래 훔친 돈 이십만 원을 가지고 학교에 왔다. 이제 이 돈이면 아영의 지갑에 있었다는, 만져보지도 못한 그 백만 원의 남은 금액을 맞춰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영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희주 넌, 이자라는 개념은 아직 모르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끝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지옥의 새로운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낮에는 학교에서 종일 아영이 무리의 장난감이 된 희주는 학교가 끝나면 다시 아영의 무리에 이끌려 낯선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곤 했다.
아영의 무리는 학교가 끝나면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던 남자친구들과 얼울려 그들만의 아지트에 모여 시간을 보내곤 했다. 주로 변두리에 있는 노래방이나 허름한 술집이었다. 거기에 모인 아영의 일행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버려진 인형처럼 구석에 박혀있던 희주는 술에 취한 남학생들에게 희롱이나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빨리 술 안 사 올 거야? 이게 좀 잘해줬더니 이제 배가 불렀나!”
아영이 희주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희주의 볼이 새빨갛게 부풀어 오른다. 옆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던 남학생이 킬킬대며 희주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근처 편의점으로 간 희주가 냉장고 앞으로 가 음료수를 고르는 척을 한다. 주인의 눈치를 보던 희주가 냉장고에서 소주 두 병을 집어 냅다 뛰기 시작한다. 등 뒤에서 주인의 성난 목소리가 들리지만, 희주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희주에겐 이 술 두 병이면 오늘 하루는 친구들에게 맞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뿐이다.
담배 냄새가 찌든 허름한 노래방이었다. 그날도 술에 취한 아영의 무리는 희주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영과 친구들이 킬킬대더니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하나둘씩 방을 빠져나간 후, 이제 방에 남은 것은 희주와 거칠기로 소문난 덩치 큰 종욱뿐이다. 술에 취한 종욱이 늑대 같은 웃음을 지으며 희주에게 다가온다.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희주가 뒷걸음을 쳐보지만 종욱은 거칠게 희주의 손을 잡아챈다. 겁에 질린 희주가 소리를 질러보지만 돌아오는 건 밖에 있는 친구들의 웃음소리뿐이다. 종욱에게 눌려 바닥에 깔린 희주가 주변을 더듬거리다 손에 잡히는 무엇인가를 잡아 종욱에게 힘껏 휘두른다.
‘퍽’
종욱의 짧은 비명에 눈을 떠보니 종욱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소파 아래 쓰러져 있었다. 희주의 손에는 깨지고 반쯤 남은 맥주병이 쥐어져 있다. 정신을 차린 희주가 노래방의 문을 열고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로 친구들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희주에겐 지금 그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죽을 거란 생각뿐이다.
다음 날 새벽, 희주는 몇 가지 짐을 챙겨 집을 나왔다. 이제 다시는 학교와 집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무리에게 잡히면 이번에는 정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는 희주에게, 가출은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집 밖의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거리에는 아영의 무리보다 더 거친 아이들이 있었고, 그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들어간 가출팸에서는 그 대가로 더 무리한 일을 요구받곤 했다. 지옥 같던 하루가 쌓여 이 년이 지나 희주는 이제 미성년자라는 딱지를 떼게 됐다. 희주는 같은 가출팸의 친구인 자영과 함께 그곳을 떠나 이곳 행복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어른이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부푼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희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종일 돌아다녀 봐도 고등학교 중퇴인 희주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얼마 전까지 돈을 벌기 위해 나이를 속이고 나갔던 노래방이나 가요주점의 도우미 일밖에 없었다. 밤의 거리가 희주에게 요구하는 것은, 희주의 젊음과 웃음밖에 없었다. 그렇게 희주는 다시 그런 생활에 젖어들게 됐다.
희주가 술에 취한 남자에게 얻어맞은 후, 일주일째 방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며 눈가의 멍을 바라본다. 자세히 보니 이제 좀 흐려진 것 같은 멍 자국은 화장을 좀 진하게 하면 가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때 희주의 핸드폰이 울린다. 친구 자영이다.
“희주야, 오늘 가게에 사람이 좀 모자라서 그런데, 너 나올 수 있어?”
“나 아직 멍든 거, 안 가셨는데.”
“마담 언니가 오늘 나오면 두 배로 쳐 준다고 했단 말이야.”
“두 배라고? 진짜야!”
전화를 끊은 희주가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시작한다. 어차피 어두운 노래방 안이니, 화장으로 가린 멍 자국쯤이야 그리 문제 될 것 같지 않다. 사실 일주일째 방에만 있었더니 몸도 근질거리고, 그 지겹던 술도 한잔 마시고 싶기도 하다. 희주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늘의 일자리인 행복 가요주점으로 나는 듯이 뛰어간다.
*
“형님 저 천식입니다.”
임경식 사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천식을 노려본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또 무슨 용건인데?”
비열한 웃음을 띤 천식이 임 사장에게 누런 종이 한 장을 내민다.
“이건 뭐야?”
“골드금융 장정휘를 잡을 수 있는 카드입니다.”
임 사장이 눈을 껌벅거린다. 종이에는 ‘채무자 장종오 신상파일’이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서류를 한참이나 보던 임 사장의 눈이 동그래진다. 임 사장의 눈치를 보던 천식이 말을 꺼낸다.
“뭐 좀 기억나는 거 있으십니까?”
임 사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 어, 기억나, 이 장종오라는 사람, 자기가 빌린 돈도 아닌데, 보증 선 친구 돈을 갚느라고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졸음운전으로 사망했을 거야. 가만있어봐라. 그럼 그 집에 있던 그 꼬마가 장정휘라는 건가?”
천식이 누런 이빨을 보이며 소름 끼치게 웃는다.
“제가 그 버릇없는 꼬마 놈 손 좀 봐주겠습니다.”
*
정휘가 행복동 언저리에 있는 한 카페로 들어간다. 창가 자리에 혼자 앉은 천식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오라고 한 거지?”
정휘가 천식 앞에 서서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천식이 입을 벌리고 웃는다.
“장 팀장, 뭐 바쁜 일 있어? 여기 좀 앉아. 그리고 커피도 한잔하고 말이야.”
시계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던 정휘가 천식 앞에 있는 소파에 앉는다.
“오 분 뒷면 나갈 거니까, 커피 주문은 필요 없을 거 같군. 빨리 용건이나 말해.”
천식이 어깨를 으쓱하며 거들먹거린다.
“근데 내가 생각해 보니, 장 팀장이 우리 스마일 금융에 갚을 돈이 좀 있더라구.”
정휘의 표정이 차갑게 변한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스마일 금융에 돈을 빌렸다고 하는 거야?”
천식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장 팀장이 돈을 빌린 건 아니야. 하지만 부모의 빚이 자식에게 물려진다는 것쯤은 장 팀장이 더 잘 알 거 아냐.”
천식이 품에서 꺼낸 누런 종이를 정휘에게 내민다. 영문도 모르는 정휘가 그 종이를 받아 읽어본다. 순간 정휘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서류는 정휘 아버지 채무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친구가 남긴 빚보증으로 시작된 정휘 집안의 몰락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서류다.
순간 정휘 머릿속에는, 집에 찾아온 사채업자가 집안의 물건을 부수고 아버지를 폭행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사람들을 말리던 어머니가 밀쳐 쓰러지는 장면, 정휘가 부른 경찰이 찾아왔지만, 그냥 다시 가버린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정휘의 손이 벌벌 떨리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서류의 가족관계란에는 정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정휘와 용휘의 이름까지 있다. 정휘 부모님 이름 옆 칸에는 사망이란 글자가 적혀있다. 종이 위의 숫자는 정휘의 아버지가 원금의 두 배를 갚았음에도 아직 빚이 남아있는 걸로 되어있다.
그간 잊고 있었던, 아니 잊고 싶었던, 잊으려고 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순간 정휘의 머릿속에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정휘의 집에 왔던 사람, 정휘의 아버지와 자신을 폭행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스마일 금융 임경식 사장이었다는 것도.
“어때, 이제 이해하겠지? 어떻게 부모님 빚은 장 팀장이 갚을 거야? 아님, 그 용휘라는 동생한테 받아낼까?”
순간 정휘가 일어나 천식을 향해 주먹을 날리지만, 이미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한 천식이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정휘의 주먹을 피한다. 천식이 눈짓하자 옆 테이블에 손님을 가장한 남자 둘이 일어나 숨겨놓은 야구 방망이로 정휘의 등을 가격한다.
‘퍼억’
“그렇지!”
천식이 감탄사를 내뱉는다. 사실 천식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근처 일대에서 주먹으로 정휘를 당할 사람은 없었다. 거기에 더해 항상 주의를 철저히 경계하는 정휘이기에, 평소에는 몰래 뒤에서 습격하기도 어려웠다. 지금처럼 큰 충격으로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야말로 정휘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긴 것이다.
야구 방망이를 맞고 쓰러진 정휘 위로 천식과 그 부하들의 무자비한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다. 바닥에 쓰러진 정휘는 이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몸만 꿈틀댄다.
“야! 이 새끼 잡아 병신 만들고, 저 빚은 그 동생 용휘 놈한테 달아놓자고.”
순간 정휘가 정신을 번뜩 차렸다. 용휘, 내 동생 용휘.
‘와장창’
요란하게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정휘의 동생인 승환이 온 것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것을 파악한 승환은 빈 유리잔을 던져 창문을 박살 내 천식 무리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는 바로 몸을 던져 정휘의 몸을 감싸 안는다. 정휘를 향한 주먹과 발이 이제 승환에게 향한다. 그 사이 정신을 차린 정휘가 승환과 함께 옆으로 빠져나간다.
주위를 둘러본 정휘가 상황을 파악하고 반격을 가할 채비를 한다. 승환이 정휘 옆에 나란히 선다. 정휘의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정휘가 승환이 건네주는 짧은 쇠 파이프를 들고 천천히 천식 패거리를 향해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