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팩
손바닥 안의 작은 따스함

인공눈물이 마른자리엔 9화

by 노리스 부인

“어! 어! 오지 마, 오지 말란 말이야.”


천식이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치다 소파에 걸려 넘어진다. 정휘가 천식을 향해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힘껏 내리친다. 천식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천식의 부하가 달려들지만 이번에는 정휘의 쇠파이프가 그 남자의 머리를 가격한다. 정휘의 공격에 바닥에 쓰러진 천식과 부하들은 이제 신음만 낼뿐이다. 정휘가 숨도 쉬지 않고 그들에게 미친듯이 발길질을 한다. 정휘의 머릿속에 아빠, 엄마, 그리고 어린 용휘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승환이 뒤에서 정휘의 양팔을 잡는다.


“형님 그만하세요. 이러다 사람 죽겠어요.”


숨을 몰아 쉰 정휘가 카페를 나간다. 정휘의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다. 정휘가 빠른 걸음으로 스마일 금융이 있는 철산동으로 간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들어서자 사무실을 지키는 건장한 덩치들이 정휘를 가로막는다.


“비켜, 임경식 만나러 왔으니, 잔챙이들은 비키란 말이야.”


한 덩치가 소리를 지르며 정휘에게 주먹을 휘둘러왔다. 정휘가 들고 있던 쇠파이프로 덩치의 옆구리를 가격한다. 덩치들은 처음에는 순서대로 나중에는 한꺼번에 정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덤비는 족족 정휘의 쇠파이프와 주먹에 맞아 나동그라질 뿐이다. 정휘가 스마일 금융 사무실로 들어간다. 안경을 쓴 고졸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임경식 어딨어!”


고졸이 뒷걸음질을 친다. 순간 고졸은 눈에 핏발이 선 정휘의 모습이 마치 저승의 야차 같다고 생각한다.


“사 사 사장님은 아까 나가셨습니다.”

“어디로!”

“모릅니다.”


정휘가 고졸 앞에 있는 모니터를 쇠파이프로 부숴버린다. 요란한 소리가 난다.


“임경식 어디 있냐고!”

“정말 모릅니다. 정말이에요.”


정휘의 쇠파이프가 사무실의 컴퓨터와 유리창, 가구까지 남아있는 게 없을 정도로 다 부숴버린다. 눈을 감은 고졸이 손으로 귀를 막고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 간다.



*



“내가 어떻게든 수습할 테니, 정휘 너는 당분간 밖으로 나오지 말고 집에 있어라.”


이틀 뒤, 행복동 골드금융 사무실에 정휘와 승환이 고개를 숙인 채 소파에 앉아있다. 정휘의 얼굴 여러 군데에 반창고가 붙어 있고 승환의 팔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다. 한수 사장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정휘를 위로한다.


“임경식 사장하고는 내가 잘 말해 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런데 정휘야,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천식이도 그렇고 어떻게 다섯 명이나 되는 놈들을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만들어 놨냐, 이거 일이 커지면 구속될 수도 있어.”


정휘가 고개를 숙인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장님.”


한수가 고개를 젓는다.


“승환이한테 자초지종은 들었다. 하여간 내가 잘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날 카페에서 정휘는 천식을 포함한 다섯 명의 조직원을 모두 두 달 이상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들어 놓았다. 거기에 철산동 스마일 금융 사무실도 완전 박살을 냈으니 임 사장 측에서는 난리가 났다. 미리 정휘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몸을 피한 임 사장은 한수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한수 사장은 스마일 금융 임경식 사장을 만나 이 일이 더 커지지 않도록 무마하려고 했다.


“미안한데, 다들 좀 나가줄래? 내가 정휘랑 단둘이 좀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래.”


사무실에 둘만 남자 한수가 정휘 옆으로 와 정휘의 손을 잡는다.


“정휘야, 너 이제 이 일 그만둬라.”


정휘가 놀란 눈으로 한수를 본다.


"사, 사장님. 그건..."

“그래, 나도 정휘 네가 없으면… 많이 외롭고 불편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너를 계속 이런 세계에 두고 싶지도 않은 게, 내 마음이다.”


한수가 정휘의 어깨를 두드린다.


“사실 네가 밤업소 봐주면서 번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 이자 대신 내주는 거, 알고 있었다. 사실… 사채업자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이야.”

“…… 알고 계셨어요?”


한수가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걸 어떻게 모르냐. 돈을 빌린 사람이 사채업자를 보면 숨거나 인상부터 써야 하는데, 여기 행복동에 있는 사람들은 정휘 너만 보면 따뜻한 눈으로 반가워하잖아.”


정휘가 밑으로 고개를 푹 숙인다.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냐. 단지, 네 여린 성격과 이 일은 잘 맞지 않는 거 같아서 그런다.”


한수가 정휘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정휘 너를 많이 좋아하거든.”


한수가 커피포트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차를 우린다.


“진즉부터 네가 여기 오래 있을 놈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사채 때문에 돌아가셨는데, 네가 이 일을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니.”


정휘가 목이 멘 소리로 더듬거리며 말을 꺼낸다.


“사장님, 저는, 그래도 사장님 곁에서…”


한수가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아니다. 정휘 너, 어려운 사람한테 돈 받으러 다닐 때마다 힘들어하는 거, 다 안다. 그리고 언제까지 네가 밤에 일해서 번 돈으로 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수가 인자한 웃음을 띤다.


“정휘 너 같이 마음이 여린 놈은 이런 독한 일에 안 어울리지. 요즘 젊은 애들 뭐 바리스타? 그 커피 자격증이라던가 그런 거 유망하다는데, 정휘 너도 그런 거나 한번 해봐라. 그 동안 동생이랑 사는 거는 내가 다 챙겨줄 테니 말이다.”


고개 숙인 정휘의 눈이 벌겋게 충혈된다. 한수가 뜨겁게 우린 차를 입으로 불며 천천히 한 모금을 마신다. 한참이 지나 한수가 어렵게 말을 꺼낸다.


“이제 이런 일로는 정휘 너를 다시 보지 않았으면 한다. 알겠지? … 그동안 고생했다.”


한수가 사무실에 정휘를 놔두고 일어서 밖으로 나간다. 문밖으로 나가는 한수의 등을 보는 정휘의 어깨가 흔들린다.


*


“안녕하세요. 오늘 밤, 여러분의 즐거움을 책임질 희주 인사드릴께여.”


희주가 애교 섞인 말투로 룸 안의 남자들에게 인사를 한다. 순간 희주는 가운데 앉은 남자가 유난히 자기를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 희주가 숨이 멎는 느낌을 받는다. 종욱이었다. 고등학생이던 희주가 집을 나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놈, 희주를 덮치려다, 희주가 병으로 머리를 내리친 그 놈, 종욱이 이 방에, 희주 앞에 앉아있는 것이다. 종욱이 희주를 노려본다.


“야, 음악 다 꺼.”


노래가 꺼진 룸에 정적이 감돈다.


"이게 누구야, 야, 너 오희주 아냐?"


종욱의 얼굴에 잔인한 웃음이 떠오른다.


“이거 오늘 뜻밖의 재미있는 걸 발견했네…”


*


딸랑


“안녕하세요. CS 24 편의점…”

“정휘 오빠 어딨어요?”


짙은 화장을 하고 가슴이 패인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들어와 다짜고짜 정휘를 찾는다.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고 심할 정도로 손을 벌벌 떨고 있다.


‘이건 또 뭐지? 요즘 왜 이리 정휘를 찾는 여자들이 많은 거야?’


하지만 지수는 그 여자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깨닫고, 바로 카운터 밖으로 나온다.


“저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정휘는 여기 없거든요.”


여자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긴 한숨이 터져 나온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지금 가지 않으면 희주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이번에 지수가 놀랄 차례였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희주라고요?”

“네, 희주요. 혹시 오희주 아세요?”


여자가 실낱같은 희망을 본 것처럼, 지수에게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한다. 여자의 이름은 자영, 희주와 같이 행복동에서 자취하는 친구라 했다. 한 시간 전, 한 무리의 남자 일행이 가요주점에 왔고 자영과 희주는 그 방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희주에게 그 방은 지옥이 됐다.


“그냥 술주정이나 희롱을 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 진짜 희주 죽을지도 몰라요.”


들어온 남자들은 희주를 고등학교 때 알던 사이라고 하며, 처음에는 주먹으로 툭툭 머리를 치더니, 술이 들어가자 이제 본격적으로 희주를 폭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럴 때, 정휘 오빠가 있어야 하는데..., 어디 갔는지 연락도 안 되고, 희주가 여기 물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지수는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지수도 정휘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신호만 가는 정휘의 전화기는 응답이 없었다. 지수의 놀란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한다.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듯이 눈이 건조해 지며 아파온다. 지수가 가지고 있던 인공눈물 하나를 열어 눈에 넣는다. 순간 눈이 맑아지며 가슴 속에 뜨거운 기운이 올라온다. 숨을 내쉰 지수가 주저 없이 카운터로 달려가 계산대 밑에 붙어 있는 빨간색 비상벨을 힘껏 누른다.


끼이익.

3분이 채 되기도 전에 편의점 문 앞에 순찰차가 도착하더니 경찰 정복을 입은 민규가 뛰어 들어온다.


“지수야, 무슨 일 있어?”


민규가 하얗게 질린 자영과 지수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같이 가줘야 할 곳이 있어.”


지수가 자영과 민규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나가 둘을 순찰차에 밀어 넣는다. 자영이 위치를 말하자 민규가 그곳을 향해 차를 돌린다.


*


“그러니까, 희주 이 년이 그때 내 머리를 병으로 때려서 내가 한 달 넘게 입원했다는 거 아냐. 그런데 이년은 그 다음날 내빼버리니, 난 치료비를 받을 데도 없었단 말이지.”


종욱이 옆에 앉은 희주의 머리채를 잡고 흔든다. 옆에 앉은 남자들이 재밌다는 듯 웃고 있다. 종욱이 갑자기 기분이 상한 듯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희주의 얼굴에 푸하고 뱉는다. 옆에 앉은 종욱의 친구들이 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아, 이 미친 새끼, 무슨 짓이야.”


희주가 일어나려 하지만 종욱에게 잡힌 몸은 꼼짝할 수가 없다. 종욱이 기분이 상한 듯 이번에는 사정없이 희주의 뺨을 후려친다. 바닥으로 쓰러진 희주가 신음을 내뱉으며 문 쪽으로 기어간다.


“미친 새끼라고? 그래 너 미친 새끼한테 한번 당해봐라. 그때 네가 나한테 한 만큼 갚아줄 테니.”


종욱이 맥주병을 들고 쓰러진 희주에게 다가가 손을 치켜든다. 순간 룸의 문이 열리고 민규와 지수, 자영이 들어온다.


“경찰입니다. 지금 모두 행동을 멈춰주시죠.”


난데없는 경찰의 등장에 룸 안에 정적이 감돈다. 종욱이 손에 쥐고 있던 맥주병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쓴다.


“아니 경찰이 뭐 이런 데까지 들어와서 간섭을 하나? 여기 아무 일 없으니 그만 나가 보시지.”


민규 뒤에 있던 지수와 자영이 뛰어 들어와 희주를 부축한다. 희주의 얼굴에 파란 멍이 들어 있고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다. 희주의 얼굴을 힐끗 바라본 종욱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이 년 전에 저년이 내 머리를 맥주병으로 갈겨 내가 입원까지 한 적이 있었거든. 그러니 체포하려면 희주 저년을 잡아가야지.”


멍과 피로 엉망인 희주의 얼굴을 보던 민규가 종욱의 팔을 잡아 거칠게 뒤로 꺾은 뒤, 허리에서 꺼낸 수갑을 채운다.


“지금 저 여성 분을 폭행한 현행범으로 긴급체포합니다. 서에 가서 이야기하시죠.”


민규에게 눌린 종욱이 몸부림을 치며 고함을 지른다.


“이거 뭐야, 경찰이 이래도 돼? 선량한 시민을 잡아가고 말이야. 야, 친구가 잡혀가는데 너네들은 가만히 있냐?”


종욱의 일행이 엉거주춤 일어나자 민규가 허리에 찬 테이저건을 꺼내 겨눈다.


“여기서 방해하시면 공무집행 방해죄로 처벌할 수도 있습니다.”


종욱의 친구들이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는다. 민규가 종욱의 등을 밀며 밖으로 나가며 지수에게 눈짓을 한다.


“난 이 사람 경찰서로 데려갈 테니, 지수랑 자영 씨는 희주 씨 좀 보살펴 줘.”



*



“아, 아, 아야.”


편의점 스탠드 의자에 앉은 희주가 신음 소리를 낸다. 지수가 얼굴에 난 상처에 소독을 하고 구급함에서 꺼낸 연고를 바른다. 그리고는 작은 밴드를 꺼내 희주의 얼굴에 붙여준다.


“아이, 오늘 일진 한번 더럽네.”


이제 조금 진정된 희주가 주위를 둘러보다 한숨을 쉰다.


“정휘 오빤 어쩌고 경찰이 와서…, 하~ 마담 언니에게 한 소리 듣겠네.”


자영이 희주에게 타박을 놓는다.


“야, 그래도 저 언니가 있어서 너 살아있는 줄 알아. 아까 방에 들어갔을 때, 그 남자가 맥주병으로 네 머리 때리려고 하더라. 그래도 이 언니가 경찰 불러서 산 거야. 나도 이 언니랑 같이 얼마나 뛰었던지.”


입을 삐죽이던 희주가 지수와 눈이 마주친다.


“얼마 전부터 내가 누군지 궁금했죠? 나 이런 애예요. 이게 내 본모습이라고."


희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다 신음을 낸다.


“아야, 긴장이 풀리니 더 아프네.”


희주가 지수에게 손을 흔든다.


“하여간, 오늘 일은 뭐, 고마워요. 그럼, 갈게요.”


얇은 원피스 하나만 걸친 희주가 문을 열고 겨울 새벽바람 속으로 걸어간다. 비틀거리며 걷는 희주의 맨살 위로 하얀 눈송이가 떨어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수가 문을 열고 그 뒤를 따라간다.


“저기 잠깐만요.”


지수가 희주의 손에 무엇인가를 쥐여준다.


“뭐예요?”

“추울 텐데 이거라도 들고 가요.”


지수가 희주에게 건넨 것은 핫팩이었다. 손으로 꽉 쥐자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 안으로 전해진다. 지수가 희주의 눈을 바라본다. 희주의 큰 눈에 눈물이 맺힌다.


“나, 한심해 보이죠?”

“……”

“나도 이런 내가 너무 싫거든!”


소리를 지르는 희주의 눈에 붉어진다. 지수가 희주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희주가 지수의 손을 뿌리치려 한다. 지수가 희주 어깨에 편의점에서 들고 온 작은 무릎담요를 덮어 준다. 때로는 말보다, 그저 따뜻함을 전해주는 게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8화추억이 아닌 아픈 기억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