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맛 우유
진짜보다 더 맛있는 가짜

인공눈물이 마른자리엔 10화

by 노리스 부인

지수와 정휘에게 그 일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났다. 그간 지수 주변 사람들에게 꽤 많은 변화가 생겼다.


먼저 골드금융에서 나온 정휘는 바리스타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지수는 정휘가 정장이 아닌 청바지를 입고 편의점에 나타났을 때도 놀랐지만, 책을 들고 도서관에 가서 바리스타 자격증 공부를 한다는 것이 정말로 믿어지지 않아 직접 정휘의 가방을 뒤져보려고 하기까지 했다. 지수의 성화에 정휘가 가방에서 꺼낸 책을 펼쳐 보여준다.


“커피학 개론? 정말 세상에 이런 학문이 있단 말이야?”


평소 입던 검은 정장을 벗고, 청바지와 패딩을 입은 정휘는 말투며, 눈빛도 전에 비해 한결 부드러워졌다. 항상 짓누르던 긴장감이 사라진 탓인지 정휘는 이제 자기 나이 또래의 얼굴과 표정을 찾은 듯하다. 정휘가 머리를 긁적인다.


“응, 정말 그런 과목이 있더라고, 나도 이번에 시험 준비하면서 처음 알았어.”


정휘가 준비하는 바리스타 시험은 커피학 개론 같은 필기시험과 커피를 내리는 추출 기법 그리고 커피를 예쁘게 만드는 라테 아트 같은 실기시험도 본다고 했다.


“와, 그러면 정휘 너, 나중에 커피전문점도 차릴 수 있겠네?”


정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아, 나, 용휘 밥 차려 줘야 한다. 그럼 또 보자.”


벽에 걸린 시계를 본 정휘가 가방을 메고 집으로 뛰어간다. 정휘를 배웅하러 잠시 밖으로 나갔던 지수의 눈에 반대편 골목에서 걸어오는 희주의 모습이 보인다. 희주를 본 지수의 머리가 벌써부터 지끈거린다.

그날 이후 편의점에 자주 들르던 희주는, 이제 거의 매일 지수가 일하는 시간에 편의점으로 출근하다시피 한다. 희주는 편의점에 오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 지수 옆 의자에 앉아 폐기로 나온 샌드위치나 김밥을 꺼내 먹으며 재잘거린다. 그렇게 매일 두 시간 이상 옆에 붙어 있는 희주에게 참다 못한 지수가 한마디를 빽 지른다.


“희주 넌 내가 편하니? 왜 매일 같이 와서 옆에 꼭 붙어 있는 건데!”


카운터 옆에 기대 샌드위치 껍질을 벗기던 희주가 당연하다는 듯 지수를 본다.


“아 당연히 지수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 편한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언니는 내가 세상 제일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을 때 내 모습을 봤으니…, 언니한테는 더 이상 창피할 일도, 부끄러울 일도 없지 뭐,”


지수는 능청스러운 희주의 대답에 말문이 막힌다. 희주가 거기에 한술 더 뜬다.


“하여간 나 언니 말 듣고 유흥업소 생활 청산했으니까, 다른 일자리 구할 때까지는 언니가 책임져야 해!"

"뭘 어떻게 책임지라는 거야!"


지수의 날 선 말에 희주가 실실 웃으며 대답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여기서 폐기로 나온 빵이랑 김밥 먹으면서 살 거니까, 돈 달라는 말은 안 할 거야.”


입술을 앙다물던 지수가 희주를 노려본다.


“희주 넌 내가 매일 잔소리하는 거 지겹지도 않니?”


희주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면서 지수를 보고 웃는다.


“아니, 나 언니 잔소리 듣고 싶어서 여기 오는 건데.”


지수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러면서도 그런 희주가 그리 싫지많은 않은 듯 창고로 들어가며 한마디를 던진다.


“나 창고에서 물건 좀 꺼내 올 테니까, 손님 오면 바로 알려주고.”

“네, 알겠습니다!”


희주는 뭔가 중요한 임무를 받은 듯이 일어나 경례까지 붙이며 큰 소리로 대답한다. 잠시 뒤 지수가 창고에서 컵라면 두 상자를 꺼내오자 희주가 부리나케 달려가 박스를 넘겨 받는다. 희주가 지수 옆에 쭈그리고 앉아 빈 매대에 컵라면을 채워 넣는다.


“언니, 거기 각이 안 맞잖아. 글자가 앞으로 보이도록 해야지.”

“알았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누가 보면 희주 네가 점장인 줄 알겠다.”


한바탕 매장 정리가 끝난 후, 지수가 아이스티 캔 하나를 희주에게 건넨다.


“하여간 수고했어. 그래도 고양이 손이라도 있으니까 좀 낫네.”

“피~ 사실 언니도 내가 오는 게 더 좋으면서.”


정곡을 찔린 지수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손으로 희주의 머리카락을 잡고 냄새를 맡는다.


“희주 너 아직 담배 피우는 거 아니지!”


희주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절대! 절얼대 안 피웁니다. 전에 언니랑 약속한 뒤로는 전자담배 한 모금도 안 피웠거든요.”


희주가 말하는 지수와의 약속이란, 노래방에 경찰까지 출동한 그 사건 다음 날, 술에 취한 희주가 지수가 있는 편의점에서 울음을 터트린 일이었다.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겠냐고! 누가 태어나서 이렇게 살려고 작정한 사람이 어딨어! 나도 이런 내가 너무 싫다고.”


편의점에 커피를 사러 온 커플이 카운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는 희주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지수는 희주를 창고로 데려갔다. 바닥에 빈 상자를 여러 개 겹쳐 깔고 그 위에 누운 희주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취한 희주가 곧 잠이 든다.

새벽녘이 돼서야 창고에서 나온 희주에게 지수가 숙취해소제를 하나 건넨다. 지수는 훌쩍거리는 희주에게 정 힘든 일이 있으며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며 등을 두드렸다. 눈물을 닦은 희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대신, 희주 너 앞으로 나 보고 싶으면 술이랑 담배 일절 하면 안 돼. 알았지!”


지수의 날 선 잔소리를 듣던 희주가 고개를 숙인다. 희주의 손등 위로 다시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자기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 라는 생각이 든 지수가 희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한창 예쁠 때잖아. 아주 뽀얗고, 아주 밝고, 너무 예쁠 나인데, 안타까워서 그래.”

“……”

“언니 잔소리가 너무 심했지. 그렇다고 울리려고 한 건 아닌데, 미안하다.”


희주가 고개를 들고 지수를 본다. 그 큰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아니, 아니야. 언니 잔소리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지수의 눈이 동그래진다.


“아니 무슨 말이야! 내 잔소리가 좋다고?”


희주가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나한테 그런 잔소리를 해준 사람은 언니가 처음이거든. 집 나온 후에, 만나는 놈마다, 어떡하면 나한테 술 한잔 더 먹일까 하는 놈들밖에 없었거든. 나한테 술 먹지 말라고 한 사람은 언니가 처음이야.”


지수는 희주의 어깨 속 작은 흔들림 안에 참 많은 눈물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술 취한 손님들과 멱살잡이하며 거칠기로 소문난 희주지만, 아직 아침이 되면 환한 햇살 아래 일어나기 싫어 엄마와 투정을 부릴만한 어린 나이다. 지수는 아직도 세상 밖으로 나가는 연습을 하고 있는 자신과 달리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희주가 가엽다고 생각했다.

지수가 희주의 작은 어깨를 와락 안아준다.


*


“정휘야,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니?”


정휘가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낯익은 검은 세단 한 대가 정휘의 집 앞 골목에 서 있다. 골드금융 한수 사장이 차에서 내린다. 정휘가 달려가 한수에게 깍듯이 인사한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장님.”


한수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아니 방금까지만 해도 어디 대학생처럼 보이더니, 바로 말투가 바뀌는구나.”


한수가 정휘를 차에 태우고 근처 카페로 간다. 한수가 정휘가 옆에 내려놓은 가방을 보며 묻는다.


“그래 공부는 잘되고 있니?”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필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는데, 실기는 영 손에 익지 않네요.”


한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거다. 사람의 손에 습관이 든다는 게 참 무서운 일이거든. 장사하는 사람 손, 공부하는 사람 손, 다 각기 그 손안에 쌓인 세월이 있을 텐데, 돈 빌려주고 돈 받아오던 손이 하루아침에 커피를 만들려니 그게 쉽겠니?”


한수가 가방에서 꺼낸 통장 하나를 정휘에게 건넨다.


“사장님 이건……”

“받아둬라, 정휘 네 퇴직금이다.”


정휘가 통장을 다시 한수 앞으로 밀어놓는다.


“아닙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것도 많은데.”

“안 된다. 이 돈 네가 가져가지 않는다면, 아직 이 바닥에 미련이 있는 걸로 생각하겠어. 그리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 어린 동생도 책임져야 하지 않니.”


동생에 대한 말이 나오자 정휘가 조용히 한수가 준 통장을 받는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래, 대신 나중에 정휘 네가 바리스타 되면 평생 내 커피는 공짜로 줘야 한다.”


한수의 농담에 정휘가 환하게 웃는다.


“참, 예전에 제가 하던 일은 잘 돌아가나요?”


정휘의 말에 한수가 한숨을 쉰다. 정휘가 하던 사채 일을 원일이에게 맡긴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문제가 터지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세상 차갑게 보이는 정휘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겐 너무 독하게 돈을 독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여유를 주면서 숨통을 틔게 해 주기도 하고, 같이 해결 방법을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그런 정휘의 방식은 처음에는 효율적이지 못하고 어리석게 보였다. 인간적으로 대해 주는 정휘를 얕잡아보고 일부러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이 있으면서도 이자 내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들 조금씩 정휘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휘가 사채를 맡고부터는 골드금융은 크게 소리 날일 없이 잘 돌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정휘의 일을 원일에게 맡기고부터서는 거리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수 사장은 아무 일도 없는 줄 알았다. 아니 원일이가 일을 맡고부터 오히려 더 잘 돌아가는 줄만 알았다. 정휘가 가져오는 돈보다 더 많은 이자를 가져오는 원일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줄만 알고 보너스로 꽤 큰 액수를 챙겨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원일이는 채무자들에게 돈을 받아낼 때 정휘와 달리 무자비한 방법을 사용했다. 돈을 제때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그 가족들을 찾아가 위협하기도 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돈을 갚아나가던 채무자들은 원일의 잔인한 위협에 차라리 돈을 갚지 않고 도망가는 것을 택했다.

비록 사채지만 정휘가 있을 때는 같이 살아보려 하던 동네 상인들도 이제 골드 금융이라면 치를 떨게 됐다.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없고 돈을 갚지 않고 도망간 사람만 늘어났다. 이전에는 길을 걸어가다 보면 반갑게 인사하던 상인들은 언젠가부터 한수가 지나가면 등을 돌리곤 했다.


“처음부터 정휘 너처럼 잘하겠니? 차츰 나아지겠지.”


화제를 돌리려던 한수가 정휘 가방 옆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를 본다.


“그건 뭐냐? 어디 편의점에서 산 거 같은데.”


정휘가 비닐봉지에서 바나나맛 우유 하나를 꺼낸다.


“동생이 워낙 좋아해서요.”


한수가 바나나맛 우유를 집어 들더니 신기한 듯 요리조리 살펴본다.


“이거 나도 참 좋아하는 건데, 그런데 그거 아니? 여기 꼭 바나나가 들어있을 거 같지만, 바나나는 들어있지 않은 거. 그래서 이름도 ‘바나나 우유’가 아닌 ‘바나나맛 우유’지만 말이다.”


한수가 바나나맛 우유를 정휘에게 돌려준다.


“이걸 보니, 꼭 정휘 너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비록 가짜 건달이지만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아는 진짜 같은 가짜 건달 말이야.”

“……”

“세상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도 있더라고.”


앞에 놓인 커피를 다 마신 한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차에 올라탄 한수가 창문을 내리고 정휘의 얼굴을 본다.


“근데 난 바나나 우유보다 바나나맛 우유가 더 맛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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