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시간

인공눈물이 마른자리엔 11화

by 노리스 부인

행복동 외곽에 있는 한 유흥주점, 원일이 한 남자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원일 씨, 아니 이제 원일 팀장이라 불러야 하나? 최원일 팀장님, 좋은 자리에 올라가 놓고 왜 이리 인상을 쓰시나?”


앞에 앉은 남자는 다름 아닌 스마일 금융 김천식이다. 천식이 웃으며 위스키가 담긴 병을 들어 원일의 잔을 가득 채워준다. 원일이 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입에 털어 넣는다.


“아니, 팀장만 되면 뭐 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왜 뭐가 맘대로 안 돼?”

“무슨 사채업자가 사회복지사야? 돈 빌려 간 놈이 안 갚으면 쥐어패서라도 돈을 내게 만들어야지. 무슨 그런 놈들 사정까지 봐줘 가면서 하라고 하니,”


천식이 원일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원일 팀장이 많이 힘들겠구먼.”

“에이, 사장인지 뭔지 꼰대랑 일하기 힘들어 죽겠네.”


원일이 다시 천식이 가득 따라준 술을 한번에 마시더니, 테이블 위의 마이크를 들어 옆에 앉은 여자 종업원에게 던진다.


“야, 넌 이름이 뭐, 자영이라 했나? 노래나 하나 불러 봐. 나 지금 열받으니까, 좀 신나는 노래로.”


천식이 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온다. 천식이 원일이 귀에 대고 조용히 귓속말을 한다. 천식의 말을 들은 원일이 깜짝 놀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원일 팀장 오랜만이야. 나 스마일 금융 임경식 사장이야.”


원일의 눈이 동그래진다. 앞에 앉은 임 사장이 원일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준다.


“난 전부터 원일 팀장과 함께 일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원일 팀장은 어때?”


임 사장이 원일을 보며 입을 벌려 소름이 돋는 듯한 웃음을 짓는다.


*


정휘가 하얀 잔 위에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따르고, 그 위에 우유 거품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뜨거운 우유로 튤립 모양의 그림을 만들려 하지만 정휘의 손은 마음처럼 잘 따라주지 않는다. 요즘 정휘는 지수 소개로 편의점 점장님의 양해를 얻어 편의점 커피머신으로 바리스타 실습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커피 위에 그림을 그리는 걸 ‘라테아트’라 하는구나, 근데 이거 뭐 그린 거야?”


옆에서 정휘를 지켜보던 지수가 궁금한 듯 묻는다. 정휘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응, 튤립이야.”


큭큭큭, 지수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미 미안, 비웃으려고 한 건 아닌데, 너무 웃겨서, 난 개구리 모양을 그린 줄 알았거든.”


정휘의 얼굴이 붉어진다.


“야, 아무리 그래도 개구리가 뭐냐, 개구리가.”


웃음을 간신히 그친 지수가 정휘에게 부탁한다.


“정휘 바리스타님, 나 바닐라 라테 한 잔만 만들어 줘.”

“바닐라 라테?”

“응, 나 단 거 싫어하니까, 바닐라 시럽은 반만 넣고, 대신 시나몬 가루는 두 배로 얹어서.”


아직 정식 바리스타가 되지는 않았지만, 첫 주문을 받은 정휘가 씩 웃으며 과장스럽게 대답한다.


“네, 손님.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정휘가 커피머신을 작동시켜 막 볶은 원두로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한잔 내린다. 지수의 주문대로 바나나 시럽은 정량의 절반만 넣는다. 다음은 뜨거운 우유를 스팀피처에 넣고 커피 위로 따라 거품을 풍성하게 만드는 스티밍이란 작업이다. 올라오는 하얀 거품 위로 시나몬 가루를 뿌리면 지수가 주문한 바닐라 라테가 완성된다.


“손님, 바닐라 라테 나왔습니다.”


지수가 활짝 웃으며 정휘가 만든 바닐라 라테를 받는다. 지수가 눈을 감고 올라오는 라테의 향을 느껴본다.


“음, 고소하면서도 계피 향이 물씬 나는 게…, 아주 좋은데?”


지수가 후후 불어가며 정휘가 만든 바닐라 라테를 마신다. 하얀 거품의 고소함 속에 커피 향이 물씬 풍겨난다.

아직 쓴 블랙커피를 먹지 못하는 지수에게도, 정휘의 바닐라라테는 따스한 고소함으로 온 몸을 감싸주는 느낌을 전해준다.


“우와, 이거 뭐야? 정말 맛있는데?”


지수가 호들갑을 떨자 정휘가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친다.


“아냐,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 너무 그렇게 칭찬하지 마.”

“아냐, 내가 마셔본 바닐라 라테 중에 정말 최고인 거 같아.”


딸랑


순간 편의점 문이 벌컥 열린다.


“정휘 형님, 정휘 형님, 여기 계세요?”


승환이었다. 승환의 하얀 와이셔츠가 찢어지고 여기저기 빨간 핏자국이 묻어있다. 정휘가 놀란 눈으로 승환을 본다.


“승환아, 무슨 일이야!”


한참을 달려왔는지 승환이 양손으로 무릎을 잡고 가쁘게 숨을 내쉰다.


“사장님이…, 한수 사장님이, 습격을…”


정휘의 눈이 커다래진다.


“뭐라고! 사장님이 습격을 당해? 승환아 자세히 좀 말해봐.”


지수가 스탠드 테이블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승환을 앉히고 생수 하나를 열어 내민다. 승환이 입을 떼지도 않고 생수 한 병을 단숨에 마셔버린다.

물을 마신 승환이 깊은 숨을 내쉰다. 승환이 몸을 떨며 정휘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털어놓는다.

한수 혼자 사무실에 있던 시간, 돈을 빌리러 온 손님을 가장한 건장한 남자 둘이 들어왔다. 그 둘은 순식간에 돌변하여 한수를 위협해 금고문을 열라고 협박했다. 한수가 말을 듣지 않자 둘이서 집단으로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승환과 조직원들이 사무실로 달려갔지만, 사무실은 이미 임경식 사장이 보낸 스마일 금융 조직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원일이 형님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데, 한수 사장님을 그렇게 만들어!”


승환이 핏발 선 눈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한다.


“형님, 임경식 패거리를 데리고 온 사람이 바로 원일이 그놈입니다.”


정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원일이가 성품이 좋지 않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한수 사장님을 배신할 줄은 몰랐다. 원일이는 그 비열한 성격으로 인해 건달 세계에서도 반겨주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한수 사장은 원일이가 오래된 친구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아무 데도 받아주지 않던 원일을 식구로 받아들여주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도 아닌 원일이가 한수 사장을 배신했다는 건, 정휘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사장님은 지금 어딨는데?”

“아마 철산동 스마일 금융 사무실에 계실 겁니다.”


정휘가 걸치고 있던 청색 앞치마를 벗어 지수에게 건넨다.


“지수야, 나 좀 갔다 와야 할 거 같다. 염치없지만 내일까지 용휘 좀 부탁할게.”


정휘가 승환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승환아, 지금 연락되는 애들 다 사무실로 모이라고 해.”


지수가 말릴 틈도 없이 정휘는 이제는 다시 가지 않겠다고 한수와 약속한 옛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린다.


*


철산동에 있는 스마일 금융 사무실, 손발이 꽁꽁 묶인 한수 사장이 의자에 앉아있다. 입에는 파란 테이프가 붙어 있다. 그 앞에 광택이 나는 은빛 양복을 입은 임경식 사장이 입을 벌리며 웃고 있다.


“아유, 이게 누구야. 우리 한수 사장님,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


싱글거리던 임 사장이 뒤에 서 있는 천식을 보고 큰 소리를 친다.


“천식이 넌, 손님 대접을 어떻게 하는 거냐. 우리 귀한 손님 입에다 테이프를 붙여 놓다니.”


어슬렁거리고 온 천식이 한수 입에 붙은 테이프의 모서리를 잡고 잠시 망설이다 단숨에 확 떼어버린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한수 사장이 악 하는 비명을 낸다. 주위에 서 있던 임 사장의 수하들이 킬킬대며 웃음을 터트린다. 한수가 주변을 돌아보다 임 사장의 패거리 틈에 끼어있는 원일을 발견한다.


“원일이 이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 내가 널 어떻게 거둬줬는데…, 배신을 하다니.”


임 사장이 한수 사장의 등 뒤로 가더니 손가락으로 한수의 쇄골 부위를 세게 누른다. 한수가 통증을 참기 위해 이를 앙다문다.


“그러면 되나. 그래도 사장이 잡혀 왔다고, 여기까지 따라온 충성스러운 부하인데, 안 그래?”


임 사장이 손을 내밀자 천식이 품에서 꺼낸 날카로운 일식용 칼을 건네준다. 임 사장이 그 칼을 한수 앞에서 빙글빙글 돌린다.


“자, 이제 그럼 사업 얘기 좀 해 볼까? 사장님 금고 안에 있는 대출 서류, 그거 우리한테 다 넘기시지.”


한수가 임경식의 속셈을 알고 고개를 젓는다. 임 사장은 한수가 가지고 있는 대출 서류를 가지고 그 돈을 대신 받아 챙길 계획이다. 빌려준 원금의 몇 배나 되는 이자를 받아내는 임 사장에게 그 서류들이 넘어가면, 한수와 골드금융을 믿고 돈을 빌려 간 행복동 상인들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임 사장이 칼끝을 한수의 얼굴에 대고 천천히 내리긋는다. 칼끝이 지나가는 곳마다 빨간 피가 흘러내린다. 한수가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는다.


“혹시, 누가 여기로 구하러 올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 참, 사장님이 아끼는 정휘가 있구나. 아 맞다. 아까 사무실에서 승환이라고 어린 놈 하나, 일부러 도망치게 놔뒀는데…, 이제 정휘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바로 사장님을 구한다고 달려오겠지?”


임 사장이 뒤에 있는 수하들을 돌아보며 킬킬대며 웃는다.


“그런데 어쩌나, 승환이 그 놈을 놔준 게, 우리 천식이 아이디언데. 이제 이해가 되지? 당신을 여기로 데리고 와야 정휘가 이리로 올 거 아니야."


임 사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 추측이 맞아. 우린 지금 정휘 놈을 잡을 덫을 논 거야.”


한수가 일어나면서 소리를 지르자 임 사장이 한수를 억지로 앉히고 입에 다시 테이프를 붙인다.


“자 이제 쥐새끼 한 마리 더 잡을 준비 하자!”


수십 명의 조직원이 큰 소리로 대답하고 각자 위치로 흩어진다.


*


“정휘 형님, 여깁니다.”


검은 승합차에서 내린 승환이 정휘를 철산동 뒷골목의 낡은 건물 이 층에 있는 스마일 금융 사무실로 안내한다.

정휘를 따르는 골드 금융 조직원은 모두 여섯 명, 그중 세 명은 이미 방금 벌어진 싸움으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상태다. 이 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이 보인다. 정휘가 앞장서 올라간다.


“쾅”


정휘가 사무실 문을 발로 힘껏 걷어차자 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린다. 어두컴컴했던 사무실의 불을 켜자 사무실 가운데에 있는 의자 위에 묶인 한수 사장이 보인다. 정휘가 달려가자 손발이 묶인 한수가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 고개를 흔든다. 정휘가 한수 입의 테이프를 떼어낸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한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정휘를 채근한다.


“정휘야, 빨리 도망가라. 이거 함정이야 함정.”

“네? 함정이라고요.”


순간 사무실 계단의 아래위로부터 요란한 발소리가 들린다. 이십 명이 넘는 덩치들 앞에 선 천식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늑대같이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짓는다.


“장 팀장 오랜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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