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눈물이 마른자리엔 12화
딸랑 딸랑
오늘따라 편의점 문 위에 매달아 놓은 종이 여러 번 시끄럽게 울린다.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온 사람은 바로 희주였다.
“언니, 지수 언니. 정휘 오빠 어디 있어요!”
“정휘, 방금 나갔는데, 승환 씨가 와서,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급히 나가던데…”
지수의 말을 들은 희주의 얼굴이 울상이 된다.
“어떡해, 어떡해.”
“희주야 왜 그래,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
희주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그거 함정이에요. 지금 정휘 오빠가 간 곳이, 정휘 오빠를 잡으려고 함정을 파 놓은 곳이라고요.”
희주의 말을 들은 지수의 가슴이 뛰기 시작하더니 눈이 뻑뻑해지기 시작한다.
“뭐? 정휘가 간 곳이 함정이라고? 희주야 자세히 좀 이야기해 봐.”
조금 전, 친구인 자영이 희주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유흥업소 일을 그만둔 희주와 달리, 자영은 아직도 행복동 일대의 유흥주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자영은 우연한 기회에 천식과 원일이 술을 마시는 방에 도우미로 불려 가게 되었다. 두 사람의 술 시중을 드는 자영의 귀에 낯익은 사람의 이름이 들려왔다. 바로 정휘의 이름이다.
잠시 후, 임경식이란 사람도 술자리에 합석했다. 자영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원일이 한수 사장을 잡아 철산동 사무실로 데려가면, 분명히 정휘가 한수 사장을 구하러 올 것이니, 그때 잡아서 어디 한 군데 불구를 만들 정도로 폭행을 가하겠다는 계획을 들었다.
자영의 전화를 받은 희주는 바로 정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정휘도, 항상 곁에 있던 승환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언니, 어떡해요, 정휘 오빠 죽으면 어떡해요.”
갑자기 몰려드는 상황에 지수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진다. 지수의 눈이 마르며 통증이 느껴진다. 지수가 주머니에 하나 남은 인공눈물을 꺼내려다 마음을 고쳐먹는다.
'언제까지 이 인공눈물에 의지할 수는 없어.'
지수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억지로 눈을 여러번 깜박인다.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느낌이 든다. 지수가 카운터로 가 경찰서로 연결되는 비상벨을 힘껏 누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광등을 켠 순찰차가 편의점 앞으로 온다. 차에서 내린 민규가 황급히 들어온다. 지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민규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지수야, 잠시만. 이건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 같은데.”
지수가 차로 들어가 무전기를 들고 파출소와 연락한다.
“김 경위님, 저 박 순경입니다. 긴급 상황입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
처음 달려든 놈들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 같은 풋내기들이었다. 덩치는 컸지만, 이 바닥 생리를 모르는 어린애들이다. 천식이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제일 먼저 내보낸 것이다. 야구 방망이를 든 어린 조직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정휘에게 달려든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애들이다. 정휘는 좀 거추장스럽더라도 급소를 피해 가며 다치지 않도록 하며 어린 조직원들을 쓰러트린다.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달려드는 여러 명을 처리하다 보니 정휘의 체력도 꽤 많이 소모가 됐다.
그 다음으로 달려든 놈들은 천식 밑에 있는 베테랑 주먹들이다. 평소의 정휘라면 가볍게 처리할 놈들이지만 문제는 달려드는 놈들의 숫자다. 하나가 쓰러지면 둘이, 둘이 쓰러지면 넷이 달려드니 정휘의 몸도 점차 버티지 못하고 지쳐만 갔다.
그 광경을 본 천식이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는다. 한수를 납치해 정휘를 유인하고, 골드 금융을 통째로 먹겠다는 계획을 낸 것은 천식이었다. 모든 일은 계획한 대로 이루어졌다. 다만 지금쯤이면 바닥에 쓰러져 있어야 할 정휘가 아직도 버티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천식이 뒤에 있는 원일에게 눈짓한다. 원일이 마치 몸에 맞이 않은 옷을 입은 듯한 표정으로 부하 둘과 함께 앞으로 나온다.
천식이 그런 원일을 보고 비웃듯 말을 내뱉는다.
“밥값은 해야지.”
정휘는 다음 상대로 나온 사람이 원일이라는 것에 놀랐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는다. 원일 옆에 있는 두 사람도 골드금융에 같이 있던 원일의 부하다. 원일이 소리를 지르며 정휘에게 달려들지만, 그 주먹은 허공을 가를 뿐이다. 원일이 옆구리를 정휘에게 가격 당한다. 뒤로 물러난 원일이 품에서 얇고 날카로운 칼을 꺼낸다. 그걸 신호로 원일의 두 부하도 품에서 기다란 칼을 꺼내 들고 정휘 앞으로 다가간다.
정휘의 표정이 굳어진다. 아무리 어두운 세계의 조직원이라도 그 곳엔 나름 그들만의 질서와 암묵적인 룰이 있다. 아무리 적이라도 얼굴을 아는 조직원들 간에 싸울 때는 칼같은 흉기를 꺼내지 않는다. 하물며 얼마 전까지 같은 조직에서 한솥밥을 먹은 사람을 상대로 칼을 들고 덤빈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도 치가 떨리는 일인 것이다.
천식이 노리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정휘가 칼의 위협보다는 얼마 전까지 같은 조직원이었던 사람들과 싸우는 상황을 만들어 정휘의 멘탈을 무너트리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정휘가 먼저 덤벼든 두 사람을 쓰러트리고 원일과 맞닥트린다. 원일이 뒷걸음을 친다.
“야,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원일이 칼을 휘두르며 뒷걸음을 친다. 순간 뒤에 있던 천식이 칼을 꺼내 원일의 옆구리를 푹 찌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정휘와 원일은 이게 뭔 영문인지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천식이 옆구리가 피에 흘러 내리는 원일을 정휘에게 떠다민다. 칼을 떨어트린 원일이 정휘 앞으로 쓰러지자 놀란 정휘가 원일을 안아 일으킨다. 그때였다. 정휘가 방심한 틈을 타 뒤에 있던 천식의 수하들이 야구 방망이로 정휘의 등을 가격한다.
“으윽”
쓰러진 정휘의 등에 천식 패거리의 주먹과 발길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정휘가 일어나려 애를 쓰지만 그럴 때마다 날아오는 묵직한 방망이의 타격이 정휘를 다시 바닥으로 쓰러지게 한다. 천식이 정휘 앞으로 다가간다. 부하 두 명이 이제는 피투성이가 된 정휘를 양쪽에서 잡아 일으킨다. 천식이 재밌다는 듯 정휘 앞으로 간다. 천식이 손으로 정휘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며 얼굴을 치켜든다.
“이게 누구야. 골드 금융 장 팀장 아냐, 항상 고고한 척, 우리 같은 것 하고는 상대도 안 하려고 하시던 분이 오늘은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실까? 쯧쯧”
천식과 눈이 마주친 정휘가 천식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천식이 주머니에서 꺼낸 휴지로 얼굴에 묻은 피가 섞인 침을 닦는다.
“아직 매가 모자란 모양이다. 야, 너 그 칼 좀 줘봐.”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원일이 정휘에게 다가가는 천식의 다리를 잡는다.
“처 천식 팀장,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우린 같은 편이잖아.”
천식이 재밌다는 듯 자기 부하들을 보며 웃는다.
“야, 이것 좀 봐라. 이놈이 우리랑 같은 편이라고 그러는데?”
천식의 부하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천식이 자기 바지가랑이를 잡으려는 원일의 손을 구둣발로 사정없이 밟아 짓이긴다. 원일이 비명을 지른다.
“자길 거둬준 사장까지 배신하는 놈을 뭘 믿고 같이 일을 해!”
천식이 칼을 들고 정휘의 목을 잡는다.
“자, 장 팀장, 이제 잘 가고, 밀린 돈은, 용휜가? 그 동생 놈한테 받아낼 테니, 그건 걱정 말라고.”
순간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정신이 든 정휘가 있는 힘을 짜내 머리로 천식의 얼굴을 받아 버린다.
우지끈
천식이 얼굴에서 그릇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
“이 개자식이!”
코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뒤로 물러난 천식이 다시 칼을 들고 정휘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밖에서 요란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여러 사람이 계단으로 올라오는 발소리도 들려온다.
“거기 비키세요. 계속 막으면 체포합니다.”
계단에서 망을 보던 조직원들과 경찰이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린다. 임경식 사장과 천식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다.
“뭐, 뭐야. 경찰이 여길 어떻게 알고 왔어!”
쾅하는 소리가 들리며 사무실의 문이 열린다. 정복을 입은 경찰관 여러 명이 들이닥친다. 민규가 칼을 든 천식을 보고 소리를 지른다.
“거기 빨리 칼 바닥에 내려놓으세요. 지금 당장요.”
당황한 천식이 임 사장을 보며 뭔가를 지시해 주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낸다. 임 사장은 빠르게 이 상황에 대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눈 앞에는 칼에 찔려 쓰러진 원일과 피투성이가 된 정휘, 그리고 칼을 든 천식이 있다. 그리고 도망갈 퇴로를 막은 몰려든 여러 명의 경찰까지, 임 사장은 지금 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낸다.
“천식이 넌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칼을 들고 사람을 해치다니. 빨리 칼 내려놔.”
경찰 앞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될 상황에 있는 천식은, 사장인 경식이 꼬리를 자르고 빠져나가려고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경식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민규가 허리에 찬 테이저건을 꺼내 천식에게 발사한다.
‘지지지지직’
전기에 감전된 듯 몸을 떨던 천식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민규가 수갑을 꺼내 천식의 손목에 채운다. 김 경위가 같이 온 경찰들에게 지시한다.
“현행범으로 다들 체포해. 반항하면 공무집행 방해죄도 추가하니 다들 순순히 손들 내밀어!”
잠시 후, 스마일 금융이 있는 좁은 골목은 밀려드는 사람들로 난리가 났다. 임경식 사장과, 천식, 그리고 수하 조직원들이 수갑을 찬 채 줄줄이 끌려 나와 대기하고 있던 경찰 승합차에 올라탄다. 119 구급차 두 대가 와 들것에 실린 정휘와 한수를 태우고 사이렌을 울리며 병원으로 향한다.
*
그 일이 있은지 3일이 지났다. 지수는 용휘를 데리고 병원으로 왔다. 병원 복도에 있던 민규가 일어나 둘을 맞는다. 지수가 눈물을 글썽이는 용휘의 손을 잡는다.
“정휘는 어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는데, 꽤 오랜 시간 병원에 있어야 할 거야. 부러지거나 금이 간 곳도 여러 군데이고, 피도 좀 많이 흘렸거든.”
민규의 말을 들은 용휘가 울음을 터트린다.
“우리 형 어딨어요! 나 지금 형 볼래요. 형 봐야겠어요.”
용휘가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문을 밀치려 하자 지수가 뒤에서 끌어안는다. 지수가 용휘가 몸부림 치는 팔을 잡는다.
“누나한테 이러지 않기로 약속하고 온 거잖아. 용휘, 숨 크게 쉬고 누나 눈을 봐.”
용휘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지수의 얼굴을 쳐다본다.
“용휘는 정휘 형이 빨리 나았으면 좋겠지?”
용휘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우리 정휘 형, 좀 쉬게 놔두자. 푹 쉴수록 더 빨리 나아서 집에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알겠지.”
민규가 자판기에서 용휘에게 음료수를 하나 뽑아주고 지수를 따로 데리고 나간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민규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일단 정휘 씨도 폭력을 쓴 건 맞으니까, 처벌을 피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스마일 금융 쪽에서 먼저 사람을 납치하고 계획적으로 정휘 씨를 유인해서 단체로 폭행을 가했기 때문에, 정휘 씨는 정당방위에, 정상 참작도 가능할 거야. 잘 되면, 구속까지는 안 가고 잘 끝날 수도 있어.”
지수가 닫힌 정휘의 병실 문을 보며 한숨을 쉰다.
"정휘야, 이제 그만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