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진심을 전할 수 있다면

인공눈물이 마른자리엔 13화

by 노리스 부인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정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운 얼굴들이 나왔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엄마, 아빠 그리고 어린 용휘의 얼굴도, 푸른 들판에 자리를 깔고 앉은 가족들은 엄마가 싸 온 김밥을 먹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정휘의 가족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용휘도. 어린 정휘는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덤벼들었다. 그 사람들을 때리고 걷어찼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정휘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갈 길만 가고 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정휘가 소리를 지른다. 그만하라고,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 순간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고개를 돌려 정휘를 봤다. 순간 정휘는 너무 놀라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얼굴은 바로 정휘 자신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잠만 들면 나타나는 악몽으로 소리까지 지르는 정휘에게, 의사는 계속 안정제를 놓을 수 밖에 없었다.


“환자가 계속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저렇게 불안해하며 잠을 통 자지 못하니.”


지수는 의사에게 허락을 얻어 정휘의 병실에 들어갔다. 정휘는 여전히 안정제에 취한 가수면 상태였다. 지수는 정휘의 불안이 무엇인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짐작이 됐다.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어른이 된 정휘는 자기 어깨 위에 얹어있는 무거운 짐들을 지고 얼음판 위의 자전거를 탄 사람처럼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다. 그런 긴장된 생활을 몇 년 동안이나 유지하던 정휘가 이제 그 긴장이 무너진 것이다. 누워있는 정휘 옆에 앉은 지수가 귀에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정휘야, 나야, 지수.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도 돼. 너 자는 동안 용휘는 내가 잘 돌봐줄 테니까. 나랑 희주, 그리고 승환 씨도 옆에 같이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지수의 말을 들었는지, 정휘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사실 정휘는 무의식적인 상태에서도 동생 용휘 걱정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용휘를 잘 돌봐준다는 말을 지수에게서 듣자 긴장이 풀리며 몸이 이완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차가운 세상에 던져진 정휘와 용휘, 세상 어디 의지할 데도 없고 오직 둘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혼자라고 생각했던 세상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날 정휘는 항상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무거운 짐을 처음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난생처음 긴장하지 않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


한 달이 지났다. 정휘는 이제 많이 회복되어 면회도 할 수 있었다. 어제는 지수가 데려온 용휘와도 만날 수 있었다. 용휘는 그새 부쩍 철이 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형을 안고 눈물 바람을 할 것 같아 걱정하기도 했지만, 형이 걱정하지 않게 씩씩한 모습을 보여줬다.

어느 정도 긴 대화가 가능해지자 사건 조사를 위해 민규가 정휘 병실에 방문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경찰도 정휘 씨를 도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정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부터 그날 있었던 일까지 모든 것을 담담하게 민규에게 진술했다.


“스마일 금융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그쪽 조직원들을 먼저 폭행했다고 진술하신 건가요? 정휘 씨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은 진술은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휘가 고개를 흔든다.


“아닙니다. 솔직하게…, 다 내려놓고 가고 싶습니다.”


정휘의 눈에서 어떤 결심 같은 것을 느낀 민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조사를 마친 민규가 일어난다.


“아직 조사를 더 해 봐야 알겠지만, 스마일 쪽에서 먼저 한수 사장을 납치하고 정휘 씨를 유인해서 폭행하려 한 게 명확하니, 정상 참작은 될 것 같습니다.”


정휘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민규에게 말한다.


“저…, 지수한테 들었습니다. 그날 박 순경님이 그 시간에 맞춰 오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지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겠죠.”


민규는 전에 정휘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번엔 경찰이 필요할 때 맞춰서 잘 왔죠?”


정휘의 얼굴이 붉어진다.


“네, 그러네요. 그땐 제가…”


민규가 손을 흔든다.


“사과받으려고 한 말 아닙니다. 그저 이제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정휘 씨도 그렇고, 저 같은 경찰도 그렇고.”


민규가 문을 닫기 전, 머뭇거리며 말을 꺼낸다.


“지수가 정휘 씨, 많이 걱정하더군요. 부럽네요. 두 사람…, 참 좋은 친구 같아요.”


다음날 한수 사장이 찾아왔다. 정휘보다 상처가 가벼운 한수는 먼저 퇴원해서 통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한수가 정휘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 옥상으로 간다.


“정휘, 너한테 면목이 없구나. 필요 없다고 너를 내보냈는데, 또 이런 일을 겪게 하다니.”


정휘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흔든다. 한수가 주머니에서 담배 두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 그중 하나를 정휘에게 건넨다. 정휘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담배를 한수에게 돌려준다.


“끊었습니다.”

“그래? 의외구나. 정휘 너 담배를 꽤나 좋아했던 거 같던데.”


정휘가 한수를 보고, 작은 미소를 짓는다.


“좋은 바리스타는 커피 맛을 해치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거든요.”


*


“아야야야, 누나 이것 좀 놓고 말해요.”


지수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의 귀를 잡아당기며 혼을 내고 있다.


“누가! 누가! 여기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래? 아휴, 내가 편의점 종업원인지 흡연 단속 공무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니까!”


학생 두 명이 지수의 감독하에 편의점 앞을 돌아다니며 담배꽁초를 줍는다.


“한 사람당 삼십 개씩 주워오기 전까지는 봐줄 생각 없으니까, 빨리빨리 해. 그리고 도망갈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마. 이름 외워놨으니까, 바로 학교에 신고할 테니까.”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지수의 눈매가 무섭다.


“어이~, 이제 진짜 편의점 매니저 느낌 나는데?”


용휘와 같이 온 정휘가 웃으며 지수를 보고 손을 흔든다. 정휘는 그 일이 있은 후, 퇴원하고도 한동안 재활치료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에도 쉬지 않고 틈틈이 공부해 바리스타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오늘 자격증이 나온다고 했는데 용휘와 같이 받아 온 모양이다.


“지수 너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


정휘가 가방에서 꺼낸 커다란 봉투 안에 들어있던 바리스타 자격증을 꺼내 지수에게 보여준다.


[바리스타 1급 자격 인증서]


“와~ 정휘 너 대단하다. 그렇게 다친 몸으로 어떻게 그 시험을 통과했냐? 너 머리 되게 좋은가 보다.”


정휘의 얼굴이 붉어진다.


“별거 아냐, 그냥 자격증일 뿐인데, 좀 창피하네.”

“별거 아닌데, 용휘까지 데리고 가서 받아왔냐? 너 솔직히 말해, 동생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지?”


정휘가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친다.


“아냐, 그냥 어쩌다 보니 같이 가게 된 거야. 그게 뭐라고 내가 너한테 자랑까지 하겠냐?”


용휘가 들고 있는 종이봉투에서 나무 액자 하나를 꺼낸다.


“지수 누나, 이거 형이 자격증 넣어서 집에 걸어두자고 해서 이 액자 샀어요.”


큭큭큭, 지수의 볼이 웃음으로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볼이 붉어진 정휘가 용휘 손에 들린 액자를 빼앗아 종이봉투에 다시 넣는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


정휘가 가고 나서야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지수다.



“누나 다 주웠어요.”


두 학생이 담배꽁초가 담긴 비닐봉지를 가지고 와 지수에게 검사를 받는다.


“그래, 합격! 너희 둘, 지금 음료수 냉장고에서 먹고 싶은 거 하나씩 가져와. 누나가 쏘는 거야. 대신 이천 원 이하만 된다.”



지수가 이곳 행복동 CS 24 편의점에서 일한 지도 어느새 6개월이 지났다.

그간 지수의 성격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을 시작한 처음에는 들어오는 손님과 눈도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계산대 바닥만 보며 바코드를 찍던 지수였다. 하지만 이제 어엿한 CS 24 매니저로 행복동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는 지수다.

지수가 밤샘 근무를 끝낼 무렵,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출근하는 행복동 주민들은 지수의 밝은 인사로 활기찬 출근길을 맞는다. 지수가 편의점 앞을 청소하며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씩씩하게 인사를 한다.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얘들아, 학교 늦겠다. 빨리 뛰어가.”


정시에 출근한 점장님이 지수가 청소를 하며 동네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을 바라본다.


“지수 씨, 이제 이 동네에서 지수 씨 모르는 사람이 없겠어? 완전 이 동네 스타야.”

“헤헤, 뭘요.”


매장으로 들어간 점장님이 매출을 확인한다.


“야~ 이거 지수 씨가 오고부터 우리 편의점 매출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네.”


지수가 동네 사람들과 안면을 트게 되면서, 다른 곳으로 가던 주민도 일부러 지수가 일하는 편의점으로 오곤 했다.


“지수 씨, 그런데 저번 달 보다 햇반 매출이 많이 늘어났네. 뭔 일이 있나?”

“아, 그거요. 제가 햇반 진열대를 컵라면 옆으로 옮겨놨어요. 그 뒤로 판매량이 많이 늘더라고요.”


점장님이 궁금한 듯 묻는다.


“그게 무슨 이유가 있나?”

“라면을 먹는데 옆에 밥이 있으면 당연히 말아먹고 싶지 않겠어요.”


점장님의 눈이 동그래진다.


“맞다, 그러겠네. 근데 지수 씨, 그런 거는 어디서 배운 거야?”

“도서관에서 유통 마케팅 책을 빌려서 틈틈이 보고 있었거든요. 거기서 힌트를 얻은 거예요.”

“야, 이거, 내가 직원 하나는 정말 잘 뽑았네. 하하”



딸랑


“어, 정휘 왔구나.”


정휘가 점장님에게 인사를 하고 커피머신 쪽으로 간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딴 정휘는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대신 아침마다 편의점으로 와 커피머신으로 커피 내리는 연습을 하곤 한다.

정휘가 진한 에스프레소 한잔을 내려 점장님께 건넨다. 점장님이 눈을 지그시 감고 커피 향을 음미한다.


“좋다. 너무 좋아. 회사 다닐 때, 여러 커피숍을 다녀봤지만, 정휘 씨가 만들어준 커피만큼 맛있는 커피는 마셔보지 못한 거 같아.”


지수가 입을 삐죽인다.


“점장님, 정휘 너무 띄워주시는 거 아니에요? 아직 초보인데 겉멋만 들 수도 있어요.”


민망한 표정의 정휘가 흠흠 헛기침을 한다.


“지수 넌 바닐라 라테지? 시럽은 반만 넣고 시나몬 가루 많이 뿌려서.”


지수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이제야 친구 취향을 아는구나. 맛있게 좀 부탁해.”


멀리서 경찰 순찰차가 보이더니 편의점 앞에 선다. 차에서 내린 민규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다.


“어, 마침 정휘 씨도 있었네요. 안 그래도 한번 연락하려고 했어요.”


민규의 말을 듣던 지수가 둘 사이에 끼어든다.


“왜? 정휘한테 무슨 일 있어?”


민규가 손사래를 친다.


“그건 아니고, 전에 그 사건, 이제 종결 처리됐다는 거 알려주려고, 정휘 씨, 이제 그 사건은 끝났으니 더 이상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임경식 사장과 그 일당들, 아마 한동안 바깥세상 구경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


정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정휘는 민규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민규를 처음 만났을 때, 경찰은 진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없었다며, 경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어린 시절의 안 좋은 기억을 쏘아붙인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정휘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제일 먼저 달려와 구해준 사람은 민규였다. 그렇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속에 있는 마음을 제대로 말하지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런 정휘의 마음을 알고 있는 지수가 장난스럽게 정휘를 놀린다.


“야, 너는 네 생명의 은인이 왔는데도 고맙다는 말도 안 하냐?”


지수의 너스레에도 정휘가 아무 말이 없자, 머쓱한 민규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간다.


“하여간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그럼 지수, 점장님 또 뵙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민규를 정휘가 따라 나간다. 손에는 정휘가 직접 내린 따스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이 들려 있다.

정휘가 민규에게 커피를 건넨다.


“드셔보세요.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정휘가 건넨 커피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온다. 민규가 먼저 커피 향을 맡아본다. 절로 눈이 감기는 향이다. 눈을 감고 커피 향을 음미하던 민규가 커피 한 모금을 마셔본다. 씁쓸하면서도 산미가 진한 맛이다. 눈을 뜬 민규가 정휘와 눈이 마주친다.


“맛있네요.”


긴장감이 묻어있던 정휘의 얼굴의 풀어지며 웃음기가 돈다.


“맛있다니, 참 다행입니다.”


지수와 점장님이 편의점 유리창 밖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다.


“뭐야, 쟤네, 둘이 말도 안 하고 웃고만 있네. 싱겁긴.”


점장님이 지수를 보고 말한다.


“남자끼린 말이다. 때론 말을 안 하는 게 더 마음을 전할 때도 있거든.”


*


어느덧 지수가 편의점에서 일한 지도 일 년 하고도 반년이 지났다. 어느 날 지수는 점장님에게 이제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했다. 점장님은 짐작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지수에게 말한다.


“그래, 지수 네가 있어서 정말 좋았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지수가 삐진 듯한 말투로 쏘아붙인다.


“아니, 점장님은 제가 그만둔다고 하니까, 바로 승낙하시네요. 아~ 아쉬워라. 내가 이 편의점에서 이런 존재였나. 간다고 하니 잡지도 않고 말이야.”


점장님이 웃으며 지수를 다독인다.


“아닌 거 알잖아. 사실 나야 평생을 지수 씨 같은 직원과 함께하고 싶지. 하지만 이제 슬슬 지수 씨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온 거 같아서. 나 편하자고 이제 많이 성숙해진 지수 씨를 언제까지 이 좁은 편의점에 가둬놓을 수는 없잖아.”

“점장님이 보시기에 제가 많이 성숙해졌나요?”


점장님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지수 씨, 기억 안 나? 여기 처음 면접 보러 왔던 날 말이야. 참 씩씩하게 소리 질렀잖아. 뽑아만 주면 열심히 하겠다고.”


지수의 얼굴이 붉어진다.


“아이, 점장님은 왜 그런 기억을 끄집어내서 사람 무안하게 해요.”


점장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지수 씨가 없으면 당장은 아쉽겠지만, 나에게는 지수 씨가 더 큰 세상에 나가서 제 몫을 하는 걸 보는 게 더 보람찰 것 같아.”


지수가 새삼스레 편의점의 공간을 둘러본다. 사람들의 주린 배를 언제든지 채워주는 컵라면과 삼각김밥, 더울 때 시원한 음료수를 내어주는 냉장고, 지친 하루를 달래주는 맥주, 종일 서 있었던 카운터, 처음 면접을 보러 왔을 때 서 있던 자리까지. 이 작은 공간에서 보낸 시간이 헛된 시간이 아님을 깨달은 지수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지수의 손끝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인공눈물이 만져진다. 지수가 새삼스레 마지막 하나 남은 인공눈물을 꺼내 들어본다. 힘들었던 시절, 마지막으로 갔던 병원 의사 선생님이 주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일반 인공눈물을 사용했지만,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주었던 특별한 인공눈물이다.

여기 편의점에 올 때만 해도 이 인공눈물이 없이는 불안해 집 밖에도 잘 나가지 않던 던 지수다.

점장님이 지수의 손에 들린 인공눈물을 보고 아는 체를 한다.


"지수 씨, 인공눈물 든 거 오랜만에 보네. 처음 여기 왔을 때만 해도 하루에도 몇 번씩 인공눈물을 넣곤 했잖아."


지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요."

"근데, 요즘은 인공눈물 넣는 거,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제 다 많이 좋아졌나봐."


점장님이 들고 있던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 그만두면 당장 계획은 있어? 어디 다른 회사 면접이라도 볼 거야?”


지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아니요. 당분간 세상 구경 좀 하려고요.”

“세상 구경이라고? 어디 여행이라도 가려고 그래?”


지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여기 대한민국을 벗어나 세계 일주 한번 해보려고요.”

“이거 너무 부러운데, 근데 그중에 꼭 가 보고 싶은 데가 있는 거야?”


지수의 눈이 반짝인다.


“네, 티티카카 호수요.”


점장님이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되묻는다.


“티티카카 호수? 그게 어느 나라에 있는 거야?”


지수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남미 볼리비아에 있는 호수예요, 거의 4천 미터 정도에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호수예요.”


점장님의 눈이 동그래진다.


“아니 그런 높은 곳에도 호수가 있단 말이야? 정말 신기한데.”


호수를 생각하는 지수의 얼굴이 환해진다.


“정말 더 신기한 건 뭔지 아세요?”

“그 호수에 더 신기한 게 있단 말이야?”


지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를 때가 있었거든요. 근데 누군가 제게 가 보고 싶은 데가 있냐고 물을 적이 있어요. 그때 저도 모르게 티티카카 호수에 가 보고 싶다는 말을 했거든요.”


지수가 편의점에 처음 취업했을 때, 전 매니저인 진철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며 말한다.


“근데, 사진으로만 봤던 그 호수가…, 어느새 제가 진짜 가 보고 싶던 곳이 된 거예요. 이제는 그곳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까지 들어요.”


점장님의 얼굴이 진지해진다.


“근데 가 보니 기대한 것보다 막상 별로라고 실망할 수도 있잖아.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지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점장님 티티카카라는 말의 뜻이 뭔지 아세요?”

“……”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라는 뜻이래요. 저도 거기서 다시 새롭게 시작해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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