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의 바닐라라테 :
다시 돌아온 그 자리엔

인공눈물이 마른자리엔 14화

by 노리스 부인

인공눈물이 마른자리엔

지수가 볼리비아로 떠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간 행복동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 정휘가 카페를 차린 것도 그중 하나이다. 정휘는 지수가 일했던 CS 24 편의점 한쪽에 조그맣게 테이크아웃 카페를 차렸다. 따로 장소를 임대하기에는 돈이 모자랐던 정휘는 점장님의 배려로 편의점 한쪽 구석에 문을 내고 카페를 차린 것이다. 물론 작은 공간인 만큼 들어가는 임대료도 정휘가 부담할 수 있을 수준이다.


“맛있는 커피가 있는 카페가 같이 있으면 우리도 좋지, 손님이 더 많아질 거 아냐.”


정휘가 편의점 공간을 쓰게 내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드릴 때 점장님이 한 말이다.


“대신 같은 동업자니까, 내가 먹는 커피는 공짜인 거 알지?”


점장님이 평소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정휘에게 한쪽 눈을 깜박인다.


*


민규가 운전하는 순찰차가 행복동 일대를 순찰 중이다. 경찰 정복을 입은 민규가 차에서 내리기 전 거울을 보며 머리 상태를 점검한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민규가 차에서 내려 한 건물 앞으로 간다.


‘더 행복한 금융’


햇살이 잘 비치는 하얀 건물 1층에 한수가 사장으로 있는 ‘더 행복한 금융’ 사무실이 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 쉰 민규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별일 없으셨죠?”

“이게 누구야, 박 순경 아냐? 아니지, 얼마 전 승진했다며? 그럼 박 경장이라 불러야 하나?”


민규가 손사래를 친다.


“에이, 그냥 편하게 대해 주세요.”


민규가 더 행복한 금융 사무실 안을 둘러본다. 하얀색 페인트로 칠한 벽과 아이보리색 가구가 정갈한 느낌을 준다.


“이거 너무 달라진 거 아녜요? 마치 어디 환한 카페에 온 거 같아서 그래요.”


민규의 말에 한수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 뭐 사채업은 꼭 뒷골목 구석에 어두컴컴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법 있나?”


한수는 이번에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주변 상인들에게 빌려주는 돈의 이자를 대폭 낮춰 주었다. 어떤 경우는 시중 은행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다.


“그래도 사장님이 하는 게 사채업인데, 은행보다 이자가 더 낮으면 어떡해요?”


한수가 고개를 젓는다.


“그렇지 않더라고. 이자가 낮으니까 더 많은 사람이 돈을 빌리러 오고, 빌려준 돈도 더 잘 갚게 되더라고. 전보다 들어오는 수입이 좀 줄긴 했지만, 나도 떳떳하게 얼굴 들고 다닐 수 있게 됐고, 이 정도면 아주 만족해.”


한수가 민규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구석에 새로 경리로 취직한 희주가 얌전히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다. 예전 노랗게 염색했던 머리는 다시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몸이 다 드러나는 원피스 대신 청바지와 티셔츠를 단정하게 입고 있다.

한수가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근에 박 경장, 여기 온 목적이 다른 게 아니라 희주 씨 잘 있나 보러 온 거 아냐?”


한수의 말에 민규의 볼이 붉어진다.


“아, 아, 아닙니다. 저는 여기 근처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돼서 한번 와 본 겁니다. 자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민규가 한수에게 깍듯하게 경례를 붙인다. 한수가 민규를 보고 웃으며 한쪽 눈을 찡끗한다.


“5시 반이야!”

“네? 사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희주 씨 퇴근 시간 말이야. 평소에는 6시인데 오늘은 특별히 5시 반에 끝내줄 테니까, 참고하라고.”


민규가 희주와 눈이 마주친다. 민규처럼 얼굴이 붉어진 희주가 모니터 뒤로 고개를 숙인다. 민규가 웃으며 다시 인사를 한다.


“그럼 이따 5시 반에 다시 순찰 돌러 오겠습니다!”


*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어서 오세요. CS 24 편의점입니다.”

“그래, 정휘야 어제도 별일 없었지?”

“네, 점장님 아무 일 없었어요.”

“미안하다. 전 타임 근무자가 사정이 있다고 해서 정휘 너한테 부탁하게 됐네.”

“에이,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고작 두 시간 일찍 나온 건데요. 뭐.”


정휘가 커피 머신을 조작해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을 내린다. 점장님이 정휘가 건네주는 커피를 들고 눈을 감는다. 부드러운 커피 향이 물씬 풍겨난다.


“아, 너무 좋다. 정휘 너, 커피 내리는 솜씨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어. 내가 인생 말년에 이게 웬 호사냐.”

“에이, 뭘요. 저는 그냥 원두를 좀 좋은 거 쓰려고 신경 쓴 거밖에 없어요.”


정휘의 카페 ‘휘 HWI’는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근처에 커피 맛집으로 소문이 났다. 정휘는 볶은 지 하루가 지난 원두는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커피를 만들었다. 또 우연히 그곳에서 커피를 마신 SNS 크리에이터가 크게 입소문을 내준 덕에 점심 시간에는 대기줄까지 서기도 했다. 주로 찾아오는 손님이 젊은 여자인 걸로 봐서 커피 맛뿐만 아니라 정휘의 외모도 한몫했으리라는 소문도 있다.


딸랑


문이 열리고 가방을 멘 초등학생이 들어온다. 용휘다.


“어서 와라, 용휘야 오늘은 좀 늦었구나. 자 여기 앉거라.”


점장님이 카스텔라 하나와 바나나맛 우유 하나를 용휘에게 내준다. 용휘가 입을 벌리고 크게 한입 빵을 베어 문다. 정휘가 여기서 카페를 하게 되면서 용휘는 매일 아침을 이곳 편의점에서 먹고 학교에 간다. 우유를 마시던 용휘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가방에서 엽서를 꺼내 점장님께 건넨다.


“점장님, 이거 편의점 앞 우편함에 있었어요.”


용휘로부터 엽서를 받아 든 점장님의 얼굴이 환해진다.


“지수구나. 지수야.”

“어디 봐요. 점장님.”


정휘와 용휘, 점장님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 지수가 보내온 엽서를 본다. 새하얀 구름 아래 끝이 없도록 펼쳐진 푸른 호수가 있다.


“우와, 지수 누나, 바다 간 거야?”


정휘가 용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냐, 여기는 호수야, 티티카카 호수라는 곳이야.”


점장님이 엽서를 뒤집는다.



[다들 안녕, 전 지금 티티카카 호수가 보이는 한 봉우리의 바위 위에서 이 엽서를 쓰고 있어요.

하얀 솜털을 올려놓은 듯한 구름, 그리고 누가 호수라고 말해주기 전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넓고 깊은 푸른 호수의 물, 오늘 반나절 동안 이 호수만 보고 있는데도 전혀 질리지가 않네요.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제가 서 있는 곳이 3천8백 미터나 되는 높은 곳이라는 거예요.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호수를 보고 있자니,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선 더 깊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 너무 안지수 답지 않은 말인가요?

이제 내일이면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보려고요. 생각해 보니, 살면서 여기까지 오기, 참 어려웠어요.

처음 그 한 발짝을 내딛기가 정말 어려웠는데, 점장님과 정휘 그리고 다른 많은 분들이 도와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네요. 언젠가, 점장님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정휘가 만든 커피가 마시고 싶은 날이 오면 바로 돌아갈게요.


그럼 이만, 티티카카 호수에서 지수가.]


*


정휘가 창밖을 본다. 지수가 떠난 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 지수가 떠나던 날 편의점 앞 나무에는 봄을 알리듯 나뭇가지에 새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어느덧 그 나뭇잎이 자라 푸른 그늘을 만들어주는 여름이 왔다.


*


다시 반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첫눈치고는 참 눈이 많이 내린 날이다.


“아니 형, 컵라면을 그렇게 쌓아놓으면 안 돼요. 라면 이름이 바로 보이도록 진열해야 사람들이 찾기 편하다니까요.”


용휘가 새로 온 남자 아르바이트생한테 잔소리를 한다. 어느덧 편의점 생활에 익숙해진 용휘는 웬만한 신입 아르바이트생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용휘 저 녀석, 하는 것 좀 봐. 매사에 깐깐한 게, 나중에 점장 되면 그 밑에 애들은 참 힘들 거야.”


점장님이 용휘를 보고 웃으며 말한다. 점장님의 말에 정휘도 같이 웃는다. 순간 카페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주문할게요”


등 뒤의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정휘의 가슴이 두근댄다. 정휘가 목이 멘 목소리로 대답한다.


“손님, 혹시 뜨거운 바닐라 라테인가요? 바닐라 시럽은 반만 넣고, 시나몬 가루 많이 뿌려서….”


정휘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카페 밖을 바라본다.



눈 내리는 카페 앞, 패딩점퍼에 빨간 털모자를 쓴 지수가 두 팔을 벌리고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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