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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현 Sep 11. 2020

겁쟁이 엄마의 100일 자동차 여행기#11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Day 10, 6월 21일 아를(Arles)


하늘은 눈부시게 맑은데, 론강에서 부는 바람은 무척 강한 날이었다.


이 비옥한 지역에도 어김없이 로마인의 흔적이 매우 선명하게 남아있다. 사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프랑스에 수많은 로마의 유적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아를의 원형 경기장은 로마의 두 번째 황제인 Tiberius Caesar Augustus의 명령으로 지어졌다. 2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다.  로마의 콜로세움에 비교할 정도의 규모는 아니지만 2000년 전에 세워진 석조 건조물의 위풍이 아직도 당당하다. 이후 사람들이 경기장의 계단을 빼서 다른 건물을 짓는 데 사용하여, 현재는 곳곳에 펜스를 치고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유적지를 채석장으로 사용하는 패기라니. 원형 경기장은 현재 투우 경기장으로 사용된다. 투우 경기 일정을 알려주는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아를의 고대 로마 원형 경기장
경기장에서는 열리는 투우 경기를 홍보하는 포스터

나는 로마에서 콜로세움을 본 경험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처음 보는 로마시대의 원형 경기장을 좋아했다. 여행 오기 전에 글래디에이터 같은 영화를 보여줄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대신 영화의 줄거리와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전투사들과 사자의 대결, 전차 경주 같은 장면을 설명해주었다. 뭐 그래봐야 나도 영화에서 본 장면이긴 하지만. 경기장의 한 구석에는 견학 나온 듯 보이는 학생들이 모여서 인솔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원래 원형 경기장의 맨 꼭대기 층은 다락방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원형경기장의 맨 꼭대기 계단에서 내려다보면 프로방스 주택 특유의 오렌지빛 기와를 얹은 집들과, 그 너머로 론강이 보인다.


원형경기장 둘레의 통로
유난히 바람이 세게 불던날, 손선풍기 날개가 저절로 돌아간다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원형 경기장 꼭대기에서 바라본 아를의 집들과 멀리 론강





원형경기장을 돌아보고 바로 앞에 있는 야외극장을 방문했다. 반원 형태의 로마식 고대 극장(Théâtre antique d’Arles)에서는 지금도 야외 공연이 이뤄지고 있다. 왕의 문을 상징하는 무대의 높은기둥들은 사라지고 지금은 2개의 기둥만 2000년의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았다. 그 옛날 이 극장에서는 그리스 비극, 코미디, 마임이나 팬터마임을 공연했다. 대부분은 남성이 주요 관람객이었고, 여성과 어린이는 남성과 동반해야 입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낮의 극장은 관객과 무대가 모두 텅 비어 적막감마저 들었다. 잠시 33열의 스탠드에 계급별로 나뉘어 앉아 관람하는 10,000명의 관중을 상상해보았다. 따뜻한 남프랑스의 저녁에 야외극장에서 보는 무대는 당시 가장 재미있는 볼거리 중 하나였겠지. 며칠 후 오헝 주에서 펼쳐질 한밤의 오페라 무대를 상상하며 기대감에 부푼다.

스탠드에 앉아서 2000년전 사람들로 꽉찬 극장과 무대 뒤 배우들의 연기를 상상해본다.
아직도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는 고대 야외 극장의 무대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는 지도를 보지 않고 관광객들을 따라가는 것이 즐겁다. 사실 나는 지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부류이다. 그래서 헛걸음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하지만 나의 우뇌를 신뢰하고 움직일 때 주변의 공간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돌아다니는 아를의 골목길
귀여운 동네 개





좁은 골목길을 내려가다 보면 넓은 광장이 나오고 그 한가운데에 15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어서, 이 곳이 아를의 중심지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광장에 있는  Church of St. Trophime 내부를 통해 지하 회랑(Cryptoporticus)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성당도 아름답지만, 이곳에는 지하 연결 계단을 통해 상상하지 못한 장소로 들어갈 수 있다. 좁은 계단으로 내려가는 어두운 입구는 내가 대학시절에 밤새며 하던 디아블로라는 게임에 나오는 던전으로 가는 입구 같아서 묘하게 긴장되었다. 이 지하 회랑은  두 가지 의미에서 방문할 가치가 충분하다. 첫 번째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그리스인들에 의해 지어진 구조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라는 점이다. 지상의 구조물들을 지탱할 목적과 시 소속의 노예들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시원하다. 무척 시원하다. 습하기는 하지만 작렬하는 여름의 태양빛으로부터 잠시나마 도망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아를의 중심지인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 과 시청사 아래의 지하 회랑, 혼자가기에는 조금 무섭다.





그 유명한 빈센트의 그림에 나오는 카페는 노란색 페인트를 그 세월 동안 몇 번 덧칠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림에 나오는 한적하고 소박하고 낭만적인 카페를 기대했다면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밀려드는 고흐의 팬을 수용하려는 배려로 카페 앞에는 너무 많은 테이블이 놓여 있다. 사진 한 장 찍는 데에 만족하고 고흐의 다른 흔적을 찾아본다. 고흐가 치료받았던 시내의 정신병원에 들러서 그가 그렸던 정원을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공사 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고흐의 노란 카페


빈센트의 마을이니 당연히 빈센트의 이름을 건 미술관이나 박물관 하나쯤은 있으리라. Fondation Vincent van Gogh Arles를 방문했다. 몇몇 낯익은 고흐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피카소 작품을 걸지 않으면 미술관 설립허가를 취소라도 하는지, 미술관마다 피카소의 작품이 한두 개 이상 꼭 걸려있다. 전면을 유리로 만든 현대적인 감각의 미술관 건물과 앞마당, 로비와 복도에 전시된 현대적인 감각의 설치물들이 어쩐지 지금까지 돌아본 아를의 분위기와는 매우 다르다. 아름다운 미술관을 돌아보는 시간은 언제나 비싼 케이크 한 조각을 먹는 것처럼 즐거운 사치이다. 고흐의 작품을 소재로 만든 기념품이 가득한 갤러리 샵도 잊지 말아야 한다.

고흐 박물관 옥상에서
피카소의 자화상, 우리가 상상하던 것보다 프랑스는 피카소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다.









바람이 불어오는 론강, 겨울의 악명높은 미스트랄도 경험해보고 싶다.



고즈넉한 오래된 골목길을 따라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배경인 론강까지 걸었다. 바람에 몸이 날아갈 정도였다. 강가에 위치한 Musée Réattu로 피신을 했다. 오래된 석조 건물이 매력적인 박물관으로 론강의 푸른 물결이 내다보였다. 오래된 로마 시대 유물들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들과 현대적인 조각품까지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관람객이 많지 않아, 아이들과 나 셋이서 오붓하게 오후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더 기억에 많이 남는 곳이다.

아름다운 박물관 건물과 나무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오랜만에 만나 큰 울림을 주었던 두 점의 Jesus 상

 


이날은 유독 바람이 세게 불어와서 여기가 그 유명한 미스트랄(mistral: 프랑스의 론강을 따라 리옹만으로 부는 강한 북풍. 론강의 삼각 지대인 프로방스에서 불어오는 서북풍과 뒤랑스(Durance) 계곡에서 불어오는 동북풍이 합류하는 주변의 바람이 가장 강하다.)이 어떠할지 조금은 짐작이 되었다. 오후가 되어 관광시설이 문을 닫을 때쯤에는 바람이 더욱 거세져서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왜 집집마다 창문에는 덧문이 설치되어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저녁으로는 싱싱한 새우와 배추, 양파, 버섯, 마늘을 넣고 한국에서 특별히 챙겨 온 짬뽕 소스를 넣어 국을 끓였다. 요즘에는 이런 소스류가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어서, 짐도 줄이고 한국의 맛을 즐길 수 있어서 여행 필수품이라 할만하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큰 그릇에 한가득 밥과 국을 말아서 뚝딱 해치웠다. 정말 아이러니지. 외국 여행하기를 좋아하면서 외국에서 맛보는 한국음식은 더 좋아하게 된다.


식재료는 우리나라 물가보다 저렴하다.
짬뽕 소스를 넣고 끓인 짬뽕국. 요즘 마트에는 온갖 종류의 소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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