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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현 Sep 02. 2020

겁쟁이 엄마의 100일 자동차 여행기#2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Day 1. 6월 12일 니스(Nice)  


여행의 시작점을 니스로 정한 것은, 우리의 여행이 6월 초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름의 절정기인 7월 중순이후 프랑스 남부 지방은 너무 더워서 걸어 다니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더위를 피해 점차 북쪽으로 올라가 9월 말에 아일랜드에서 여행을 마치는 일정이다.


니스까지 오는 직항이 없어서, 인천에서 런던 히드로까지 약 12시간 비행 후 다시 니스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니스 공항은 별도의 입국심사를 하지 않았다. 유월의 훈훈함이 가득한 저녁의 니스 공항(Aéroport Nice Côte d’Azur) 은 사람이 많지 않고 한가로웠다. 코트 다쥐르!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는 마력이라니. 공항에서 탄 택시 기사가 나를 마담이라고 불러주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여행하는 내내 이 마담 소리를 백번도 넘게 들었다. 머릿속에는 며칠 후 공항에서 리스한 차를 인수받고, 지금 달리는 이 도로를 내가 직접 운전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몰려왔다. 애써 무시하고 2002년 무려 16년 전 더벅머리였을 때 돌아다녔던 도시를 다시 방문한 감회를 느끼려고 노력했다. 




첫 번째 에어비앤비 숙소로 가는 여정은 다소 힘들었다. 택시는 니스의 해변가에 위치한 올드 타운 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기에 마을이 시작되고 차가 진입할 수 없는 경계선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오래된 마을의 바닥은 작은 돌을 다듬어 만든 길이라 아스팔트 길과는 달리 캐리어를 끌기에는 힘이 더 들었다. 저녁식사와 함께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기에 딱 적당한 시간이다. 식당과 길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지중해를 바라보는 프랑스 최고의 관광지답게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이들은 각자의 배낭과 캐리어를 끌고 묵묵히 엄마 뒤를 따라왔다. 다행히 미리 메신저로 연락한 집주인 아저씨가 친절하게 마중을 나와 주었고, 좁은 계단을 통해 캐리어를 3층의 숙소 안까지 날라다 주었다. 비록 내 돈 내고 내가 묶을 곳이지만, 먼 곳에서 온 손님을 기다려주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기에 손수 짐을 옮겨다 주는 키가 큰 주인아저씨가 눈물 날 정도로 고마웠다. 


튼튼하게 지어진 오래된 건물 안은 시원하고, 널찍한 거실과 필요한 것이 다 갖춰진 부엌과 높은 천장이 마음에 들었다. 거실에 있는 커다란 이중창을 여니 건물들 사이로 어둑어둑한 푸른 하늘과 야자수와 지중해가 보였다. 집 앞은 매일 열리는 꽃과 채소와 음식을 파는 시장 골목이다. 창밖으로는 시끌시끌한 사람들의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짐을 끌고 올 때는 아이들이 너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눈에 들어오지 않던 이국적인 풍경이 이제야 설렘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머물던 니스의 숙소 뒤편의 이웃집들

뒷 베란다에서는 이웃집들의 창문과 널어놓은 빨래, 크고 작은 화분들이 보였다. 아이들이 평생 살아온 아파트와 너무 다른 주거 환경이라 흥미롭게 관찰한다. 아이들은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엄마, 이런 것도 있어.” , “엄마 이것 좀봐!”라고 외치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 그래 정말 좋다!” 


오랜 비행과 환승, 숙소를 찾아오며 느낀 피로감으로 먼저 샤워를 하고 저녁을 해 먹기로 한다. 누룽지와 간편 미역국을 냄비에 모두 넣고 섞어서 끓여 먹으니 속이 편안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해주면 안 먹었을 아이들도 싹싹 한 그릇을 다 비운다. TV에서는 하노이에서 만난 김정은과 트럼프의 얼굴이 연신 비치고 있다. 프랑스 말이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제발 좋은 결말로 이어져 아이들이 20대가 되어 서울에서 유럽까지 기차 타고 배낭여행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밤 10시가 되어도 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다. 밖에서는 여전히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지만 창문을 닫으니 조용했다. 100일 여행의 첫날이구나. 얘들아 여기가 유럽 대륙이다. 



Day-2, 6월 13일 니스(Nice)


다음날은 새벽 5시부터 시장을 여는 상인들의 소리, 골목길을 청소하는 청소차에서 뿜어내는 물소리로 일치감치 마을이 살아났다. 매일 이렇게 활기차게 돌아가는구나. 여독을 풀기 위해 더 늦게 일어나도 될 법 한데, 열 발자국만 나가면 밝은 햇살과 바다와 시장을 볼 수 있는데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카메라와 당장 쓸 돈을 조금 들고 길을 나섰다. 


시장에는 예쁜 꽃들과 이름을 다 알 수 없는 과일들, 식재료들을 팔고 있었다. 아쉽게도 시장을 찍은 사진이 많이 없구나. 사지는 않고 사진을 찍는다고 혹시 상인들이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소심함 때문이구나 싶어서 스스로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난 그 정도로 소심한 사람이다.  그렇게 소심한데 이렇게 길을 나서다니 잠시 나를 칭찬해 준다. 이번 여행 중 내가 세운 원칙 하나가, 완벽하지 않아도 자신을 탓하지 않는 것이다. 항상 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평생을 따라다닌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지 않을까? 특히나 이렇게 돈과 시간을 들여서 하는 일에는 그 목소리가 더 커질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만든 규칙이다. 

이렇게나 다양한 양념을 한 올리브가 있다니! 하나씩 다 맛보고 싶다.
시장 구경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



숙소가 올드 타운에 위치한 덕에 니스의 주요 관광지를 걸어서 갈 수 있었다. 첫날은 여행 온 기분을 만끽하고자 특별한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천천히 걸으며 새로운 곳의 공기를 즐겼다. 사실 이런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특정한 스케줄이 없는 여행지의 첫날! 그 홀가분함과 그 자유로움. 

아이들은 돌을 바다에 던지고, 나는 저기 수영하는 사람이 맞을까 봐 말리고

 니스 해변에서 파도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여행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여행지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또 얼마나 다른가? 26살 회사를 다니 다 답답증이라는 중병에 걸려 탈출하듯 떠나왔던 때가 생각난다. 런던에서 1년을 생활하고, 다시 한국에 가기 전에 유럽을 여행하다, 바로 이 바닷가에도 왔었다. 그때는 한국에 돌아간다 해도 반겨 줄 가족도 없고, 내가 머물 공간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앞으로 무얼 해야 하나 고민했던 것 같다. 무척 외로웠던 것도 같다.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는 아직도 명쾌하게 정해지지 않았지만, 지독한 외로움은 해결되었다. 햇빛을 가득 받은 정수리에서 아직도 달콤한 향이 나는 아이들. 녀석들은 신이 나서 자갈을 끝도 없이 바다에 집어던지는 중이다. 아이들과 함께여서 그런가 쓸쓸한 장소로 기억되었던 니스가 이제는 따뜻하고 볼거리 많은 다정한 곳으로 느껴진다. 

캐슬 힐에 올라서 내려다보는 니스 구시가지와 지중해

캐슬 힐(castle hill)에 올라가서 니스의 올드 타운과 바닷가를 한눈에 내려다보았다. 시원하게 커브를 그리는 해안선과 주황색 지붕들이 빼곡히 모여있는 구시가지와  저 멀리 새로이 들어선 현대식 건물들이 펼쳐져서 니스를 한눈에 보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구시가지와 반대 방향에는 니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데 얼핏 봐도 비싸 보이는 흰색 요트들이 정박해 있다. 




지중해의 눈부시게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한참을 놀았다. 그물로 만든 구조물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즐거워했고, 그걸 바라보는 나도 시차를 잊고 느긋한 휴식 시간을 즐겼다. 앞으로 사 먹게 될 천 개의 젤라토 중 첫 번째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쉬기도 했다.  다시 좁은 골목길과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서, 오래된 마을을 천천히 감상했다. 모든 건물이 100년 이상은 되어 보인다. 현대식 건물은 거의 없다. 시선을 잡아 끄는 커다란 간판도 없다. 일부러 구글맵도 보지 않았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광장이 나오고 성당이 있고 광장 주변에 아이스크림 가게, 피자집, 비누 가게, 프랑스 요리를 파는 식당이 있다. 평일 오전인데 야외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어서 흥겹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앞장서서 걸을 때가 한가롭고 여유로운 날이란 뜻이다. 

사람들을 따라서 이리저리 걷다 보니 어느 새 집 앞 장터에 도착했다. 커다란 팬에 무언가를 부치고 있는데, 꼭 김치전 같은 냄새가 나는 부침개같은 것이었다. 한판에 4유로라 김치전 맛을 기대하며 샀다. 먹음직스러운 체리, 빨간 산딸기, 올리브와 함께 버무린 문어, 수박 1/8 통을 함께 사서 숙소로 돌아와 점심으로 먹었다. 

분명히 멀리서도 김치전 냄새가 났다. 맛은 뭐 김치통 옆을 지나온 밀가루 전? 
마세나 광장(Place Masséna)의 아이들

점심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30분 정도 걸어서 샤갈 박물관(Musée National Marc Chagall)에 갔다. 가는 길에 마세나 광장(Place Masséna)을 지났다. 니스의 카니발이 열리는 장소라고 하는데,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특별한 행사가 없는 평일이어서 인지 한산했다. 광장에서 이어지는 넓은 길에는 현대적인 전차가 다니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유명한 브랜드의 상가들이 많은 것을 보니 니스의 대표적인 거리인 것 같다. 

샤갈의 작품으로 장식한 시청각실, 역시 앉아서 영상 보는 것이 편하다. 

샤갈의 박물관은 낮은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고 건물 앞에는 정원이 있는데 이 정원에 핀 꽃들을 보는 것도 좋았다. 어린아이가 그린 듯 자유로워 보이는 샤갈의 그림들, 그의 사랑과 신앙, 커리어와 동료 화가들의 이야기를 시청각실에서 영상으로도 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영상을 보는 중에는 긴장이 좀 풀리고, 시차 때문인지 살짝 잠이 오기도 했다. 아들은 아예 의자에 앉아 코를 골았다. 샤갈의 그림에는 아내 벨라와의 사랑이 녹아 있는데,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나의 파탄난 결혼과 그 후 나의 자리가 어딘지 몰라 아직도 불안해하는 내 모습이 대비되어 쓸쓸한 마음이 살짝 생겨났다.  

 아직 어린 9살 아들은 샤갈의 그림이나 생애에 관심이 없어서 미술관에 오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한창 생각이 많아진 딸은 샤갈의 그림들을 마음에 들어했다. 나는 이런 박물관을 방문하면 기념품 상점을 들르는 일이 무척 즐겁다. 사실대로 말하면 어떤 때는 전시된 작품을 빨리 보고, 얼른 기프트샵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아름다운 작품을 소재로 만든 각종 책갈피, 노트, 손수건, 책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곳에서 앞으로 아이들이 일기장으로 사용할 노트 두 권을 사고, 저녁때 무료함을 달래 줄 컬러링 북과 작은 퍼즐을 샀다. 



숙소로 오는 길에 마트에서 초밥을 사서 저녁에 라면과 함께 먹었다. 여독이 풀리지 않아 일찍 샤워를 하고 일기를 썼다. 핸드폰 카메라의 사진도 출력할 수 있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아이들이 각자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 일기장에 붙였다. 작고 휴대하기 좋은 이 카메라는 아이들과 함께 여행할 때 정말 유용하다. 한 페이지 정도 일기를 쓰는 것이 이번 여행에서 아이들이 해야 할 유일한 숙제이다. 


아직 창밖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시원한 바닷가에도 광장에도 즐거운 분위기이겠지만 우리는 너무 피곤하다. 시차 적응이 안되었고, 이곳의 여름 해는 10시가 넘어도 완전히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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