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Day 25, 7월 6일 르퓌 엉 벌레이((Le Puy-en-Velay))
스페인 산티아고로 순례길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40여 일간의 도보 여행은 먹고 마시고 걷는 것으로부터 오는 소소한 즐거움과 단순한 일상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산티아고 순례길과 관련한 기사나 사진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것이 큰 낙이었다.
그러던 중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마치 바위산 위에서 솟아 나와 자란 것 같은 작은 교회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그곳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것만 같은 모습이었기에, 저절로 마음속에 깊게 새겨졌다. 그곳은 프랑스의 르퓌 엉 벌레이(Le Puy-en-Velay)라는 도시이며, 스페인의 산티아고로 이어지는 순례길의 프랑스의 출발점 중 하나라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장소가 되었다.
프랑스 여행을 준비하면서 도시 위치를 확인해보았다. 하지만 원래 계획한 루트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서, 일부러 그곳을 들르고 다시 원래 루트로 복귀해야 해서 고민이 되었다. 오헝 쥬에서 자동차로 3시간 넘게 가야 하는 곳이라, 배경 설명을 하고 아이들에게 의사를 물어보았다. 딸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엄마가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곳이면 당연히 가야지.’라고 말해주었다.
먼길을 갈 때는 일찍 서두르는 것이 최선이다. 중간에 티에라는 마을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마을 광장은 크지 않았지만, 장이 서 있었다. 치즈며 과일과 꽃 효모를 넣어 두툼하게 만든 갈색 빵들, 그 맛도 상상이 잘 되지 않는 수십 가지 종류의 햄과 올리브들, 그 지역 작가들이 만든 장신구와 소품들을 팔고 있었다. 광장의 피자집에서 피자로 점심을 먹었다. 반 정도 더 가야 하는데 적당한 곳에서 잘 쉬었다.
적당한 시점에 적당한 장소에서 잘 쉴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모든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할 때 행운이 된다. 그런 생각이 더 많은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이 마을을 지나면서 곧바로 구불구불한 경사로가 시작되었지만, 도로가 넓고 왕복 4차선이라 편하게 운전할 수 있었다. 산을 넘고 나니 완만한 내리막길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따라온 N102도로에서 N88번 도로로 바뀌었는데, 여기서부터 목적지까지 가로막는 산이나 건물이 없이 드넓은 구릉 지대가 펼쳐졌다.
푸른 초원에 그림 같은 집들과 소와 양들이 우리가 그려보는 낙원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중간중간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고, 멀리 마을의 낮은 집들이 보였다. 다시 한번 꼭 달려보고 싶은 도로이다. 무엇보다 오가는 차량이 많지 않아서 더 마음 놓고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이번 숙소는 도시의 높은 지대에 있는 성당(Cathédrale Notre-Dame-du-Puy) 정문에서 경사로를 따라 약 100미터 내에 있는 에어비엔비였다. 친절한 주인아저씨가 와이파이, 세탁기 사용법, 주방 싱크대에 뭐가 있는지 일일이 보여주셨다. 창문 밖으로 곧게 뻗은 올드 타운의 오래된 길과 집들, 오가는 관광객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위치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밤 10시에는 주변 성당과 유적지들에 불빛 쇼가 벌어지는데, 이 숙소는 어디든 걸어서 마음 놓고 편하게 돌아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어떤 사람이 예약했나, 아 바로 나로군!!!
집 바로 앞에는 주차할 수 없는 곳이라, 5분 정도 떨어진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꼭 필요한 물건만 챙겨서 왔다. 딸이 작은 밥통이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오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뜨려서 뚜껑에 금이 가고 말았다. 순간 버럭 화를 냈다. 실수할 수 도 있는 건데, 나는 마치 아이가 일부러 떨어뜨린 것처럼 화가 났다. 딸에게 금방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어서 너그럽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이들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이 마을은 산티아고 순례길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르 퓌 앙 벌레(Le Puy-en-Velay)의 퓌(puy)는 ‘높이’라는 뜻이다. 이 도시에 들어서면, 내가 감동한 사진 속의 Rocher St. Michel D'Aiguilhe 성당이 세워진 화석 암과 사암 봉우리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성(Statue de Notre-Dame de France)이 서 있는 꼬르네유(Corneille) 바위 두 산이 낮은 건물들 위로 우뚝 솟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마 이런 지형적인 특징으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사진 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던 곳에 직접 와 봤을 때의 느낌은 정말 특별하다. 이 넓은 지구 위에 한 점, 한 도시까지 올 수 있게 되었음에 깊은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성당은 내일 오전에 상쾌한 기분으로 오르기로 하고, 오후에는 성모 마리아 성과 바로 집 뒤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을 방문하기로 한다.
성모 마리아상은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의 대폰 213문을 녹여서 만든 것으로 상이 서 있는 받침대를 포함하여 약 835톤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마리아는 뱀을 발로 밟고 있고 오른팔에 아기 예수를 안고 세상을 축복하고 있다. 받침대에는 금빛 글자로 ‘SALVE REGINA(여왕이시여)’라고 적혀있다. 동상의 내부는 비어 있으며, 나선형 계단 107개를 통해 마리아의 면류관 부분까지 접근 가능하며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볼 수 있다.
이곳이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르 퓌 앙 벌레(Le Puy-en-Velay) 시내 전체와 외곽의 산과 건너편 Rocher St. Michel D’Aiguilhe, 노트르담 성당과 주교성, 그리고 높은 종탑의 웅장한 모습도 모두 눈 아래에 펼쳐진다. 도시는 온통 붉은 지붕의 물결이다. 숨이 잠시 멎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다.
날렵한 아이들이 먼저 나선 계단을 오르고, 좀 느린 나는 뒤에서 천천히 따라 올라갔다. 즐거운 여행을 위한 필수 조건은 무엇보다 기본 체력이다. 맨 꼭대기에는 사다리가 고정되어 있고 동그란 돔으로 하늘과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 나는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아이들은 무서워하는 엄마를 놀리느라 재미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나는 그 후로 좀 더 겁이 없는 엄마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패러글라이딩과 돌고래와 바다 수영하기, 100미터 동굴 밧줄 타고 내려가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올라왔던 모든 계단을 내려와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노트르담 드 라농시아시옹성당(Cathédrale Notre-Dame-de-l'Annonciation du Puy-en-Velay)을 방문했다. 성당은 로마 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있어서, 외관이 프랑스 전역에 있는 고딕 양식 성당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이 성당은 프랑스인이 좋아하는 성지 2위에 오른 적도 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성당 내부는 넓고 다른 성당들과 비교해도 매우 진지하고 경건한 분위기였다.
성당에는 루이 왕(Saint Louis)이 십자군 원정 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증했다는 검은 성모(Vierge noire) 상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검은 성모상은 프랑스혁명 당시 훼손되어 만든 복사본이다. 기원전 3세기경 어떤 부인이 성모 마리아의 지시에 따라 산 위의 커다랗고 검은 현무암 위에 누웠더니 병이 치유되었다고 한다. 지금 성당 안에는 그 전설의 발현의 돌(pierre des fièvres)도 전시되고 있다. 성당 내부는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어서 찍지 못했다.
성당의 아치로 된 정문 안에서 경사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높은 곳에 위치한 성스러운 성당이 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 아래의 백성들을 내려다보는 모양새이다. 몇 년간 내가 애써 외면하고 모른척하고 있는 신에 대한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 나는 아직 그 주제를 다룰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숙소에서 한 시간 가량 휴식을 취했다. 마을 안에 위치한 숙소는 이런 점에서 매우 유리하다. 열심히 구경하고 피곤하면 잠시 와서 푹 쉴 수 있으니. 이 오래되고 유서 깊은 마을의 가장 좋은 위치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재미가 있다. 비탈길을 올라 성당과 마리아 상을 보러 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일층의 상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상점 직원들도 보인다.
다시 기운을 회복하여 이번엔 비탈길 아래로 시내방향으로 나가본다. 레이스를 파는 가는 실을 감은 손가락 굵기의 실패를 이리저리 움직여서 정교한 레이스를 만들고 있는 여성분을 발견했다. 어떻게 하는 건지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한 땀 한 땀 레이스를 짜고 있다. 이 지역이 예로부터 이런 레이스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세심하고 다정한 지인이 생각나서 순백의 손으로 만든 작은 레이스 덮개를 하나 구입했다.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내려간다. 시청을 지나 검색한 태국 식당에서 쌀밥과 소고기 볶음과 팟타이를 먹었다. 당연히 와인 한잔을 빼먹을 수 없다. 오늘은 좀 더 특별한 날이다. 오랫동안 와보고 싶었던 곳에 아이들과 함께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와 아저씨가 친절하게 펼쳐두고 가신 소개 책자에서 유적지마다 불빛을 비추는 행사가 시작되는 시각을 확인했다. 열 시가 넘어야 해가 지기 때문에 씻고 편안하게 기다린다.
첫 시작은 바로 집 앞 성당이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온다. 성당 건너편 건물에 설치한 장비로 성당 정면에 아름다운 불빛 쇼를 비춘다. 눈이 내리기도 하고 사슴이 나타나기도 하고, 보랏빛, 푸른빛, 다양하게 연출하니 신비롭다.
다시 사람들이 움직인다. 그 행렬을 따라 이번에는 Rocher St. Michel D’Aiguilhe 가 보이는 언덕 쪽으로 이동한다. 화산섬과 성당 표면에 용이 불을 뿜는 장면, 꽃들이 만개하는 장면 등의 환상적인 불빛 쇼를 보여준다. 어둠 속에 마치 성당과 바위산이 공중에 떠 있는 듯이 보이고, 완성도 있는 불빛 쇼는 잠시지만 우리를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가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데 아이들이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먼길을 오느라 모두 피곤하여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