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처음부터 대화가 필요했던 건 아니야.
너는 천 마디의 문장을 입으로 말하기보다 더 많은 단어를 눈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인 걸.
넌 내가 바라던 누군가였고 무엇도 바랄 수 없던 순간에 나타나준 기적이었어.
이 사실을 네가 알았다면 지금 내 곁에, 아니 내 곁이 아니더라도 내가 느낄 공기에 존재해 줬을까?
마음이 다치면, 몸은 그걸 너무나 늦게 알아채지.
나는 늘 아물지 않는 상처가 온몸에 가득했고, 어떤 약도 소용이 없었어.
너의 온기와 손짓 한 번이면 그제야 낫기 시작했잖아.
그걸 그렇게 잘 알고 있는 네가 “괜찮아?"라는 질문만 하면 난 그 말에 더 아파야 했어.
그래서 내가 너의 눈으로 단어를 읽는 게 두려워졌는지도 몰라.
여전히 온기 가득한 너의 눈과 말이 너무 다르거든.
어떤 말은 아프도록 날카로웠고 삼키는 목소리로 물어보던 안부를 알아차렸을 땐 넌 사라진 후였어.
심장이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어.
이제 더는 못하겠다고 백기를 들었지. 바보 같은 난 네가 그 백기선언을 보고 돌아봐주길 바란 것 같아.
그럴 리가 없는데.
오랜 시간 뒤 눈물로 굳은 나에게 말없이 사람이 다가왔어.
더 이상 울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껴안아주며 곁에 앉아 날 지켜줬지.
그 침묵은 작고 따뜻하고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불빛이었어.
내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 것이 고마운 건 처음이었어.
그러니까, 말이 없어서 좋았던 날도 있었어.
늦어버린 다정함의 얼굴을 알고 있어.
죄책감과 미안함을 잔뜩 달고 오는 그 표정에 되려 내가 미안해졌지.
그런 낯선 마음은, 내 상처 위에 이름을 다 새기지도 못한 채 도망쳤어.
그러니 나를 온기를 둔갑한 동정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돼. 너의 죄책감을 끌고 오지 않아도 난 괜찮아.
행동과 말이 따로 놀아나는 것은 끝나지 않을 거야.
단 한 번도 마주쳐본 적 없는 평행선처럼 나를 빙글빙글 돌며 지켜볼 것도 알고 있어.
그런 마음으로 나를 보고 있다간 정말 모든 게 늦어버릴 거야.
이제는 알아. 내가 말하는 온기는 너무 늦어도 한 번은 꼭 와야 한다는 걸.
너의 눈으로 나에게 보내는 무수한 단어보다 난 너의 온기 한 번, 말 없는 위로 한 번이 더 필요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