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라는 이름의 문화사 — 사자의 이빨에서 봄의 약초까지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정주행했다. 드라마 속 간호사 중 한 명의 이름이 '민들레'더라. 동료들이 '들레 쌤' 하고 부를 때마다, 참 예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민들레의 영어이름은 'dandelion'인게 떠올랐다.
dandelion [댄딜라이언]
왜 영어로는 그렇게 부르는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dandelion 단어를 빤히 보고 있으니 뭔가 보이는 게 있었다. dan - de - lion 이렇게 분절하면 프랑스어처럼 보였다. 역시나, 찾아보니 프랑스어로도 민들레는 dent-de-lion이었다.
이 단어는 원래 프랑스어를 거의 그대로 차용한 거였다.
프랑스어로 민들레는
dent-de-lion
[당드리옹]
발음은 다르지만 철자는 영어와 거의 똑같다.
프랑스어로 dent[당]은 '이빨'을 뜻한다. de[드]는 영어의 'of'에 해당하는 전치사고, lion[리옹]은 영어와 마찬가지로 '사자'라는 뜻이다.
그럼, 셋을 다 합치면?
'사자의 이빨'
민들레 잎의 뾰족한 모양이 사자의 이빨처럼 생겼다고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참고로, dent는 치아라는 뜻의 라틴어 dēns[덴스]에서 유래한 단어다. 영어로 치과의사를 dentist[덴티스트]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어원이다.
프랑스어 dent-de-lion을 영어에서는 dandelion으로 살짝 고쳐 쓰고 있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하필 '사자의 이빨'일까? 단순히 잎이 뾰족해서일까?
사실 이 이름은 더 깊은 곳에서 왔다. 프랑스어 표현 이전에, 중세 라틴어에서 이미 민들레를 dens leonis(사자의 이빨)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명명은 로마 제국의 세계관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로마 제국에는 야생 사자가 살지 않았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등 정복지에서 사자를 수입해 콜로세움의 맹수쇼에 사용했다. 로마인들에게 '사자'는 '제국의 힘, 지배, 정복의 상징'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맨손으로 물리친 네메아의 사자, 미트라교에서 숭배한 태양과 불의 화신, 로마 군단의 문양에 새겨진 권력의 표상. 사자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고대 서양인에게 '강인함과 생명력'의 상징이었다.
기독교 시대로 넘어와서도 사자는 이중적 의미를 지녔다. 유다의 사자로서 정의와 부활을 상징하기도 했고, 베드로전서에서는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악마의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dens leonis라는 이름은 단순히 잎의 형태를 묘사한 게 아니었다. 작은 풀 한 포기에도 로마인들이 느낀 자연의 야성, 강인한 생명력, 그리고 경외감이 담긴 이름이었던 셈이다. 사실 이 이름은 로마인들이 당시 얼마나 사자에 집착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땅에 살지도 않는 동물을, 멀리서 수입해와 제국의 상징으로 삼고, 심지어 길가에 피는 작은 풀의 이름에까지 사자를 갖다 붙였으니 말이다.
스페인어에서는 diente de león(사자의 이빨), 이탈리아어에서는 dente di leone, 독일어에서도 Löwenzahn(사자의 이빨)라고 부른다. 유럽 전역이 똑같은 비유를 공유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동아시아에서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민들레를 불렀다는 거다.
중국에서 민들레는 蒲公英(포공영, pú gōng yīng)이라고 한다. '사자의 이빨' 같은 비유가 아니라, 소리를 빌린 음차에 가깝다.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에도 등장하는 이 이름은, 열을 내리고 독을 풀고 이뇨를 돕는 약초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인들에게 민들레는 '자연의 치유력과 해독'의 상징이었다. 유럽의 '사자의 힘'과는 정반대의, 관계적이고 기능 중심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일본에서는 タンポポ(탄포포)라고 부른다. 중국식 한자 蒲公英을 쓰기도 하지만, 발음은 일본 고유어에서 나온 의성어·의태어적 리듬이다. 일본 문화에서 민들레는 '봄, 순수함, 소박함의 상징'이다. 꽃말은 '진심', '행복', '재회의 약속'이다. 애니메이션과 시, 노래 제목에도 자주 등장하며,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상징성이 강조된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순우리말 '민들레'로 부른다. 어원은 '민들민들하다'(부드럽게 흔들리다, 살짝 떠다니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꽃씨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담은, 참 우리다운 이름이다.
민들레는 한국에서 '끈질긴 생명력, 소박함, 자연의 순환을 상징'한다. 도시의 틈새나 돌길 사이에서도 피어나는 '생활 속의 강인함'을 나타내는 꽃이다.
같은 꽃 하나를 두고, 로마인은 사자를 떠올렸고, 중국인은 약초를 생각했으며, 일본인은 봄의 감성을 느꼈고, 한국인은 바람에 흩날리는 씨앗을 봤다.
민들레는 전 세계 어디서나 흔한 꽃이다. 하지만 그 이름 속에는 각 문화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인간의 사유와 언어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은 꽃 하나에도, 이렇게 긴 이야기가 숨어 있다.
다음에 민들레를 보면,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이 작은 꽃이 dandelion이 되기까지, 蒲公英이 되기까지, タンポポ가 되기까지, 그리고 민들레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이 겹쳐졌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