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를 발음하지 않는 영어 단어들의 비밀
메모를 하다가 문득 손이 멈췄다.
I know.
'알아'라는 뜻으로 습관처럼 써 내려가던 단어, know.
참 희한하게 생긴 단어다. 철자는 분명히 k-n-o-w인데, 발음은 [노우]다. k는 대체 왜 있는 걸까? 장식용인가?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영어를 배울 때부터 늘 그냥 넘어갔던 의문이었다. "영어는 원래 불규칙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그런데 영어를 가르치면서, 이 단어를 마주칠 때마다 궁금증이 되살아났다. 대체 왜 발음하지도 않을 글자를 붙여놓은 걸까?
know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단어들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됐다.
knee (무릎) - [니]
kneel (무릎 꿇다) - [닐]
knight (기사) - [나이트]
knife (칼) - [나이프]
knock (두드리다) - [녹]
knot (매듭) - [놑]
모두 'kn-'으로 시작하는 단어들. 그리고 모두 k를 발음하지 않는다.
패턴이 보였다. k 다음에 n이 오면 k는 침묵한다. 하지만 왜? 이 질문은 나를 천 년 전 영국으로 데려갔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옛날 영국인들은 k를 발음했다.
know는 [크노우]였고, knight는 [크닛트]였다. 지금 우리가 아는 발음과는 전혀 달랐다. 14세기 영국에서 제프리 초서가 《캔터베리 이야기》를 쓸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knight를 [크닛트]라고 발음했다.
그럼 언제부터 k가 사라진 걸까?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프랑스어가 영국 지배층의 언어가 되면서 영어는 큰 변화를 겪었다. 프랑스어에는 발음되지 않는 철자가 많았다. 그 영향도 있었겠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들이 귀찮아했다.
[크노우]보다 [노우]가 편했다. [크닛트]보다 [나이트]가 쉬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k 발음은 사라졌다. 하지만 철자는 그대로 남았다.
재미있는 건, 독일어를 보면 영어의 과거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어로 무릎은 'Knie'다. 발음은 [크니].
매듭은 'Knoten'이다. 발음은 [크노튼].
독일인들은 천 년 전 발음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영어와 독일어는 같은 게르만어족 뿌리에서 나온 언어다. 하지만 영어는 발음이 변했고, 독일어는 변하지 않았다.
영어의 철자는 박물관 같다. 천 년 전 발음의 흔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쓰는 know라는 단어 안에는, [크노우]라고 발음하던 먼 옛날 사람들의 목소리가 화석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영어를 가르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언어는 게으르다. 아니,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게으르다. 우리는 항상 더 쉽게, 더 편하게 말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복잡한 발음은 단순해지고, 어려운 소리는 생략된다.
한국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는 "그게"가 되고, "무엇을"은 "뭘"이 된다. 이게 자연스럽다. 언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말'은 변해도 '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인쇄술이 발명된 후로는 더욱 그렇다. 서양은 독일의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발명되어 15세기에 철자가 고정되면서, 영어는 발음과 철자가 다른 언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영어가 어려운 것이다. 철자는 중세를 기억하고, 발음은 현대를 산다.
know의 k 하나 때문에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게 영어 공부의 재미다. 단순히 외우는 게 아니라, 왜 그럴까 질문하는 것. 그 질문이 나를 역사 속으로, 다른 언어 속으로, 그리고 인간의 본성 속으로 데려간다.
언어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어떤 발음이 편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어떤 역사를 겪었는지. 모든 게 언어 속에 담겨있다.
다음에 know를 쓸 때, 잠깐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 작은 단어 안에 천 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침묵하는 k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영어 공부를 하다 보면, 가끔 이렇게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돌아올 때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더 넓어져 있다.
세이지의 한 줄
발음은 변해도 철자는 남는다. 우리가 쓰는 언어 속에는 우리가 잊은 시간이 살아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