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자와 소문자의 기원을 찾아서
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며 노트에 메모를 하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영어는 A와 a, 두 가지를 다 쓰는 거지?
한글은 'ㄱ'이면 'ㄱ' 하나잖아. 크게 쓰든 작게 쓰든 'ㄱ'은 'ㄱ'이다. 그런데 영어는 같은 글자를 두 가지 모양으로 쓴다. 문장 첫 글자나 고유명사에 대문자를 쓴다는 문법 규칙은 알고 있지만, 그건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답이지 '왜 두 가지 모양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답은 아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어 알파벳에 대문자와 소문자가 생긴 이유를 파헤쳐 보기로 했다.
'알파벳(Alphabet)'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리스어 첫 두 글자인 알파(Α)와 베타(Β)를 합친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히브리 문자를 '알레프-벳', 아랍 문자를 '알리프-바'라고 부르는 것처럼, 문자 체계를 그 언어의 첫 두 글자로 부르는 전통은 고대 셈족 언어권부터 내려온 관습이다. (만약 한글을 이런 식으로 불렀다면 '기역니은'이 되었겠군!)
지금 우리가 쓰는 영어 알파벳은 흔히 '로마 알파벳(Roman Alphabet)'이라고 불린다. 그렇다고 로마인들이 알파벳을 발명한 건 아니다. 한글처럼 특정인이 특정 시기에 만든 게 아니라, 기나긴 역사적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간단히 계보를 따라가 보면 이렇다.
이집트 상형문자 → 시나이 원시 알파벳 → 페니키아 문자 → 그리스 문자 → 라틴 문자 → 영어 알파벳
기원전 1050년경, 지금의 레바논·시리아 지역에서 페니키아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실용적인 자음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스인들이 이걸 받아들여 모음 기호를 추가했고, 이것이 인류 최초의 완전한 '알파벳 시스템'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이 그리스 문자를 여러 차례 수정하고 발전시켰고, 로마제국의 영향력과 함께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재미있는 건, 알파(Α)는 원래 페니키아어로 '알레프(소)'를, 베타(Β)는 '베트(집)'를 뜻하는 상형문자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쓰는 A, B, C는 사실 기원전 1000년경 페니키아 상인들이 새긴 소와 집 모양의 후손인 셈이다.
고대 로마 시대(기원전 1세기~서기 4세기), 사람들은 돌이나 청동에 글자를 새겼다. 종이가 없던 시절이니까. 이때 사용된 서체를 'Capitalis Monumentalis', 즉 기념비용 캐피탈리스라고 부른다. 로마의 트라야누스 기둥(Trajan's Column)에 새겨진 'SPQR' 같은 글자가 대표적이다.
자, 상상해 보자. 돌에 문자를 새긴다면 직선이 쉬울까, 곡선이 쉬울까? 당연히 직선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글자는 모두 직선적이고 각진 형태였다. 정사각형 안에 꽉 차게 새겨 넣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Roman Square Capitals'라고도 불렀다.
이때는 오로지 대문자만 존재했다. 대문자는 '기념비용, 공적 기록용' 서체로서의 기능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다 양피지(parchment)와 파피루스(papyrus)에 손으로 글을 쓰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돌에 새길 때는 모양이 중요했지만, 깃털 펜으로 쓸 때는 속도와 효율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로마 후기(3~5세기)에 등장한 것이 'Roman Cursive', 즉 속기체다. 사람들이 편지를 쓰거나 문서를 베낄 때, 직선 대신 부드럽게 이어지는 필기체 형태를 쓰게 되었다. 물론 이때는 아직 이걸 '소문자'라고 구분하지 않았다. 그냥 재료가 다르니 거기에 맞게 편한 스타일로 바꿨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필체가 세월이 흐르며 점점 더 흘려쓰기로 변해갔고, 서기 8~9세기경 '카롤링거 소문자(Carolingian minuscule)'라는 형태로 정착된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소문자'라고 부르는 글자의 직접적 조상이다.
8세기 말~9세기 초,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Charlemagne) 황제는 서유럽 전역에 걸쳐 문서를 표준화하려 했다. 당시 수도사 알퀸(Alcuin of York)이 가독성 좋은 통일 서체를 개발했는데, 바로 카롤링거 소문자다.
이 서체는 지금 우리가 쓰는 소문자(a, b, c...)와 거의 비슷하다. 동시에 문서의 제목이나 문장 첫머리에는 여전히 고전 로마 대문자를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문서 안에 두 종류의 글꼴이 공존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대문자 vs 소문자'라는 구분이 실질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필경사들은 오래된 라틴어 문서들을 옮겨 적으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나 강조하고 싶은 곳은 고대 라틴어 스타일(대문자)로 적고, 나머지는 카롤링거 소문자로 적는 식으로 자유롭게 섞어 썼다.
15세기,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기를 발명하면서 손으로만 쓰던 시대는 끝이 났다.
인쇄공들은 '대문자용 활자 세트'와 '소문자용 활자 세트'를 따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 활자들을 각각 다른 서랍(box)에 보관했는데, 윗서랍(upper case)에는 대문자 활자를, 아랫서랍(lower case)에는 소문자 활자를 넣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대문자를 'Uppercase', 소문자를 'Lowercase'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대문자는 문장의 첫 글자, 고유명사, 제목 등 '강조'나 '시작'을 표시하는 용도로 규칙화되기 시작했다.
현재처럼 문장의 첫 글자나 성명, 도시명, 국가명 같은 단어의 첫 글자에 대문자를 쓰도록 하는 문법적 규칙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보면 대문자와 소문자 활용이 비교적 랜덤하게 일어났다. 딱히 정해진 규칙이 있던 게 아니라, 그저 강조하고 싶은 곳에 대문자를 쓰는 식이었다.
그러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문법학자들이 이 규칙들을 공식화하며 정리에 들어갔고, 지금 우리가 쓰는 문법 규칙이 만들어졌다.
결국 대문자와 소문자의 공존은 '글씨 크기의 차이'가 아니라, 서체의 역사적 진화 과정이었던 것이다.
돌에 새기던 문자가 종이에 쓰는 문자로 변하면서, 속도와 효율을 위해 형태가 변했고, 필경사들이 강조와 구분을 위해 두 가지를 섞어 쓰면서 자연스럽게 분화된 것이다.
언어는 계속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의 편의와 필요에 의해 변하는 유기체다. 앞으로 영어 알파벳뿐만 아니라 한글의 모습도 어떻게 변해갈지는 또 모르는 일이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시작한 의문이 기원전 페니키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영어 공부를 하다 보면 이렇게 역사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게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