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철자와 발음이 따로 노는 이유
영어 공부하다 보면 가끔 이런 순간이 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싶은 순간들 말이다.
tough [터프], though [도우], through [쓰루]
철자는 똑같이 'ough'인데 발음은 완전히 다르다. 처음 이 단어들을 배울 때 나는 진심으로 영어를 만든 사람들을 원망했다. 대체 왜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야? 규칙 하나 제대로 못 정해놓고?
근데 말이다. 공부를 하다 보니 이게 단순히 '영어가 원래 그래'로 끝날 문제가 아니더라. 여기에는 꽤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이 숨어 있었다.
우선 ough가 어떻게 발음되는지부터 정리해보자.
[어프]로 발음되는 경우
cough [커프] 기침
tough [터프] 강한
rough [러프] 거친
enough [이너프] 충분한
[오우]로 발음되는 경우
dough [도우] 반죽
though [도우] 비록 ~일지라도
bought [보우트] 샀다
thought [쏘우트] 생각했다
brought [브로우트] 가져왔다
[아우]로 발음되는 경우
plough [플라우] 쟁기
bough [바우] 나무의 큰 가지
[어]로 발음되는 경우
thorough [써러] 철저한
borough [보러] 자치구
[우]로 발음되는 경우
through [쓰루] ~을 통해
정리하고 나니 더 황당하다. 하나의 철자 조합이 최소 다섯 가지 이상의 발음을 가지고 있다니.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이 혼돈의 시작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맞물리면서 영어 철자와 발음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괴리가 생겨버렸다.
첫 번째 사건: 인쇄술의 도입
1450년경, 신성로마제국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다. 이 혁명적 기술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수십 년 후인 1476년, 영국의 윌리엄 캑스턴이 영국 최초로 인쇄기를 도입한다.
인쇄술의 도입은 단순히 책을 빨리 찍어낼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바로 '철자의 고착화'였다. 인쇄된 철자는 돌에 새겨진 것처럼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한번 정해진 철자는 책으로, 문서로 고정되어버렸다.
문제는, 철자는 고정되었는데 발음은 계속 변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사건: 모음대추이(The Great Vowel Shift)
바로 이 시기,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영어 역사상 가장 극적인 발음 변화가 일어난다. 제프리 초서가 쓰던 중세 영어에서 셰익스피어 시대의 초기 현대 영어로 넘어오면서, 모음의 발음이 대대적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타이밍이 기막혔다. 인쇄술로 철자가 고정된 바로 그 시점에, 발음은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사진을 찍는 순간 피사체가 움직여버린 것처럼.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철자를 보고 발음을 유추할 수 없고, 발음을 듣고 철자를 짐작할 수 없는. ough를 만날 때마다 사전을 찾아야 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불규칙성이 영어를 배우기 어렵게 만든다고 불평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혼돈 속에서 묘한 매력을 발견한다.
영어에는 '표준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미국식, 영국식, 호주식... 각자가 조금씩 다르게 발음하고, 그 모두가 '맞는' 영어다. 우리가 CNN이나 BBC에서 듣는 발음을 표준어처럼 느끼는 것일 뿐, 공식적인 표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ough의 혼돈은 영어라는 언어가 가진 본질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완벽한 규칙으로 통제되기보다는,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 숨 쉬는 언어. 시대를 거치며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는 언어.
결국 답은 간단하다. 새로운 단어를 만날 때마다 사전을 찾아 정확한 발음을 듣는 것. 규칙을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하나하나 익숙해지는 것.
처음에는 답답했던 이 과정이, 지금은 나름 재미있다. 단어 하나를 찾아볼 때마다 그 속에 담긴 역사의 한 조각을 만나는 기분이랄까. tough를 발음할 때마다 15세기 인쇄술 혁명과 모음대추이가 떠오른다면, 영어 공부가 조금은 덜 지루해지지 않을까.
언어를 배운다는 건, 결국 그 언어를 사용해온 사람들의 역사를 배우는 일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