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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무엇을 감추는가

'기록'이라는 특권 넘어 지워진 존재들. . .

by 세이지SEIJI

중학교 국사 시간, 나는 교과서에 적힌 모든 것이 절대적 사실이라고 믿었다. 연도, 인물, 사건. 그것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고,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승리했으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다. 책에 적혀 있으니까,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마흔을 지나며 인문학 수업을 하고, 책을 읽고, 생각을 거듭하면서 깨달았다, 역사란 '기록되어진 것들의 모음 + 주관적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기록 뒤에는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감춰져 있고, 지워져 있다는 것을.



역사는 해석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일생 동안 수많은 강을 건넜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책에 남은 것은 단 하나, '루비콘 강 도하'뿐이다. 왜일까? 후대의 역사가들이 그 순간에 "공화정의 종말, 제정의 시작"이라는 거대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누군가의 선택과 해석을 거쳐 비로소 '역사'가 된다.

E.H. 카는 또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알기 전에, 역사가를 먼저 알아라."

역사는 언제나 누군가의 필터를 거쳐 전달된다. 그 사람이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가 역사 해석에 고스란히 담긴다. 역사란 결국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우리가 현재의 문제의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과거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역사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다.



우리가 아는 이름, 우리가 모르는 삶

우리는 모두 안다, 1440년대, 신성로마제국의 요하네스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했다는 것을. 그의 이름은 교과서에 굵은 글씨로 박혀 있고, '인류 문명사의 전환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말년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구텐베르크는 인쇄기를 만들기 위해 막대한 빚을 졌고, 결국 채권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인류 역사를 뒤흔든 발명의 혜택은 정작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가난하게 죽었고, 그의 인쇄기로 돈을 번 것은 그의 인쇄소에서 일했던 다른 자들이었다. (특허 개념이 없던 시대 이런 일이 많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가 발명했다는 사실까지 도둑 맞지는 않았다)

역사는 '구텐베르크의 발명'은 기록했지만, '구텐베르크의 비참한 말년'은 기록하지 않았다. 업적은 남지만, 그 뒤의 착취와 소외는 지워진다. 이것이 역사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더 불편한 진실도 있다. 역사적 인물의 90% 이상이 남성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역시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한가 보다."

천만의 말씀.

'기록'이란 것 자체가 엄청난 권력과 특권을 증명할 뿐이다. 글을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층의 표식이었고, 내가 쓴 무언가가 보존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거의 통틀어 여성은 귀족이건 평민이건 온전한 시민으로 대우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성 작가들은 실명 대신 남성 필명으로 소설을 출판해야 했고, 연구하고 사유할 권리는 오직 귀족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불과 수십 년 전만해도, "여자가 공부해서 뭐 하냐, 시집이나 가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던 시대 아니었던가.

발명가, 철학가, 정치사상가의 이름을 볼 때마다 나는 점점 더 불편해진다. 마치 그가 유일하고 최초로 그런 생각을 한, 홀로 깨우친 천재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그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그 사람만이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다만 기록될 권리, 인정받을 권리가 그에게만 있었을 뿐. 그래서 나는 이렇게 쓰였으면 한다. "OOO은 최초로 OOOO한 사람이었다"가 아니라, "OOO은 OOOO한 사람으로서 최초로 기록된 인물이다"라고. 한 문장의 차이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이들이 다시 숨 쉴 공간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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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가설이다

최근 나는 실험 삼아 내 인생 40여 년의 연대기를 작성해봤다. 각 연도별로 있었던 하이라이트를 쭉 적어 내려갔다. "1982년 OOOO에서 태어나다. 1989년 국민학교에 입학하다 . . . " 그것은 '나의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안다, 거기에 적힌 사건들은 내 삶의 사실 중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얼마나 많은 순간이 지워지고, 얼마나 많은 감정이 생략되었는지. 내 인생이니까 '나'는 안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역사는 이 드넓은 지구에서 아주 일부 지역의, 아주 일부 계층의, 극소수 사람들의 기록일 뿐이다. 그것이 결코 인류 전체의 행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

사실 역사도 하나의 가설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아주 먼 훗날 인간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직접 목격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당시의 전부를 절대 다 알 수 없다. 기록된 아주 작은 단서를 토대로 유추하고 상상할 뿐이다. 여러 추론 중 가장 그럴듯한 상상을 '사실'인 것처럼 서술할 뿐이다.

그리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기존의 역사적 가설들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곤 한다. 새로운 가설이 세워진다. 하지만 교과서나 대중 역사서에서는 그런 정정과 수정이 굉장히 천천히 진행된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서술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감춰진 것을 질문하는 시대

그래도 역사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기득권의 행보를 보여준다. 누가 권력을 쥐고, 누가 착취당했으며, 누가 희생되었는지. 인류사는 사실상 기득권이 나머지 피지배층을 어떻게 속이고 착취하며 앞으로 나아갔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은 계속 진보하지만, '의식과 윤리'는 저절로 진보하지 않는다. 인간의 기억력은 생각보다 짧다. 자기 삶에서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이 고작 20여 년 정도다. 한 세대가 지나면 대부분의 일은 잊혀진다. 그럼 기득권이 피지배층을 다시 착취하려는 시스템이 고개를 든다. 그렇게 착취의 역사는 반복되어왔다. 역사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동안은 특권계층만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국민 누구든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변해야 한다.

이제는 역사가 무엇을 드러냈느냐뿐 아니라, 무엇을 숨겼고, 지웠는지도 함께 질문해야 하는 시대가 아닐까.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제 이렇게 묻는다.

"이 기록은 누가, 왜, 어떤 맥락에서 남긴 것일까?"
"이 이름 뒤에 가려진 사람들은 누구일까?"
"여기 적히지 않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역사는 여전히 쓸모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누군가의 해석에 갇히게 된다.

역사는 질문하는 사람에게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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