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세계에서 영원을 찾는 일
1990년대, 십대 소녀의 눈에 비친 세계는 명확했다. 미국, 캐나다, 유럽, 일본.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었고, 찬란한 미래였다. 할리우드 영화 속 뉴욕의 거리, MTV에서 흘러나오는 팝송, 유럽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 일본 애니메이션의 섬세한 작화. 모든 것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동경은 단순한 동경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 목표가 되었다. 저 세계에 가서 살고 싶었고, 저들처럼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일본어 공부가 재미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어를 전공했다. 10대와 20대를 오롯이 그 목표를 향해 달렸다.
그때 나는 믿었다. 이런 세계의 질서는 내 생애 동안은 지속될 것이라고. 서방세계의 찬란함은 영원할 것이라고.
2025년, 마흔을 넘긴 지금. 세상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더 이상 복지 탄탄하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장미빛 나라가 아니다. 미국은 점점 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90년대 그 찬란했던 일본은 빛을 잃은 지 오래다.
반면 한국은 200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적 도약을 거쳐 지금 문화적 전성기를 달리고 있다. K-pop, K-drama, K-culture. 세계가 한국을 주목한다.
2000년대 중반, 영국 런던 최중심지 피카딜리 서커스에는 재팬센터가 있었고, 그 옆 레스터 스퀘어(Leceister Square)에는 차이나타운이 번성했다. 하지만 한국적인 것을 접하려면 지하철도 닿지 않는 변두리 동네 뉴몰든까지 가야 했다. Korea 라고 하면 North or South를 되묻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 한국의 낮은 인지도가 안타까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역전되었다. 해외에 나가면 한국인이라는 것이 환영받는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이제 해외에 나가는 것에도, 외국인을 만나는 것에도 뜻을 두지 않는다. 삶의 타이밍이란 게 참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밖에.
요즘 유튜브에서 우연히 휴 그랜트의 최근 모습을 봤다. 60대가 되어 있었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노팅힐, 브리짓존스의 다이어리 속 찬란히 빛나던 젊은 휴 그랜트는 더이상 없었다. 얼마 전에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봤고, 브루스 윌리스가 요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90년대 영화 속 배우들은 영원히 저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들은 노인이 되고, 세상을 떠나고, 과거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국제 정세를 봐도, 연예계를 봐도, 역사책을 읽어도 요즘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이 있다.
정말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찰나다.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독배를 마시고 죽기 직전, 아들 비담에게 애타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사람을 얻어 나라를 가지려 했다.
헌데 너는 나라를 얻어 사람을 가지려 하는구나.
사람이 목표인 것은 위험한 것이다.
여리디 여린 사람의 마음으로 너무 푸르른 꿈을 꾸는구나!
당시엔 그저 명대사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이 대사가 자꾸 떠오른다.
나는 너무 가변적인 것에 삶의 목표를 두었던 게 아닐까. 서방세계의 찬란함, 그 세계에서의 인정, 외국 문화에 대한 동경. 그 모든 것이 미실의 말처럼 '여리디 여린' 것들이었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고정적'이었고, 변화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왔다. 고작 20년 남짓한 시간 동안 세계의 판도가 뒤집혔다.
그래서 지금, 나는 막막하다.
목표를 잃어버린지는 오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평생 품어온 목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새로운 목표를 세우면 되지 않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목표란 건 그냥 세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간절하게 우러나와야 진짜 목표가 되는데, 지금은 그런 열망을 찾을 수 없다.
인간관계도, 외모도, 인기도, 심지어 잘 나가는 분야도 모든 게 찰나라는 걸 알아버렸다. 수십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가치와 의미가 정말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믿고 싶다,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찰나가 아닌 것, 세월이 흘러도 의미를 잃지 않는 것,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가치. 그런 것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다만 이제는 안다. 인간의 마음이나 세상의 흐름처럼 너무나 변하기 쉬운 것에 뜻을 두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그래서 더 이상 그런 것들에 내 삶을 걸지는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무엇에 뜻을 두고 살아야 할까?
나는 아직 답을 모른다. 어쩌면 평생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질문을 붙잡고, 계속 찾아갈 것이다.
이것이 목표를 잃어버린 마흔의 솔직한 모습이다. 화려한 전환점도, 극적인 깨달음도 없다. 그저 막막함 속에서 한 걸음씩 더듬어가는 중이다.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여정. 그것이 어쩌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