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를 부르는 이상한 말의 탄생
요즘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를 보다 보면 연예인들의 옛날 사진이나 영상이 자주 올라온다. 특히 AI 기술로 현재 모습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영상들이 인기다. 송혜교, 전지현, 원빈... 이런 배우들의 20대 모습을 보여주며 댓글에는 어김없이 "역시 리즈시절은 다르네"라는 말이 달린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리즈시절'이 도대체 뭘까? 영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전성기를 의미하는 건 알겠는데, 왜 하필 '리즈'일까?
리즈시절의 유래는 의외로 박지성에서 시작됐다. 2000년대 초반,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면서 한국 축구팬들의 시선이 이 팀으로 쏠렸다. 자연스럽게 박지성의 팀 동료들도 함께 주목받게 됐는데, 그중 한 명이 앨런 스미스(Alan Smith)였다.
앨런 스미스는 원래 리즈 유나이티드(Leeds United FC)의 에이스였다. 리즈 유나이티드는 2000년대 초반 프리미어리그에서 세 번이나 우승했고, 챔피언스리그 준결승까지 진출한 강팀이었다. 그 시절 스미스는 잉글랜드의 희망으로 불리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팀은 2003-04시즌 2부 리그로 강등됐고, 스미스 역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후 부상과 부진으로 예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국 축구팬들은 이 모습을 보며 "리즈 시절이 최고였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팀 이름 Leeds를 그대로 따서 만든 표현이었다.
재미있는 건 이 표현이 2019년 영국으로 역수출됐다는 점이다. 영국 BBC Three는 'Do You Speak Football?'이라는 축구 관련 서적에 소개된 세계의 흥미로운 축구 신조어들을 전하면서, 한국의 '리즈 시절'을 함께 소개했다.
BBC는 "리즈 유나이티드가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된 뒤 앨런 스미스의 활약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며 "누군가의 인생에서 '리즈 시절'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리막을 가기 전 절정에 이르렀을 때를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영국의 축구팀 이름에서 시작된 한국 축구팬들의 창의적인 신조어가, 다시 영국 현지 언론과 도서를 통해 소개된 것이다. 물론 이건 완전히 한국에서만 쓰는 콩글리시다. 영어권에서 "Leeds time"이라고 하면 아무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
영어로 누군가의 전성기를 말할 때는 heyday 혹은 glory days라는 단어를 쓴다.
in her heyday - 그녀의 전성기에
in his heyday - 그의 전성기에
She was absolutely stunning in her heyday.
(그녀는 전성기 때 정말 아름다웠어)
a picture of Leonardo DiCaprio in his heyday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리즈시절 사진)
heyday는 '전성기', '최고의 시절'을 의미하는 정확한 영어 표현이다. 16세기부터 쓰인 오래된 단어로, 원래는 기쁨이나 놀라움을 표현하는 감탄사였다가 점차 '최고의 순간'이라는 의미로 굳어졌다고 한다.
리즈시절 얘기가 나왔으니 비슷한 맥락의 표현을 하나 더 알아보자. 요즘 유행하는 "라떼는 말이야"(나 때는 말이야). 이것도 영어로 뭐라고 할까?
많은 사람들이 at that time이라고 대답하는데, 이건 '그 순간에'라는 뉘앙스가 더 강하다. '옛날'이라는 느낌을 살리기엔 조금 아쉽다.
영어로는 back in the day라고 표현한다.
back in the day - 옛날에, 예전에는, 그때는
My father is always talking about how great everything was back in the day.
(우리 아버지는 옛날엔 모든 게 좋았다고 항상 말씀하시지)
Back in the day, we went to school even on Saturdays.
(라떼는 말이야, 토요일에도 학교 갔었다고)
비슷한 표현으로 in the past도 있다. past는 '과거'라는 명사니까 말 그대로 '과거에는'이란 뜻이다.
There were no cars and planes in the past.
(과거에는 자동차나 비행기가 없었어)
리즈시절이든 라떼는 말이야든, 이런 신조어들이 생겨나고 퍼지는 걸 보면 언어가 정말 살아있는 생명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축구팀 이름에서 전성기를 뜻하는 말이 되고, 그게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소개되고. 커피 라떼에서 '나 때는'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영어권 사람들이 들으면 어리둥절할 이런 표현들이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통한다.
물론 영어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는 정확한 표현을 아는 게 중요하다. heyday, back in the day 같은 표현들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만의 창의적인 언어 유희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다음에 누군가 "리즈시절"이라고 말하면, '아, 저건 박지성 덕분에 알게 된 Leeds에서 온 거구나' 하고 빙그레 웃어보자. 그리고 영어로 말할 땐 heyday를 떠올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