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날찌, 이름에 숨겨진 동서양 세계관의 충돌
학창 시절 학교에서 영어를 배울 때 이런 걸 배운다. "영어로 주소를 적을 때는 한국과 정반대로 우리집 동, 호수 먼저 적고 그 다음 동네이름, 도시이름, 나라이름으로 적는거에요"라고.
처음에는 '오잉?' 하며 갸우뚱하지만 이내 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진짜 궁금하지 않은가? 아니 대체 왜 주소를 그런 식으로 적는거냐고!
한국, 중국, 일본. 동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정보를 배열한다.
이름: 홍길동 (성 + 이름)
주소: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O길 23, 102동 OOO호
날짜: 2025년 11월 14일
일본도 마찬가지다. 山田太郎(야마다 타로). 야마다가 '성'이고 타로가 '이름'이다. 주소도 〒100-0001 東京都 千代田区... 이런 식으로 우편번호부터 시작해서 점점 좁혀 들어간다.
중국 역시 张伟(장웨이)라고 쓸 때 张이 성이다. 주소는 中国北京市东城区... 나라에서 시작해서 동네로.
우리에게 이건 너무나 당연하다. 큰 그림을 먼저 보고, 그다음 디테일로 들어간다. 마치 지도를 볼 때 전체 지형을 먼저 파악하고 특정 지점을 찾아가듯이.
그런데 영어권으로 가면 모든 게 뒤집힌다.
이름: John Smith (이름 + 성)
주소: Apartment 4B,123 Main Street, New York, NY, USA
날짜: November 14, 2025 또는 11/14/2025
가장 구체적인 것부터 시작한다. 이름을 먼저 말하고, 번지수를 먼저 쓰고, 날짜도 일이나 월부터 시작한다.
처음엔 이게 그냥 '문화 차이'려니 했다. 하지만 영어를 가르치면서, 인문학 책을 읽으면서, 이 차이가 단순한 관습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기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세계관이 숨어 있었다.
놀라운 연구 결과가 있다. 같은 중국 안에서도 벼농사 지역과 밀농사 지역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
벼농사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물을 대는 관개 시스템을 만들려면 마을 전체가 협력해야 한다. 모내기철이 되면 동네 사람들이 품앗이로 일손을 나눈다. 개인보다 '공동체'가, 나보다 '우리'가 중요해진다.
반면 밀이나 목축은 상대적으로 개인 단위 경영이 가능하다. 유럽의 상인들은 일찍부터 장거리 무역을 했다. 낯선 사람과 거래할 때는 "너는 누구냐"가 중요하다. 소속보다 개인의 정체성이, 신용이 먼저다.
Talhelm 교수팀의 연구는 이것이 단순한 가설이 아님을 보여준다. 벼농사 지역 사람들은 '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전체론적(holistic) 사고를 하고, 밀농사 지역 사람들은 개별 요소를 분석하는(analytic) 사고를 한다.
주소 표기는 이런 사고방식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다.
동아시아인은 묻는다: "당신은 어디 소속입니까?" 나라 → 도시 → 동네 → 집.
서양인은 묻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름 → 성 → 거리 → 도시 → 나라.
더 깊이 들어가면 철학의 문제다.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는 세상이 원자(atom)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개별 입자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분류하고 정의했다. 이것은 저것이 아니다. A는 B가 아니다. 명확한 경계, 확실한 정의.
동아시아는 달랐다. 세상은 기(氣)의 흐름이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도교에서 말하는 "도(道)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처럼, 개별 사물보다 관계와 맥락이 중요하다. 유교에서도 사람은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이고, 형제다.
이런 우주관의 차이가 글쓰기에도 반영된다.
서양 논술의 구조를 보면: 명확한 주장(thesis statement) → 근거 → 결론. 한 문장 한 문장이 독립적이고 명확하다.
동아시아의 서술은: 맥락 제시 → 여러 관점 제시 → 은근한 결론. 전체 흐름 속에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강력한 관료제를 발전시켰다. 호적 제도, 조세 징수, 지방 통치. 황제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 제국 전체 → 성 → 현 → 마을.
유럽의 도시들은 달랐다. 유럽은 크고 작은 왕국과 도시로 쪼개어져 있었다.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 길모퉁이 어느 건물에 누가 사는지, 어느 가게가 있는지가 중요했다. 계약서에는 구체적인 개인과 장소가 명시되어야 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10 Downing Street'처럼 거리 이름과 번지수를 사용했다. 프랑스 파리도 마찬가지다. 구체적인 주소가 곧 신용이고, 정체성이었다.
한국이 2011년에야 도로명 주소를 도입한 것은 이런 이유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종로구 사직동'처럼 행정구역 중심으로 위치를 파악했다. 하지만 국제 무역과 택배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서구식 표기가 필요해졌다.
날짜 표기는 더 복잡하다.
연-월-일 (2025-11-14):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ISO 8601 국제표준
일-월-연 (14-11-2025): 영국, 유럽 대부분
월-일-연 (11-14-2025): 미국
컴퓨터 시스템은 연-월-일을 선호한다. 정렬하기 쉽기 때문이다. 2025-01-01이 2024-12-31보다 나중이라는 게 한눈에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논리적'인 표기법은 동아시아식이다. 큰 단위에서 작은 단위로. 그런데 이게 국제표준이 된 건 컴퓨터 덕분이지, 동아시아 문화가 우월해서가 아니다.
재미있는 건 현대에 와서 이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것.
한국 사람도 영어 이름을 쓸 땐 Gildong Hong이라고 쓴다. 국제 학회에 논문을 낼 때, 해외에 이메일을 보낼 때.
일본도 2020년부터 공식 문서에서 Taro Yamada 대신 Yamada Taro를 권장하기 시작했다. 자국 문화를 존중하자는 움직임이다.
중국은 오히려 더 재미있다. 국내에서는 张伟, 국제 무대에서는 Wei Zhang. 맥락에 따라 순서를 바꾼다.
베트남은 원래 성이 앞이지만(Nguyễn Văn An),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영향으로 혼용한다. 태국은 이름이 앞이지만 일상에서는 별명을 쓴다. 인도네시아는 아예 성이 없는 사람도 많다(수카르노처럼).
식민주의, 세계화, 국제 표준. 문화는 고정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섞이고 변한다.
결국 답은 이거다. 서양이 '거꾸로' 쓰는 게 아니다. 우리도 '거꾸로' 쓰는 게 아니다. 그냥 다를 뿐이다.
하지만 그 '다름' 속에는 수천 년의 역사가 들어 있다. 벼를 심었는지 밀을 심었는지, 마을에서 함께 일했는지 혼자 목장을 운영했는지, 원자로 세상을 봤는지 기의 흐름으로 봤는지, 황제의 신하였는지 자유 시민이었는지.
다음에 영어로 이름을 쓰거나 해외 주소를 입력할 때, 잠깐 멈춰보자.
이 작은 순서의 차이 속에 인류의 절반은 '우리 속의 나'를, 나머지 절반은 '나 그리고 우리'를 먼저 생각해온 역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단어를 외우는 게 아니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