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또 작심삼일로 끝난
당신을 위한 철학적 위로

환경이 우리를 지배할 때

by 세이지SEIJI


기어코 올해도 여름이 왔다. 작년 여름이 정말 길고 더워서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역시나 또 이런 시간이 온 것이다.


요즘 한낮 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가고, 습도도 엄청 높다. 숨 쉬기도 답답하고, 샤워하고 나와도 금세 온몸이 끈적거려진다.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둘 수는 없어서 밤에는 꺼두려고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고양이들을 위한 청소루틴을 마치고 나면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버린다. 정말 에어컨 없이는 견디기 힘든 나날이다.


웃긴 건, 평소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무조건 걸어다니자"고 다짐했던 내가 요즘엔 가까운 거리도 차로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온 몇 도 차가 결심을 쉽게 무너뜨린다.


기온에 좌우되는 인간


이렇게 더위와 싸우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고작 기온 몇 도 차이로도 내 기분과 의욕이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구나."


그러다가 예전에 유럽에 있었을 때를 떠올려봤다. 2003년이었는데, 유럽에서 수천 명이 폭염으로 목숨을 잃었던 기록적인 더위의 해였다. 나는 그때 프랑스에서 6주를 보냈었다.


거기는 원래 여름이어도 한국처럼 덥지 않은 곳이라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자동차에도 에어컨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한낮 태양은 정말 타들어갈 것 같이 뜨거웠지만, 그늘로만 피하면 그럭저럭 견딜 만했던 기억이 난다. 습도가 높지 않아서 사우나 같은 숨막히는 더위는 아니었다.


비슷한 기온이라도 습도 차이로도 또 이렇게 우리의 기분과 생각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환경이 만든 문명의 차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역사 공부하면서 늘 궁금했던 게 있었다. "같은 지구에 사는 인간인데 어떻게 동양과 서양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고대 로마나 그리스 이야기를 보다가 삼국시대나 중국 고대사를 보면... 어떻게 같은 인간인데 이렇게 다른 세상이 동시에 존재했을까 신기했다.


그런데 고작 기온 몇 도나 습도의 변화에도 기분과 생각이 확확 바뀌는 게 인간이라면, 전혀 다른 기후와 자연환경에 놓인 인간 집단이 비슷하게 발전한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에는 사주명리학이라는 게 있다.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알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생 방향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결국 인간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의 자연의 기운을 첫 숨에 받게 된다는 뜻일지도. 다시 한번 인간은 결코 자연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이 든다.


카뮈의 이방인과 환경의 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대학생 시절 전공수업 때 읽었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떠올랐다.


주인공 뫼르소가 해변에서 자신에게 칼을 들고 다가오는 아랍인에게 총을 쏘는 장면이 있다. 첫 발로 이미 죽었는데도 연달아 4발을 더 쏜다. 교수님이 물어보셨다. "왜 4발을 더 쐈을까요?"


나는 그때 열사병에 걸린 뫼르소와 강렬한 햇빛이라는 소설 속 묘사에서 답을 찾았다. 그 무더운 알제리 해변의 날씨와 강렬한 태양이 우발적인 행동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뫼르소는 사형당한다. 위협한 것은 죽은 알제리인이 먼저였는데, 연달아 더 쏜 4발로 정당방위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의 감정과 행동이 자연환경에 얼마나 쉽게 영향받는지, 그리고 그 영향이 우리 예상보다 훨씬 클 거라는 걸 세상은 종종 간과하는 것 같다.


자유의지는 정말 존재할까?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 자란 환경과 내재된 무의식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 과연 '자유의지'라는 게 진짜 있기는 한 걸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각자의 이성적 사고와 의지력으로 많은 걸 극복하고 성취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플라톤부터 시작해서, 동양의 유교까지... 인간의 '이성'과 '수행'으로 많은 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수천 년 동안 내려왔다.


우리는 그런 메시지를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면서, 늘 의지력 약한 자신을 탓해왔다. "아, 난 왜 이렇게 의지력이 약하지? 오늘도 계획대로 못했어." 이런 식의 좌절을 얼마나 자주 맛봤는가?


근데 생각해보자. 삶이 정말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렸다면, 35도 한낮 더위 속에서의 의지와 에어컨 틀어놓은 방 안에서의 의지가 비슷해야 하는 거 아닐까?


환경의 결정적인 힘


물론 당장 하지 않으면 위험해지는 일들은 환경이 안 좋아도 어떻게든 한다. 생계를 위한 일이나, 내가 돌보지 않으면 굶을 수도 있는 고양이들한테 밥 주는 일 같은 것.


하지만 대부분의 자기계발적인 활동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오늘 운동을 안 해도 당장 문제될 건 없다. 누구한테 피해가 가지도 않고, 세상이 무너지지도 않는다. 그냥 내 마음만 불편할 뿐이다.


이런 일들에는 그때 주어진 환경이 정말 결정적인 것 같다. 아무리 운동해서 멋진 모습이 될 상상 속 내 모습이 좋아 보여도, 당장 땀이 줄줄 흐르고 끈적거리는 불쾌한 더위 속에서는 금세 무너지는 게 우리의 '자유의지'다.


수용과 해방


결국 인간은 자연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이성'과 '자유의지'라는 환상의 족쇄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언제 자신의 의지가 환경에 좌우된다는 걸 느꼈는가?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죄책감이나 불안감을 조금은 덜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이 환경에 훨씬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숨통이 트이지 않을지 생각하며 전하는 나의 철학적 위로를 마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