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는 연결의 창인가, 분리의 거울인가

스크롤 사이에 놓인 생명들

by 세이지SEIJI

8~9년 전쯤 나는 처음으로 SNS를 통해 동물 구조 현장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한 동물권 단체가 불법 투견장을 급습하는 장면이었다.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피투성이가 된 개들, 도망치는 범법자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도 차분하게 구조를 진행하는 활동가들의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댓글창에는 실시간으로 응원과 격려가 쏟아졌다. "힘내세요", "경찰 신고했습니다", "후원 어디로 하나요".

화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구나.

예전 같았으면 그 투견장은 여전히 음지에서 작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단체는 사건을 종료한 후에야 결과를 보고서로 발표했을 것이고, 시민들은 이미 끝난 일을 사후에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민들이 함께 그 현장에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SNS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 변화는 단 하나의 방향이 아니었다. 같은 도구가 어떤 이에게는 연결의 창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분리의 거울이 되었다. 그리고 또 어떤 이에게는 위장의 무대가 되었다.



빛이 된 화면들

SNS 이전, 동물이 겪는 폭력은 대부분 음지에 숨겨져 있었다. 공장식 축산장 안에서, 불법 번식장 구석에서, 실험실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상은 알지 못했다. 설령 안다 해도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웠고, 확보해도 대중에게 알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카메라와 SNS는 이 구조를 바꿨다. 이제 누구나 목격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고발자가 될 수 있다. 열악한 환경에 방치된 개, 학대받는 고양이, 불법으로 거래되는 야생동물. 한 장의 사진, 짧은 영상이 세상을 움직인다.

더 중요한 것은 연대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통해 동물권 단체들은 실시간으로 구조 과정을 공유한다. 시민들은 즉각 반응하고, 도움을 제공한다. 정기 후원,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경제적 지원도 이어진다. 예전에는 소수의 활동가들만 감당해야 했던 무게를 이제는 수천, 수만 명이 함께 나눈다.

새로운 형태의 활동도 생겨났다. 귀촌한 사람이 시골에서 열악한 환경에 묶여 사는 개들을 발견하고, 주인을 설득해 생활환경을 개선해주는 과정을 유튜브에 기록한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주는 전문 탐정도 생겼다. 이들의 활동은 SNS를 통해 공유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무엇보다, SNS는 우리가 동물을 '보는' 방식을 바꿨다.

태국의 한 시골길. 코끼리 가족이 길을 건넌다. 촬영자는 거리를 두고 조용히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건너던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코끼리가 촬영자를 돌아본다. 그리고 코를 들어 올려 인사하듯 흔든다. '기다려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은 댓글을 남긴다. "울었어요", "코끼리가 저렇게 예의가 바른 줄 몰랐어요", "우리가 동물을 너무 몰랐네요".

우리가 평소 생활 반경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동물들의 섬세한 순간들. 침팬지가 죽은 새끼를 안고 애도하는 모습, 돌고래가 익사 직전의 사람을 구하는 장면, 까마귀가 복잡한 퍼즐을 푸는 영상. 이런 것들을 보며 사람들은 깨닫는다. 동물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감정적이며, 지적인 존재라는 것을.

SNS는 분명 어둠 속에 빛을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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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된 연결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생기듯, SNS는 새로운 형태의 착취도 만들어냈다.

조회수, 좋아요, 구독자 수. 이 숫자들이 돈이 되면서 일부 사람들은 동물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가장 교묘한 형태는 '구조 영상'이다.

강아지가 하수구에 빠져 있다. 촬영자가 발견하고 극적으로 구조한다. 감동적인 음악이 깔리고, 구조된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촬영자를 바라본다. 영상은 수백만 뷰를 기록한다. 댓글에는 "천사예요", "복 받을 거예요"라는 찬사가 쏟아진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어떻게 매번 이렇게 극적인 상황을 '우연히' 발견할까? 어떻게 촬영 각도가 이렇게 완벽할까?

일부 채널은 의도적으로 동물을 위험한 상황에 빠뜨린 후 구조하는 영상을 만든다. 강아지를 직접 하수구에 넣고, 고양이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그리고 카메라를 켜고 '구조자' 역할을 한다. 조회수는 올라가고, 광고 수익은 쌓인다. 동물의 고통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숫자다.

또 다른 형태의 착취도 있다. 인기 동물 채널을 사칭한 사기. "긴급 구조가 필요합니다"라며 후원을 요청하지만, 실제로는 구조 활동과 무관한 사람이 채널주인장 돈을 가로챈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이 악용된다.

연결처럼 보이지만, 실은 소비다. 구원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해자다. SNS는 이런 위장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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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어둠

그리고 SNS는 극단의 분리도 만들어냈다. 아니, 정확히는 이미 존재하던 극단적 분리를 증폭시키고, 조직화하고, 수익화했다.

2023년 중국에서 시작된 일이다. 고양이를 잔혹하게 고문하고 살해하는 영상이 텔레그램 같은 암호화된 메시징 앱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플랫폼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영상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것만은 말해야겠다, 고양이를 산 채로 태우고, 뜨거운 물을 붓는 것은 그들이 하는 잔혹성의 1%도 안 된다는 것을.

이것은 단순히 일부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전 세계 사이코패스들의 오락거리로 상품화되고 있다. 영상은 거래되고, 돈이 오간다. 타 존재의 고통이 소비되고 있다. 그 잔혹성의 수위는 "그냥 일부 그런 일도 있구나" 하고 지나칠 수 있는 수준이 결코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중국에 기본적인 동물보호법조차 없다는 것이다. 설령 가해자를 특정하고 고발해도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다. 영상은 전 세계로 퍼지지만, 범죄는 처벌되지 않는다.

이에 Feline Guardians라는 국제 연대 단체가 만들어졌다. 미국, 한국, 일본, 영국, 스페인, 브라질 등 각국에서 중국 대사관 앞 항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명확하다.

"중국 정부는 동물보호법을 제정하라. 동물 살해자들을 엄벌하라. 그리고 플랫폼들은 이런 잔혹한 영상이 불법적으로 거래되는 것을 차단하라."

한 잠입 조사를 했던 FG 활동가는 말한다. "매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멈출 수 없어요.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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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SNS는 무엇인가

같은 플랫폼에서 코끼리의 감사 인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고양이 고문 영상을 보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 공존한다. 같은 도구로 투견장을 고발하는 사람과, 가짜 구조 영상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활동한다.

SNS는 중립적인 도구일 뿐이다.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12화에서 우리는 19세기 런던, 파리, 뉴욕의 개 학살을 보았다. 당시 도구는 곤봉과 총이었다. 지금 도구는 스마트폰과 암호화 메시징 앱이다. 도구는 바뀌었지만, 본질은 그대로다. 바로 그 때도 지금도 공통적인 폭력의 도구인 사람들의 '무관심과 외면'이다.


결국 중요한 건 인간의 선택이다.

우리는 SNS를 통해 동물과 연결될 수 있다. 그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함께 애도하고, 도울 수 있다. 그들의 섬세함을 발견하고, 감탄하고,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도구로 연결을 위장할 수도 있다. 구원자인 척하며 착취하고, 조회수를 위해 고통을 연출할 수 있다.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완전한 분리를 선택할 수도 있다. 동물을 생명이 아닌 물건으로, 고통받는 존재가 아닌 오락거리로 만들 수 있다.


SNS는 거울이다.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선과 악의 스펙트럼을 그대로 비춘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공유하고, 무엇을 소비하느냐가 세상을 만든다.

스크롤을 내리는 그 손가락 하나하나가 선택이다. 클릭 하나하나가 투표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투표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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