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해방, 아니면 아무도
60, 70년대 한국 사회에서는 한 집안에 아들과 딸이 있으면 아들에게만 교육 기회를 주는 게 당연했다. 딸들은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가거나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흥미로운 건, 거리로 나가 "독재 타도"를 외치던 이들 중에도 이런 가정 출신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독재자의 폭력에는 분노했지만, 자기 집 안에서 여동생이나 누나가 겪는 구조적 폭력—교육받을 권리를 박탈당하고, 오빠의 뒷바라지를 강요당하는—에는 무감각했다. 아니, 그것을 폭력이라고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밖에서는 평등을 외치면서, 집안에서는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것. 거리에서는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 가정에서는 가부장제의 독재를 묵인하는 것. 이 모순은 당시에는 모순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은 "독재 대 민주"였지 "남성 대 여성"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어디선가 비슷한 구조를 본 것 같다.
1960-70년대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흑인 여성들은 백인 여성이 주도하는 여성운동 조직의 리더십 위치로부터 크게 배제되었다. 백인 여성들은 "여성의 권리"를 외쳤지만, 그 여성은 암묵적으로 백인 여성을 의미했다. 흑인 여성이 겪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교차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미국노동총연맹(AFL)은 1866년 창립 당시 인종이나 국적에 따른 차별 금지를 선언했으나, 1895년에는 이 입장을 뒤집어 새로운 가맹 조합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가입을 금지하는 것을 허용했다. 노동운동은 "여성의 자리는 가정"이라는 관념에 순응하여, 남편 혼자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만큼 높은 "가족 임금"을 주장하면서 여성을 노동운동에서 배제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면서 흑인 노동자를, 여성 노동자를 배제했다. 노동자 연대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백인 남성 노동자 연대"였던 것이다.
이 패턴이 보이는가? 여성운동이 인종을 외면하고, 노동운동이 여성을 배제하고, 민주화운동이 가정 내 불평등을 묵인하는.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내 고통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차별을 겪는 백인 여성은 자신이 받는 차별은 선명하게 본다. 하지만 같은 여성이라도 흑인 여성이 겪는 이중의 차별—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중첩되는 경험—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투쟁에 방해가 될까봐.
노동자로서 착취당하는 백인 남성 노동자는 자본가의 횡포에 분노한다. 하지만 자신이 집에서 아내에게 가사노동을 강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리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고 돌아와 저녁상이 차려져 있지 않으면 화를 낸다.
민주화를 외치던 이들 중에도 집안의 딸에게는 "여자가 무슨 대학"이라며 교육 기회를 주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독재에 맞서 싸우면서, 정작 자기 집 안에서는 또 다른 독재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인간 해방운동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동물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것.
분리의 논리는 똑같다
재미있는 건, 각각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점이다.
"흑인에게는 아직 때가 아니다. 우선 여성의 권리부터." "여성 문제는 부차적이다. 계급투쟁이 먼저다."
"민주화가 먼저다. 다른 건 그 다음에." "사람도 못 살리는데 무슨 동물이냐."
언제나 '우선순위'가 있고, 언제나 누군가는 '나중'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밀려난 존재들은 계속 밀려나고, '나중'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1977년, 미국의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컴바히 강 집단(Combahee River Collective)'을 결성했다. 이들은 백인 중심의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남성 중심의 흑인 인권 운동에서도 배제당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발표한 성명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주요 억압 시스템들은 연결되어 있다(interlocking)."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 차별, 그리고 성소수자 혐오. 이것들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억압 구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한 여성이 흑인이고, 가난하고, 레즈비언이라면, 그는 네 가지 차별을 '따로따로' 경험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뒤엉켜' 하나의 억압으로 작동한다.
이 통찰을 동물에게까지 확장해보자.
"인간이 우월하다"는 논리로 동물을 지배하는 것과, "남성이 우월하다"며 여성을 억압하는 것, "백인이 우월하다"며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것. 이 모든 억압의 논리는 동일하다. "우리는 우월하고, 너희는 열등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너희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
지배층은 이 분리를 원한다.
여성운동이 인종 문제를 외면하고, 노동운동이 여성을 배제하고, 환경운동이 동물을 간과하는 한, 이들은 절대 진짜 위협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배층은 언제든 이 균열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 여성들, 투표권 주면 만족하지? 나머지 유색인종 여성들은... 음, 그건 다른 문제니까." "너희 노동자들, 임금 올려줄게. 대신 여성 노동자들이 싼 임금으로 일하는 건 눈 감아줘." "너희 민주화 세력들, 권력 나눠줄게. 대신 동물 학대하는 산업은 계속 유지할게."
이렇게 일부에게 이득을 주어 운동을 분열시키는 것. 이것이 지배 구조가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되어 온 비결이다.
내 고통만 해결되면 된다는 태도. 이것이 바로 지배층이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해방 운동은 가장 약한 존재까지 포함해야 한다.
여성운동이 인종차별에 무감각하면, 그 운동은 결국 "백인 중산층 여성의 권익 향상"으로 끝난다. 노동운동이 성차별을 방치하면, "백인 남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 전부다. 민주화운동이 가정 내 위계를 묵인하면, 그건 "또 다른 가부장이 권력을 잡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 해방운동이 동물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강자가 약자를 지배해도 된다"는 논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단지 그 강자가 독재자에서 민주 시민으로, 남성에서 양성으로, 백인에서 다인종으로 확대되었을 뿐.
동물까지 포함하지 않는 정의는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동물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투표권도 없고, 목소리도 없고, 법적 대리인도 없다. 만약 우리가 이 가장 약한 존재조차 고려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억압의 논리를 해체하는 것이다.
흑인 페미니스트 작가 벨 훅스(bell hooks)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여성의 해방도, 모든 여성의 해방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이 말을 확장해보자.
어떤 인간의 해방도, 모든 존재의 해방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우리가 동물과의 연결을 회복할 때, 우리는 단순히 동물을 위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인류가 수천 년간 사용해온 지배의 논리 자체를 뒤흔드는 것이다.
"약자를 지배해도 된다"는 생각. 이것이 모든 억압의 뿌리다. 이 뿌리를 뽑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 새로운 형태의 억압을 만들어낼 것이다.
민주화는 이뤘지만 여성은 여전히 차별받고, 성평등은 외치지만 장애인은 배제되고, 인권은 말하지만 동물은 학대당하는. 이런 세상을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가장 약한 존재까지 포함하는 윤리. 가장 작은 목소리까지 듣는 감수성. 가장 먼 곳의 고통까지 느끼는 연대.
이것이 우리가 다시 연결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