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물을 모른다

에필로그_잃어버린 연결, 동물과 인간

by 세이지SEIJI

구미호는 천 년을 살며 사람을 홀린다. 에덴동산의 뱀은 이브를 유혹해 선악과를 먹게 했다. 단군신화에서 곰은 인내의 상징이 되어 사람이 되었고, 호랑이는 조급함 때문에 실패했다. 악마를 그릴 때 우리는 염소나 양의 뿔과 발굽을 가져다 쓴다. 거대한 문어의 촉수는 미지의 공포를, 심해의 괴물을 형상화하는 데 딱 좋은 소재였다.

인류는 수천 년간 동물을 이야기해왔다. 그런데 정작 동물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았다.



이미지의 소비

우리가 신화와 우화 속에서, 철학자들의 문장 속에서 동물을 끊임없이 등장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동물을 안다는 증거는 아니다. 우리는 그저 동물의 겉모습, 우리 눈에 보이는 이미지만을 소비해왔을 뿐이다.

여우는 교활하다고? 우리는 여우의 생태를 알아서 그렇게 말한 게 아니다. 그저 여우가 눈 속에서 점프하며 사냥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내는 웃음 같은 소리를 듣고 '교활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우리의 이야기에 갖다 붙였다. 뱀이 사악하다고? 뱀의 생존 방식을, 그들의 감각 세계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땅을 기어다니고 독을 가졌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동물은 언제나 인간의 내면을 투사하는 스크린이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경멸하는 것, 동경하는 것을 동물의 몸에 입혔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동물의 본성인 양 이야기했다. 수천 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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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마저도

그렇다면 근대 이후, 과학이 발달하면서는 달라졌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인간은 동물을 철저히 인간과 분리된 존재로 바라보려 애써왔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자동기계'라고 불렀다. 동물에게는 영혼도, 의식도, 고통을 느낄 능력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 관점은 수백 년간 동물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실험실에서 동물을 해부하고, 고통스러운 실험을 반복하고, 그 결과를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 이것이 동물을 '연구'하는 방식이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동물을 상자에 가두고 버튼을 누르게 하고, 미로를 통과하게 하며 그들의 '행동'만을 관찰했다. 동물의 내면, 감정, 의도 같은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동물을 알려 한 게 아니라, 동물을 통해 인간을 알려 했을 뿐이다.



당연한 것을 최근에야

그런 관행을 깨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아주 최근의 일이다.

제인 구달은 1960년, 탄자니아의 곰베 국립공원으로 들어갔다. 실험실이 아니라 침팬지가 사는 그곳으로. 그녀는 10년 넘게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관찰했다. 침팬지들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 그들에게도 개성이 있다는 것, 가족 간의 유대가 존재한다는 것. 이런 발견들은 당시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동물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당연히 그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그들의 삶을 관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인류는 수천 년 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동물을 우리에게 끌어와 해부하고 실험했지,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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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놓친 것

프란스 드 발은 그의 책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Are We Smart Enough to Know How Smart Animals Are?)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가 동물을 대상으로 온갖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동물은 인간에 못 미친다" 혹은 "인간보다 우수한 능력이 있어도 그건 그저 생존 본능일 뿐"이라고 섣불리 결론 내려왔다고.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종에서 특정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맨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간과하는 것은 아닐까?'여야 한다. 그다음에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한 테스트가 그 종에 적합한 것이었는가?'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실험에서 연구자들은 코끼리를 대상으로 거울 테스트를 실시했다. 동물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지 평가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연구자들은 코끼리 우리 밖 바닥에 가로 104cm, 세로 214cm 크기의 거울을 비스듬히 세워두었다. 코끼리는 아마도 두 겹의 창살 뒤로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는 모습만 보았을 것이다.

거울의 도움을 받아야만 볼 수 있는 표시를 코끼리 몸에 했을 때, 코끼리는 그것을 만지지 않았다. 그러자 연구자들은 결론 내렸다. 코끼리는 자기 인식 능력이 없다고.

하지만 프란스 드 발의 제자 조슈아 플로트닉은 테스트 방법을 바꿨다. 가로, 세로 2.4m의 정사각형 거울을 직접 우리 안에 설치해 코끼리들이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했다. 그러자 코끼리들은 거울을 만지고 냄새 맡고, 그 뒤쪽을 살펴보았다. 근접 탐구는 유인원과 인간 모두에게 중요한 단계인데, 이전 연구에서는 그 기회가 아예 막혀 있었던 것이다.

해피라는 이름의 아시아코끼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왼쪽 눈 위 이마에 흰 십자 표시가 있는 해피는 거울 앞에 서서 그 표시를 반복해서 문질렀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의 몸과 연결 지었던 것이다.


문제는 코끼리가 아니었다. 문제는 코끼리에게 맞지 않는 방식으로 테스트를 설계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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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모른다는 것

우리는 7화에서 다뤘던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얼굴'에 대해 이야기한다. 타자의 얼굴은 결코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 우리는 타자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해했다고 여기는 순간, 그것은 타자를 나의 개념 안에 가두는 '존재적 살인'이 된다.

레비나스의 이 통찰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동물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동물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동물에 대해 섣불리 판단을 내렸다. 그들은 이성이 없다고, 도덕성이 없다고, 영혼이 없다고,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이 오만을 중단해야 한다.

동물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섣불리 결론 내릴 수 없다. "동물은 이런 존재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알려는 노력

역설적이게도, 타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타자를 알아가는 시작이다. 제인 구달이 그랬듯, 프란스 드 발과 그의 제자가 그랬듯, 우리는 동물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에게 맞는 방식으로 질문하고, 우리의 선입견을 계속해서 점검해야 한다.

인간이 동물을 진짜 제대로 알려고 노력한 기간은 매우 짧다. 기껏해야 수십 년이다. 수천 년간 동물을 이야기하고, 동물을 이용하고, 동물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정작 그들을 알려는 진지한 시도는 최근에야 시작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동물을 모른다. 그래서 함부로 결론 내릴 수 없다. 이것이 이 연재가 전하고 싶었던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다. 지난 14회 동안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동물을 분리해왔는지, 언어로, 공간으로, 철학으로, 제도로 살펴보았다.

그 모든 분리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거대한 착각이 있었다. 우리가 동물을 안다는 착각. 우리가 동물에 대해 판단할 자격이 있다는 착각.


이제 우리는 최소한 이것만은 알게 되었다. 우리가 몰랐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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