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모르다'의 특별함을 파헤치다
오늘도 영어 수업을 준비하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I don't know.
수없이 써왔고, 수없이 가르쳐온 표현이다. "나는 모른다"라는 뜻. 그런데 가만히 뜯어보니 이상하다. 영어에서 "모른다"는 결국 "know(알다)"에 부정어 "don't"를 붙인 것뿐이다. 직역하면 "나는 알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어는? "모르다"라는 완전히 별개의 동사가 있다.
"알다"와 "모르다". 둘은 반의어지만, 형태적으로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인다. "알다"의 부정형이라면 "알지 못하다"가 되어야 할 텐데, 우리는 그냥 "모르다"라고 한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단어가 존재했던 것처럼.
왜 한국어에는 "모르다"라는 독립된 동사가 있는 걸까?
궁금해서 다른 언어들을 살펴봤다.
영어: know → don't know
중국어: 知道(zhīdào) → 不知道(bù zhīdào)
일본어: 知る(shiru) → 知らない(shiranai)
프랑스어: savoir → ne pas savoir
스페인어: saber → no saber
전부 같은 패턴이다. "알다"라는 동사가 있고, "모르다"는 그것의 부정형이다. 대부분의 언어에서 "모르다"에 해당하는 독립 동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예외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아프리카 가나의 Kusaal어에도 "zi'"라는 "모르다" 동사가 따로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주요 언어들 중에서, "모르다"를 완전히 독립된 동사로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한국어의 "모르다"는 꽤 특이한 존재인 셈이다.
그렇다면 "모르다"는 대체 어디서 온 말일까?
어원을 찾아보니 흥미로운 가설이 있었다. "모르다"는 중세국어 "모라ᆞ다"에서 유래했는데, 이것이 "몯(못)"과 "알다"가 합쳐진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못 알다" → "몯알다" → "모라ᆞ다" → "모르다"
이 가설이 맞다면, "모르다"도 원래는 "못 알다"의 축약형이었던 셈이다. "몹쓸(못+쓸)", "모자라다(못+자라다)"처럼 "못"이 다른 동사와 결합해 새 단어가 된 사례가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다.
하지만 "모르다"의 어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없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정말 "못 알다"에서 온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독립된 단어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건 국어학자들의 몫이다.
중요한 건 이거다. 어원이 무엇이었든, 적어도 수백 년 동안 한국어 화자들은 "모르다"를 완전한 독립 동사로 인식하며 써왔다. "알지 못하다"의 줄임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에게 "모르다"는 "알다"와 대등한 무게를 가진, 그 자체로 완결된 단어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자, 여기서 질문 하나.
한국어에 "모르다"라는 독립 동사가 있다는 사실이, 한국인의 사고방식이나 정서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
언어학에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라는 게 있다. 20세기 초 미국의 언어학자들이 주장한 이론인데, 한마디로 "우리가 쓰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의 "강한 버전", 즉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오늘날 대체로 부정된다.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집단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약한 버전", 즉 "언어가 사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여전히 논의 중이다.
이 가설을 "모르다"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영어 화자가 "I don't know"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문법적으로 "나는 알지 못한다"이다. "앎"이 기본값이고, 지금은 그 상태가 아니라는 뜻. 일종의 결핍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어 화자가 "몰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냥 "몰라"다. "알다"의 그림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상태. 굳이 "알다"를 경유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차이가, 아주 미세하게나마, "모름"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잠깐 시야를 넓혀서, 인류가 "모름"이라는 상태를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 살펴보자.
서양 철학의 출발점에는 소크라테스가 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고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유명한 역설. 소크라테스에게 무지(無知)란 '자각해야 할 상태였고, 그 자각은 앎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15세기 독일의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학식 있는 무지에 대하여(De Docta Ignorantia)』라는 책에서, 유한한 인간의 정신으로는 무한한 신을 완벽히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건 그의 방법론이다. 그는 눈을 감고 황홀경에 빠지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수학과 기하학을 도구로 삼아, "우리가 신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무한히 커지는 원의 둘레는 결국 직선이 된다는 식의 수학적 비유를 통해, 유한한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는 무한을 담을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사변적 신비주의"라고 불린다.
동양에서도 "모름"에 대한 성찰이 있었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知之為知之 不知為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모름을 모름으로 인정하는 태도 자체를 '지혜'로 본 것이다.
이렇듯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오랫동안 "모름"이라는 상태에 대해 고민해 왔다. 모름은 단순한 결핍일까, 아니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상태일까? 극복해야 할 것인가,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한국인은 "모름"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을까?
"I don't know"가 어딘가 변명처럼, 혹은 부족함의 고백처럼 들릴 때, "몰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가? 변명도 아니고, 부끄러움도 아닌, 그냥 담담한 상태의 표현.
"나 그거 몰라"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알다"의 결핍 상태를 표현하는 걸까, 아니면 "모름"이라는 독립된 상태를 표현하는 걸까?
어쩌면 "모르다"라는 단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름"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조금 더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몰라"라는 말이 "알지 못해"보다 더 편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단순히 음절 수의 문제만은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증명할 수 없는 추측이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만큼이나 복잡하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재미있지 않은가.
결국 "모르다"라는 단어 하나에서 출발한 이 작은 탐구는, 언어와 사고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다음에 누군가 "몰라"라고 말할 때, 혹은 내가 "몰라"라고 말할 때, 한번 생각해 보자. 그 짧은 두 글자 안에는 어쩌면 수백 년의 언어 역사가, 그리고 "모름"을 바라보는 우리만의 시선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도 그냥 내 추측이다.
정말인지는… 나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