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성과 연결성 - 같은 물건, 다른 시선
2002년, 런던에서 지내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영국인 친구 집에 초대받아 저녁을 먹게 됐다. 식사 중 냅킨이 떨어져서 나는 별 생각 없이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조금 뜯어 왔다. 한국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친구의 표정이 묘했다.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섞인 얼굴로 물었다.
"왜 toilet paper를 가져왔어?"
나는 어리둥절했다. 냅킨이 없으니 휴지를 가져온 게 뭐가 이상하지? 친구는 계속 물었다.
"한국에서는 화장실 휴지를 식탁에서 써?"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에게는 toilet paper는 말 그대로 'toilet(화장실)'에서만 쓰는 'paper(종이)'였던 것이다. 아무리 깨끗한 새 제품이라도, 그건 화장실 용도로 만들어진 물건이니 다른 곳에 쓸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달랐다. 동네 분식집에 가면 테이블마다 두루마리 휴지가 놓여 있었다. 떡볶이를 먹고 입을 닦고, 튀김 기름을 닦고, 흘린 국물을 닦았다.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길거리 포장마차도 마찬가지였다. 어묵을 먹거나 붕어빵을 살 때도 두루마리 휴지를 한 뼘 정도 뜯어서 쓰곤 했다. 우리 집도 그랬다. 식탁 위에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이 놓여 있었고, 밥을 먹다가 입을 닦거나 국물이 튀면 쓱 뜯어서 닦았다.
왜 그랬을까? 간단하다. 두루마리 휴지나 냅킨이나 어차피 같은 펄프로 만든 깨끗한 종이 아닌가. 둘 다 공장에서 위생적으로 만들어져 나온다. 그렇다면 어디에 쓰든 무슨 상관인가.
요즘은 분식집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그건 인식이 변해서가 아니다. 공장에서 나오는 더 얇고 싼 냅킨이 그 자리를 차지했거나, 아예 물티슈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됐을 뿐이다.
영어권 사람들은 두루마리 휴지를 'toilet paper'라고 부른다. 이 명칭 자체가 이미 용도를 못 박고 있다. 화장실에서 쓰는 종이. 그게 정체성이다.
같은 펄프로 만들어졌어도, 얼굴을 닦는 건 'facial tissue'고, 주방에서 쓰는 건 'paper towel'이다. 재질이 아니라 용도가 물건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그래서 내가 toilet paper를 식탁으로 가져왔을 때, 친구는 당황했던 것이다. 용도가 다른 물건을 잘못된 장소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한참 후에 나는 리처드 니스벳이 쓴 『생각의 지도(The Geography of Thought)』를 읽게 됐다. 그 책에 나오는 '닥스(dax)' 실험이 내 경험을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실험은 간단했다. 연구자들은 피실험자들에게 나무로 된 원형 기둥 모양의 물체를 보여주며 "이것은 닥스입니다"라고 알려줬다. 그리고 두 개의 추가 물체를 보여줬다.
하나는 파란색 플라스틱으로 된 원기둥이었다. 모양은 닥스와 같지만 재질이 달랐다.
다른 하나는 같은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사각기둥 모양이었다. 재질은 같지만 형태가 달랐다.
그리고 물었다. "이 중 어느 것이 닥스입니까?"
결과는 놀라웠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파란색 플라스틱 원기둥을 골랐다. 모양이 같으니까. 반면 일본인은 사각기둥 나무를 골랐다. 재질이 같으니까.
서양인은 윤곽을 봤다. 형태가 같으면 같은 것이다.
동양인은 연속성을 봤다. 재질이 같으면 같은 것이다.
이 실험 결과를 두루마리 휴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서양인에게 toilet paper는 '화장실에서 쓰는 종이'라는 용도가 그 물건의 윤곽이자 정체성이다. 개체성(individuality)이 명확하다. 아무리 깨끗해도, 그건 toilet paper일 뿐이다.
동양인에게 두루마리 휴지는 펄프로 만든 깨끗한 종이의 연장선이다. 냅킨도 펄프, 화장지도 펄프, 두루마리 휴지도 펄프. 같은 재질이고 같은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물건이라면, 그건 연결성(connectedness) 안에 있는 같은 범주다.
니스벳은 이를 '분석적 사고 vs 전체론적 사고'로 설명했다. 서양인은 대상을 맥락에서 분리해 개별 속성으로 파악하고, 동양인은 대상을 관계와 맥락 속에서 파악한다.
나도 동양인이기에, 어차피 크리넥스 티슈나 두루마리 휴지나 펄프로 만들었고 둘 다 깨끗하게 포장돼 나오는데 어디에 쓰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아예 명칭 자체를 'toilet paper'라고 정해서, 그 개체성의 정체성을 딱 못 박아버린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중요하지 않다. 서양식이 위생적이라거나, 동양식이 실용적이라거나 하는 논쟁은 불필요하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같은 물건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용도를 보고 어떤 사람은 재질을 본다. 어떤 사람은 윤곽으로 세상을 나누고, 어떤 사람은 연속성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두루마리 휴지 하나에도 이렇게나 깊은 세계관의 차이가 숨어 있다.
20년 전 런던에서 받았던 그 작은 충격은, 결국 동서양이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언어를 공부하다 보면 이런 순간들을 만난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 너머로 완전히 다른 사고의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들 말이다.
그리고 그게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