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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INA Sep 19. 2020

딱, 오늘만 달려보자.

아침에만 보이는 것들


“Don’t fear moving slowly forward…fear standing still.” - Kathleen Harris


2017년 8월 내가 처음 마주했던 호주는, 골드코스트 (Gold Coast, Australia)였다.


싱가포르로 이주해서, 아시아 태평양 전략 마케터로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학회가 있어 출장으로 가서 처음 만났던 호주의 바다. 시차 때문이었던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하얀 새 운동화를 신고 그렇게 호텔방을 나섰다. 무작정 바다가 보일 것 같은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아직도 그 아침이 보이는 것 같다. 한국 그리고 미국 동부 겨울 날씨에 익숙해져 겨울 이면 추운 게 당연했던 믿고 살았던 나에게  낯설었던 호주의 겨울 바다라고 하기엔 그 아침이 너무 완벽했다.


아침부터 서핑하는 축복받은 아이들 - BroadBeach, Goldcoast, Australia


조금 달려서 도착한 바닷가 앞. 운동화를 벋고 모래사장을 투벅 투벅 걸었다. 발가락 사이사이 들어가는 모래 

기분이 너무 좋다. 파도 소리, 저 앞에 떠오르는 태양, 이 아침부터 서핑을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이런 아침을 당연한 일상인 아이들.  이렇게 아름다운 아침을 매일 보며 서핑을 할 수 있는 저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당연하지 않은 감사에 대해 알고 있을까? 익숙한 것들에 무디어져 감사하지 못하는 우리의 일상. 그 아침, 그 바다는 나에게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 감동이었다. 미국에서 싱가포르로 이사를 하고 호주 바닷가에서 내가 느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 일상의 감사의 순간이었다. 저 아이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골드 코스트의 겨울 아침 바다와 처음 만나 감동하는 내가 만나는 순간이었다.

발가락 사이 모래 가득


"It is darkest always before dawn..."  아침 새벽에 해가 뜨기 전에 가장 어둡습니다.



사실 나 2016년 겨울부터 우울증 약을 다시 먹고 있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모유 수유를 끊고 나니 다시 나타나던 산후 우울증 증상들에 덜컥 겁부터 났었다. "이번에도 우울증이 오는 건가? 나 다 낳은 거 아니었어..."

우울증 약을 먹은 지 7-8 개월이 지나갔던 그 여름, 우울증 약을 조금씩 줄여 가기로 한 그 여름에 우린 그렇게 미국에서 싱가포르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직장, 새로운 집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바뀌어 버려서, 약을 줄이는 게 불안했었다. 가을, 겨울이 되면 다시 우울증이 찾아올까 하는 불안함은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호주에 왔는데 내가 알던 겨울이 아니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밝고 따뜻한 호주의 겨울. 

어둠 그리고 두려움 안에서 불안해하며 걱정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둠이 나를 다시 삼켜 버릴까 봐, 겨우 다시 찾은 나를 또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었다. 두려움 당당히 마주 하기로 했다. 그 어두웠던 곳을 뒤돌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보기로 했다. 그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아침 바다 앞에서, 그 늦여름 같은 겨울 골드코스트 비치에서 나는 오늘만 달리기로 했다. 매일 우울증 약을 먹었던 것처럼 나에게 처방전을 내렸다. 

약을 줄이면서, 매일 달려보기로 불안해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게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만 해보기로 했다. 

"오늘 딱, 오늘만 달려보자."


2020년, 오늘만 달린 날들이 모여 1,000일이 넘어간다.


2017년 걷는 거나 별로 차이 없던 아침 조깅이 매일 아침의 시작이었고,  2018년 속도가 조금씩 올라가고, 조금 더 멀리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매일 그렇게 달렸다. 일어나서 생각하지 않고 양치를 하듯 그렇게 달렸다. 2019년 2월 싱가포르에서 내 인생의 처음 10km를 달리고,  11월 미국에 돌아와 프린스턴에서 내 인생의 처음 하프 마라톤을 달렸다.  2020년 가을 내 인생 첫 뉴욕 마라톤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매일 오늘만 달렸더니, 어느새 나는 다른 곳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만 달리는 나, 아직도 현재 진행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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