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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ine 세인 Nov 30. 2023

의연한 탐험 끝에 찾아온 우연

용기


누군가에게 ‘내 글을 좀 읽어봐 줄래’ 하며 굽신거리는 걸로 시작하게 되면 내 글도 조금은 그런 낙인이 찍혀 버리는 것 아닐까. 이런 두려움을 가진 적이 있다. 여기서 ‘굽신거린다’라는 표현은 나에게만 한정한 표현이다. 다른 사람이 읽어 줬으면 하는 글쓰기에 아직 자신감이 없고, 기질적으로 ‘내보이기’를 잘 못하는 사람인 나에게 말이다. 읽어 달라는 부탁이 찍는 낙인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을 테고 겁쟁이의 괜한 걱정 같기도 하지만,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독자로서 내 경험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발견한 글을 읽는 게 더 좋다. 어폐는 있겠다. ‘우연한 발견’이라고 하기에는 맞아떨어져야 하는 조건이 많다. 자발적으로 뭔가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든 때였을 것이고, 어떤 사람이 글로 펼쳐낸 세계에 기꺼이 들어갈 정신적 여유가 있는 때였을 테니까. 게다가 내가 발견하려면 누군가는 최초의 공개 행위, 그러니까 ‘이 글을 읽어 보시오’하는 일종의 부탁을 불특정다수에게라도 이미 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자발적’이라는 말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춰 볼까. 연애에 비유하자면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쪽이라고 할까. 소개팅도 본인의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 ‘이제부터 이 낯선 사람이 연애 파트너로서 어떨지 어디 한번 뜯어볼까’하는 세팅 안에서 그 타인을 후하게 볼 자신이 없다. 나로서도 상대에게 높은 점수를 딸 자신은 없고 말이다. 그것도 많이 하다 보면 달라지는지는 모르겠다. 스무 살 때인가 딱 한 번 소개팅을 한 이후로는 절대 하지 않은 나로서는.


다시 글로 돌아와서. 어찌어찌 아는 사람의 글을 부탁으로 읽을 때는 아는 이의 부탁이라는 이유에서 비롯한 애정을 좀 더 갖고 읽긴 하지만, 그 애정 속에서도 다시 내가 ‘우연히 발견’할 때가 찾아와야 비로소 글이 마음으로 들어온다. 애정의 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애정을 걷어내고 나서야 글의 힘이 내 마음속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 같다는 뜻이다. 소위 아는 사람을 더 챙겨 주려는 따뜻한 정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그보다는 애초에 글이라는 것은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모습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습 너머의 어떤 것인 경우가 더 많았다는 이유가 크다.


이런 이유로, 이제 누군가에게 내 글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을 관두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는 부탁하는 마음을. 나는 그저 공개할 뿐이고, 읽을 사람은 읽을 뿐이다. 이렇게 오늘도 온라인에 글을 올리고 누군가 읽어 주기를 내심 바라는 처지니까 일종의 부탁은 이미 깔린 셈이지만, 굽신거리는 마음만큼은 뺐다. 내 글이 혹자의 눈을 거쳐 마음으로까지 들어가는 일을 넌지시 상상은 하되, 진작에 내 소관은 아닌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글을 더 깊이 읽어 줄 책임은 없다. 시간이 드는 일이니까. 생으로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니까. 게다가 그에게는 글이 정말 별로일 수도, 본인 기준에 읽을만한 거리가 전혀 아닐 수도, 알고 보니 내가 쓴 글에 한 치도 공감할 수 없다는 사실만 발견할 수도 있잖은가. 나를 모르는 사람은 또 어떤가. 내가 쓴 글이, ‘이 낯선 사람의 글이 일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 어디 한번 뜯어볼까’하는 장벽을 넘을 확률에 어떻게 기대를 거나(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이 아닌, 겁쟁이의 걱정).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글이 누군가의 마음까지 들어가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건 철저히 그 사람의 의연한 탐험 끝에 찾아온 우연으로 글 안에서 영혼의 일치를 발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초짜가 베팅할 수는 없는 희박한 가능성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후로, 글을 쓰는 데 있어 적극성을 발휘하고 싶은 영역은 따로 생겼다. 하나는 최대한 솔직하게 쓰는 일이다. 나에게 있어 굳이 글을 쓰는 이유는 대부분 솔직해지려는 시도 같다. 픽션과 논픽션 같은 장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설명해 보면, 안전한 울타리를 지어내려는 목적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지어져 버린 울타리를 해체하려는 취지라고 할 수 있다. 지금껏 별로 솔직하게 살아오지 못해서다. 먼저 울타리의 위치부터 알아야겠고, 둘러쳐진 면적이 얼마나 좁았는지도 파악해야겠고…. 아무튼 갈 길이 멀다. 누군가 읽고 영혼의 일치를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특히, 감추고 덮어서 만들어낸 글이 의미가 있을까.


또 하나는 지속해서 쓰고 공개하는 일이다. 소심한 부탁으로 나를 좀 알아봐 달라는 굽신거림 대신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랄까. 공감이든 반발심이든 심지어 무관심이든 어떤 반응 혹은 무반응에 대해서도 겁부터 먹지 않기 위해 필요한 절차가 아닐까 한다. 계속 쓴다고 해서 끝내 만족에 다다르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만, 쓰고 싶다면서도 귀찮아서 안 쓰거나 두려워서 못 쓰는 쪽보다는 잘 늙는 길임이 틀림없다. 또한 공개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이러다 한 번씩은 어느 너그러운 미지의 독자와 자연스러운 만남도 있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먼저 공개하지 않고서는 의연한 탐험가고 누구고 간에 아무도 만날 수가 없지 않을까.



Seine




<지금부터 쓰지 뭐>는 2023 브런치북 『지금부터 하지 뭐』에 이어지는 '쓰기'에 관한 그림에세이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never-or-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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