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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ine 세인 Dec 21. 2023

쥐구멍, 그 황홀한 치유의 세계

회복


창작. 내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

난 왜 이게 이리도 좋을까. 나의 본격적인 창작은 노래 쓰기로 시작됐다. 경험과 기억, 감정이나 생각, 의도 또는 상상. 어떤 이름이든 내 안에 들어 있을 때는 실체가 없던 그것들이 단어라는 옷을 입고 하나씩 밖으로 나와 문장이 되고, 그 문장들이 다시 음에 올라타 노래의 모습을 한 이야기가 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 하나하나는 무척 작지만, 저마다 분리된 온전한 세계를 가졌다. 나는 상황만 허락한다면, 그 조그마한 세계로 가는 여정에 기꺼이 마음을 내주곤 했다. 곧잘 휴식이나 숙면과 맞바꾸면서까지.


2020년, 일을 쉬는 동안에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버릇처럼 끄적이는 메모와 노랫말이 아닌, SNS에 올리는 조각 글이나 일기도 아닌, 남이 읽는 것을 전제로 한 에세이 형식의 글이었다. 집과 동네에만 처박혀 지내는 삶을 벗어나려는 방편으로 직전 해 여름 글쓰기 수업을 하나 들은 게 표면적인 계기다. CGV 아트하우스에서 이다혜 씨네21 기자가 진행했던 영화 에세이 클래스였다. ‘여름은 짧아 글을 써! 여러분’이라는 제목의 4주간의 수업이었는데 그 여름에는 제출할 과제를 제외하고는 막상 아무것도 쓰지 않았지만, 다음 해 봄 갑작스러운 글쓰기를 시작했다.


일로나 음악적으로 모두 침체기였고 아무도 만나지 않던 때여서인지 붙잡고 쓸만한 에피소드가 마땅찮아 글의 소재는 결국 ‘밥 해 먹는 이야기’가 됐다. 레시피를 다루는 글은 아니고, 20대 초반 유학 시절부터 시작된 밥 짓기와 그 외 밥에 관련된 기억을 중심으로 써 나갔다. 가벼운 소재이기는 해도 독자를 염두에 둔 첫 글쓰기였던 터라 나름 진지하게 임하고 정확하게 쓰려는 노력을 꽤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남보다 ‘나’에게 훨씬 득이 된 경험이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설명하려다 보니 뭉뚱그려져 있던 기억을 상세히 펼쳐봐야 했는데, 글로 쓰려던 게 아니었다면 그대로 잊고 살았을 그 당시의 온기 같은 것까지 우르르 딸려 나와 쓸 때마다 매번 나를 놀라게 했다.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전, 타인의 어떤 개입도 없이 내 기억만 가지고 치유를 경험한 셈이다.


아직 글 쓰는 기술이 서툴기 때문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치유의 위력은 상당했다. 일어난 일들을 차분히 글로 쓸 수 있다면 험한 말 주고받으며 다시는 안 보겠노라고 싸운 사이와도 회복할 수 있을 듯한 정도였다. 상대의 의중도 중요하니까 타인과의 화해는 혼자서 못 한다 쳐도, 싸움의 대상이 나 자신이라면 회복도 화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계속 글을 쓰고 싶어졌다. 처음 노래를 만들었을 때와 비슷하다면 비슷한 기분이었다.


곡을 처음 썼을 때 한동안은 일주일에 한 곡꼴로 곡 쓰기를 계속했다.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을 다닐 때라 주로 밤에 노래를 만들었는데, 자기 전 휴대폰에 녹음해 두었다가 다음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익숙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완성하지 못한 날은 스케치만 녹음해서 역시 출퇴근길에 듣고 또 들으며 머릿속으로 가사나 멜로디를 수정하기도 했다. 그 활동이 순수하게 재미있었다. 새벽까지 잠을 안 자 충혈된 눈에도 환희가 가득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에세이 역시 일주일에 한 편 정도를 넉 달 동안 꾸준히 썼다. 주로 카페에 가서 쓰고, 집에 와서 고쳤다. 고치느라 새벽까지 잠 못 자기는 마찬가지였다. 읽어 보고 단어를 고치고, 문장을 고치고, 문단을 뺐다가, 넣었다가, 순서를 바꿨다 되돌려 놓기도 하면서. 그 순수한 즐거움의 출처는 잘 쓴 곡, 잘 쓴 글이라서가 아니라, 역시 ‘내가 만든 세계라서‘였다.


그러다 일을 쉬는 기간이 길어지고 은행 잔고에 정체기가 찾아온 즈음 다시 일정한 수입원을 찾아야 했다. 에세이는 최소 열다섯에서 스무 편은 써야지 하고 계획했기 때문에 아직 몇 편 더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새로 구한 일의 재택근무를 마치고 다시 글을 쓰려니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글쓰기밖에 중요한 할 일이 없을 때는 그게 그리 찬란하고 좋더니, 돈 버는 일을 하니까 글쓰기가—정확히 말하면 내 글이—그렇게 하찮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는 프로 작가도 아니고, 뭇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돈 못 버는 일에 또 꽂혔구나, 싶었다. 노래에 그랬던 것과 꼭 같이.


그래도 연재를 무사히 마치자는 혼자만의 약속을 지키려 태블릿 앞에 앉았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쥐구멍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 안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황홀한 치유의 세계가 있는데, 입구는 겉에서 보기에는 벽에 뚫린 작은 구멍에 불과했다. 집중하려면 다시 저길 들어가야겠지만 그럴만한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들이는 노력과 시간 대비 금전적 이득이 없다는 게 가장 컸다. 이 시간이면 돈 벌 궁리를 먼저 하는 게 ‘맞지’ 않나,라는 조바심이 쉬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쓰고 싶은 이유는 작은 재미 하나인 데에 반해 돈을 벌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쳐흐르는 게 현실이었다.


예전에는 어떻게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곡 쓰고 공연도 하고 그랬을까. 심지어 안정적인 직장 관두고 사서 고생하면서까지 어떻게 음악을 했을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다가 그때는 어리고 에너지가 아주 넘쳐났잖아, 하며 아차 싶다. 젊음에서 오는 자연적인 생명력이 불안보다 월등히 기력이 셌다. 돈은 적게 벌어도 술값은 안 아깝고 가난이 무섭지 않았던 때. 노래가 있는 한 세상은 아름답겠지 여겼던 때. 영원히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던 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조직사회가 나에게 기회를 줬을 때 못 이기는 척 휩쓸려 가지 못한 데에 후회가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이고, 노후의 안정을 도모하는 방법에 부쩍 귀를 쫑긋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몇 년간 우상향 하며 인간관계를 침식해 나가던 내 대인기피는 몹시 악랄하고 고약해서 음악, 일, 학창 시절 할 것 없이 나와 과거의 연결을 마구잡이로 끊어 놓았다. 오랜 노랫말처럼 ‘내가 떠나보낸 것도,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명백히 떠나보냈고 떠나왔다. 어쩌면 그 구간들을 다시 이어 보려 시작한 게 글쓰기였으나, 그렇다고 전처럼 무서울 것 없이 빠지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인생을 몰빵해도 좋을 만한 재능을 일찌감치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 음악이나 글쓰기 같은 이런 부류의 일들은, 자신을 설득할 ‘이유’를 만들어 내는 것부터가 창작의 진짜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가 소심하기까지 하다면, ‘내가 창작을 해야만 하는’ 그 이유 하나 만들기가 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고통일는지 모른다.


한편으로 이것은 마치 시간이 없어서 운동을 못 하는 사람의 핑계와도 비슷하지 않은가? 실제로 운동을 몇 년째 상습적으로 미루고 있어서 안다. 운동? 하면 좋은 거 잘 알지. 근데 좀체 여유가 안 나. 미루는 사이에도 세상은 자꾸만 그를 길들인다. 주식투자도 해야 하고, 피부관리도 해야 하고, 외제 차도 사야 하니까 쥐구멍 따위는 그만 잊어버려. 이런 걱정에 익숙해질수록 그 찬란하고 아름답고 온전한 세계를 품은 쥐구멍은 저만치에서 쪼그라든다.


몸을 잔뜩 수그리고 쥐구멍에 찾아 들어가는 일이 번거로워질 대로 번거로워진 어느 날. 그의 휴대폰에 알림이 하나 올지도 모른다. 어디쯤에서 끊어졌는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뜬금없는 인사.

“오늘 너무 힘들어서 네 노랠 들었어.”

다짜고짜 이게 무슨 말인가. 하지만 그 뜬금없는 한마디는 그를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기 충분하다. 벽에 뚫린 그 작은 구멍 속으로.

입구에선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돈 걱정은 쥐구멍 밖에서 많이 했잖아.’



P.S. 운동도 그만 미뤄.



Seine



이 ‘쥐구멍‘ 글은 2022년에 발행한 적이 있는 기록입니다만, 이번 매거진 연재 시작하며 약간의 편집을 거쳐 재게재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쓰지 뭐>는 2023 브런치북 『지금부터 하지 뭐』에 이어지는 '쓰기'에 관한 그림에세이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never-or-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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