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라는 착각

밖으로 나갈 일 만들기

by 세상 사람


지난해 초겨울부터 밤산책 클럽 양상에 변화가 찾아왔다. 날이 추워지면서 밤길 나서는 일이 점점 내키지 않아진 탓도 있고, 낮에 외출할 일도 생겨서다. 그런 김에, 또한 그 무렵 가는 곳마다 알록달록 단풍 들기 시작한 나무들이 예쁜 김에, 겸사겸사 클럽운영팀에서 낮 산책을 공식 허용했다.


클럽 활동 외에 나갈 일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면접이었다. 9월 조경기능사 합격 후 식물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6월에 원서 접수하며 처음 접한 분야라,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는 아직 뚜렷하지 않은 상태였다.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키워드를 검색하고, 지원해 볼만한 포스팅을 죄 스크랩한 뒤, 하루 몇 군데씩 정해 이력서 넣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전공도 아니요, 관련 경험도 전혀 없는 내 이력서로는 서류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사 담당자의 열람 후에도 별다른 연락이 없으면, 지원한 서류를 열어 내용을 다시 훑었다. 일할 준비가 안 돼 보이나? 무엇을 보완하면 좋을까? 관련 없는 예전 경력만 너무 장황하지는 않은지. 또 지나치게 요약해서 아무 역량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아닌지. 그런 물음을 거쳐 수정을 거듭했다.


그러다 보니 면접 볼 일도 생겼는데, 막상 단정하게 차려입고 낯선 곳으로 외출하니 으레 그렇듯 나들이 나온 착각에 빠진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도 드문드문 구직 활동을 해 왔는데, 그때마다, 면접 보러 갈 때마다 반드시 그러는 나를 나 자신도 못 말리겠다. 이번에는 그 착각이 '단풍놀이'였다. 매년 보면서도 새롭고, 새롭다면서도 그대로라 안심되는, 이상하고 좋은. 만나길 기다려 온 오랜 친구를 길에서 마주친 기분에, 순간 구직자 신분을 잊는다.


구직을 시작하면 초반에는 의지가 불타오른다. 구인 공고에 기술된 직무가 어렵지 않아 보이고, 출퇴근길이 멀어도 문제없을 듯하다. 하지만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곳들에서는 연락이 없고, 어느덧 처음 예상과는 한참 달라진 포지션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 어딘가에 정직원으로 고용되는 일에 더는 미련이 없는 줄로 알았는데, 원하지도 않던 그 경로에서 무슨 성과라도 있어야 내가 증명될 것 같아 괴로워진다.


그러다 면접을 보면 보통은, 중반부터 지친다. 너무 많은 질문을 받고, 정말 그런 게 알고 싶은 건지 궁금하다. 급여를 주며 함께 일할 사람이니 다양한 검증을 거쳐야 하는 그들의 노고를 이해는 하면서도, 선을 넘는다는 생각이 들면 나도 연기를 멈춘다. 초반의 열의는 사그라들고, 걱정과 긴장이 엎치락뒤치락한다. 하루 여덟 시간을 한 곳에서, 같은 사람들과 매일. 과연 나는 다시 그걸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번 구직활동은 이전과 조금 다르다. 과거 디자인 경력이며 전업 디자이너로 재진입할 마음을 모두 내려놓았다는 점. 중년 이후에도 현실적으로 고용이 되는 분야면서, 일 외에 개인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구조를 찾고 있다는 점. 정해진 답은 없더라도 막연히 그런 모습을 그리고 있다. 쓰고 보니 거창한 계획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일이야 기회 닿는 곳으로 가야 할 테고, 그 구조라는 것도 주어지는 게 아니라 차차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아예 재택근무만 하는 옵션도 여전히 살아있다. 하나 집에 혼자 너무 오래 있었더니 정신 건강에 해롭더라, 하는 사실도 자명해졌으므로 당분간은 밖으로 나가는 일을 만들고 싶다. 모든 게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환경에 시간을 조금 의탁하고 싶기도 하다. 물론 딱 원하는 만큼만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서너 해 전, 일하면서 도시락 싸기 100일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다. 그곳은 풀타임은 아니었지만, 근무시간이 꽤 길고 평일 내내 출근해야 했다. 그래서 도시락으로, 소풍이라고 나를 속이고 아침마다 더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쌌다. 매일 밤 '내일은 무슨 메뉴로 할까?' 상상하면서 설레고, 한껏 예쁘게 만들어 인증샷을 올리면 뿌듯했다. 출근하면서도 도시락 까먹으러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발걸음이 가벼웠다. 적어도 한동안은 효과가 좋았다.


이번에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임해야겠다. 소풍도 좋고, 나들이도, 하루 여행도 괜찮다. 착각하는 역량을 길러 보자.


Seine



사진은 어느 빌라 앞뜰에 꾸며진 작은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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